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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왕방거사 - 성여완의 발자취
고려왕조 500년간 수도였던 개성의 선죽교는 개성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물이다. 선죽교가 유명한 것은 포은 정몽주 선생이 격살당하며 흘린 피가 돌에 스며들어 지금까지 붉게 남아있다는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1.개성에서 발견한 선죽교의 유허비
개성관광 간다고 하니 마음부터 설렌다.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대치된지 참으로 오랜만에 정부가 추진한 개성관광, 2008년 6월 6일, 서울 창덕궁 옆 현대문화센터에서 아침 6시 출발, 버스를 타고 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하여 수속을 마친 후 8시경 북측 출입사무소를 통과했다. 북측 안내원의 환영인사말을 들으며 버스는 개성공단을 한바퀴 돌아서 개성으로 향한다.
이번 여행은 옛 송도3절 중 하나인 박연폭포와 선죽교를 생전에 가보고 싶은 마음에서 참여하게 되었다. 개성에 가까워 지면서 멀리 보이던 개성의 대표적 산인 송악산이 시야에 들어 온다. 처음 마주친 개성 거리 모습, 안내원은 “개성은 성이 열려져 있다”는 뜻으로 16개의 성이 분지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 중 나성(羅城)은 길이가 60리가 된다고 하였다. “개성의 대표산인 송악산은 건강한 젊은 여인이 머리채를 풀고 누워있는 모습으로 어머니 산이고, 그 아래 야트막한 자남산은 아들 산”이라고 하였다.
박연폭포 주차장에 하차후 시작된 개성관광은 박연폭포, 관음사, 선죽교, 표충비, 숭양서원 고려박물관 등을 관람하는 일정이다. 박연폭포는 금강산 구룡폭포, 설악산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 가운데 하나이다. 선죽교에 들렀다. 선죽교를 둘러보고 난후 20m 정도 거리에 왼? 비각 하나가 보인다. 호기심에 가보니 뜻밖에도 유허비가 아닌가? 정몽주의 원혼이 서린 선죽교, 그 옆에 고려말 충절 성여완의 유허비가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놀랐다. 비각 내부를 살펴보니 비 전면에는
‘昌寧府院君文靖公成汝完遺墟(창녕부원군문정공성여완유허)
라 쓰였고 후면에는 萬曆丙申 七代孫 留守壽益 立此碑 中經傷折 庚寅 外裔 留守權尙游 改立’라 하였다. 즉 ‘병신년(1596년) 칠대 손 유수 성수익이 이곳에 비석을 세웠는데, 중간이 부러져서 경인년(1710년) 외손 유수 권상유가 다시 세웠다’라는 내용이다. .
^2008년 6월6일 개성관광- ↑ 이헌공유허비, ^이헌공 성여완 비각앞에서
2.고려의 충절, 이헌공 성여완은 누구인가?
선생의 본관은 창녕(昌寧), 고려조의 문하시중(門下侍中) 성송국(松國)의 증손, 봉상대부(奉常大夫) 성군미(君美)의 아들이다. 성여완(1309, 충선왕1- 1397,태조 6년)은 고려말의 문신으로 호는 이헌(怡軒)이다. 1336년 문과에 급제, 벼슬은 공민왕 때 민부상서에 이르렀다. 신돈이 처형당하자 그 일파로 지목되어 유배당했다가 1378년(우왕 4년)에 정당문학상의로 다시 발탁되었다.
고려말의 정치적 혼란기에 정몽주는 이방원의 ‘하여가’에 대한 대답으로 ‘단심가’를 읊었다. 이 노래를 읊은 정몽주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선죽교 근처에 살고 있는 친구 성여완의 집을 들렀다. 정몽주는 그 집의 술맛이 유별남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집에 없었다. 정몽주는 하인에게 술을 청해 연거푸 여러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집을 나섰다. 그는 말을 꺼꾸로 탔다. 앞에서 때려 죽이는 것이 보기 싫어 그랬다. 죽음의 의미까지 훼손시키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몽주가 살해되자 성여완은 고려의 국운이 기울었음을 알고 포천 왕방산 계류촌에 들어갔다. 태조가 여러차례 시중 벼슬을 내리고 창녕부원군에 봉했으나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성계는 살아 나라를 세웠고 정몽주는 죽어 만고의 충신이 되었다. 그리고 성여완은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다.
‘가곡원류(歌曲源流)’에 그(성여완)의 시(詩) 한수가 전한다.
일 심거 느지 퓌니 군자(君子)의 덕(德)이로다
풍상(風霜)에 아니 지니 열사(烈士)의 절(節)이로다
지금(至今)에 도연명(陶淵明) 없으니 뉘라 너를 닐니오
(일찍 심어 늦게 피니 군자의 덕이로다. 바람과 서리에 아니 지니 열사의 절이로다. 지금에 도연명이 없으니 아는 사람이 많지 않구나)
이 시조는 국화를 제재(題材)로 하여 군자의 덕과 열사의 절(節)을 찬양한 시조다. 이는 곧 고려의 멸망을 보며 작가 자신의 변함없는 지조를 다짐한 것이다. 이 시조는 도연명(陶淵明)의 음주(飮酒)라는 시에서 도연명(陶淵明)을 연상하며 인용한 것 같다.(신웅순 저,‘시조는 역사를 말한다’에서)
3.고려왕조 몰락과 조선개국 격동기에 성여완의 선택은?
여말선초(麗末鮮初)는 개혁과 참혹한 권력투쟁이 병행되던 시대였다. 개혁파는 궁극적으로 왕조 교체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반개혁파는 고려왕조의 존속을 위해 싸웠다. 개혁파가 모두 반역적인 것은 아니었고, 반개혁파가 모두 수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개혁과 충성이라는 두 가치가 분열됐다. 누구든 하나의 가치를 선택해야 했다. 중립이나 공존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양심적인 정치가들은 내면적 분열과 고통을 겪었다. 정몽주는 두 개의 가치 사이를 방황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최영장군 처럼 정몽주는 시대의 정치적 상황이 초래한 비극적 인물의 전형이 됐다. 이러한 생사의 격동기를 맞은 성여완도 개혁파냐 반개혁파냐의 갈림길에서 시대적 고민을 많이 했을 것으로 본다. 그 사연이 ‘이헌공 성여완 유허지 유허비 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태조(李太祖)가 개국한 다음 한성으로 대족(大族)들을 이사시키자, 공(公)은 개성의 구택(舊宅)을 태조 2년 4월에 4남인 낭장공 석번에게 맡기고는 한양남문 밖 한림동(현 만리동)에 우거하고 도성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태조4년 3월 20일에 임금이 새 궁궐의 양청(凉廳/慶會樓)에서 주연을 베풀었는데, 태조는 잠저(潛邸, 임금으로 등극하기 전에 살던 집)에 있을 때 친구로 대우하여 가마를 보내어 초청하였다. 공(公)은 마침내 백의관(白衣官) 차림으로 나아가 뵈우니 세상에서 서궁양청포의연(西宮凉廳布衣宴)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공은 귀향해서 고려를 위하여 절의를 지킬 것을 요청하였다. 태조는 의롭게 여겨 예송(禮訟)하였다. 공은 마침내 포천의 왕방산(王方山)에 은둔하여 묘덕암(妙德庵)을 짓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뒷산에 올라가 개성 송악산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두문불출하고 호를 왕방거사(王方居士)라고 고쳤는데, 이는 왕씨가 있던 곳을 잊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 산을 두문봉이라 하여 지금까지 전하여져 온다. 조선초(朝鮮初)에 기로(耆老)로 보국숭록대부 검교 문하시중에 제수되고, 창성부원군에 봉해 졌으며 공(公)께서 처음으로 기로사(耆老社)에 드셨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고 은거하셨다.”
4.부자(父子)간에도 정치적 행보는 달랐다.
성여완의 큰 아들인 독곡 성석린(1338-1423)은 야은 길재, 목은 이색과도 교류가 있었으나 조선개국 후에는 삼은(三隱)과는 궤를 달리하여 조선에 충성을 다한 인물이었다. 이성계가 조선의 개국을 선포했으니 이미 때는 놓쳤다. 아버지 성여완의 고려에 대한 충정이 강하여 설득이 되지 않아 조선개국공신이 되는 기회도 날렸다. 고려의 신하로써 절개를 지킨다면 패가망신은 불을 보듯 뻔 한 일이다. 조선에 협조를 하면 세상의 손가락질은 받는다고 해도 가문과 식솔들이 건재할 수 있다. 고려가 중요한 만큼 성씨가문의 생명줄도 가볍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성여완은 일찍이 소년등과한 큰아들이 아비 때문에 개국공신도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음을 못 본척할 수 없다. 아비로써 아들들이 조선에 협력하겠다는 의지를 더 이상 막을 수도 없고 막을 힘도 없다. 그들은 나이도 젊고 식솔도 많다. 5촌 조카인 성사제(직제학:정4품)는 이미 개풍군에 있는 광덕산으로 들어가 조선과는 인연을 끊고 고려의 충신으로 절개를 지키겠다고 선언하여 두문72현이 되었다.
성여완은 이미 나이 83세로 천지의 원리를 터득한 세월을 지녔지만, 점점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있다. 그가 고려의 충절을 지켜주어야 창녕성씨 가문의 명분이 선다. 그러나 이성계의 독촉이 여간 심하지 않다. 진주 강씨는 조선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죄로 곤장을 맞기도 했다. 이 나이에 더 이상 호강할 일이 무언가. 성여완의 묘는 왕방산을 바라보고 있다. 왕방산이 고려왕조를 뜻하는지, 조선왕조를 뜻하는지 아는 사람은 성여완 자신뿐이다.
자식은 부모 마음대로 안된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성여완과 아들 성석린의 길은 달랐다. 성여완은 은둔하여 고려 사람이 되었고 아들은 현직에 나가 조선 사람이 되었다. 신이 준 오늘이라는 마지막 선물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가. 삶은 변명이 있을 수 없는 처녀의 길. 당당하면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그런 삶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김규순의‘풍수이야기’에서)
5.창녕성씨의 명문가 부상(浮上) 중심에 성여완이 있다.
창녕성씨는 성여완이 조선개국에 공을 세우면서 가문이 번창하여 조선조의 명문가로 부상하는 기반이 마련됐다. 그는 성품이 간결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아들을 가르치는데에도 법도가 있었다고 한다.
창녕성씨는 고려후기에 5대를 연이어 1품에서 3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명문가였다. 성석린(정당문학,종2품) 성석용(밀직제학, 정3품) 성석연(지평, 종3품무관)은 성여완의 아들인데 이들도 고려의 높은 벼슬아치였다. 조선조에서 성석린은 영의정을, 성석용(보문각대제학)과 성석연(수문전,예문관)은 대제학을 지낸다. 조선개국의 대들보 역할을 하였다. 비록 조선개국공신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성여완의 기지와 희생으로 자식들은 고려를 넘어서 조선에서 더욱 찬란한 벼슬을 이어간다.
창녕성씨 인물 중에서 유독 성여완에게 초점을 두는 것은 그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다른 가문에서는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놀랍고도 다양한 인물을 배출한 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명문가라고 해도 대부분 일신이나 가문의 영달을 추구하는 것과는 달리, 그의 후손 중에는 사육신, 생육신, 동국18현, 대제학4명 등 감히 어느 가문도 넘겨다보기 힘들 정도로 학자와 충신이 배출되었다.
반면, 계유정란(14530,단종1년)으로 왕좌를 찬탈한 세조는 성승(성석용의 맏손자)장군과 그의 아들 성삼문, 성삼빙, 성삼고, 성삼성 그리고 그의 손자 6명까지 모조리 죽여 소위 종손의 씨를 말린다. 성삼문은 한글창제의 주역이다. 둘째아들의 맏손자인 성담수도 생육신으로 후사가 없다. 왕방거사가 억눌러 놓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용솟음이 50년 후에 터진 것일까?
그 이후로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창녕성씨는 조선중기 이후로는 큰 인물이 배출되지 않고 있다. 그런가운데 가문은 쇠약해지고 지리멸렬해진 단계까지 왔다. 계유정란 참사로 인하여 ‘명문가의 맥이 끊긴 것’은 아닐까? 아니면 창녕성씨의 올곧은 성품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이유일까?
이에대해 김규순(서울풍수아카데미)원장은 “200년 동안 최고의 문벌을 유지했던 창녕성씨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해진 것은 권력에 대한 결벽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며 “이제 창녕성씨는 권력에 대한 결벽증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의 인재로 거듭나기 바란다. 국가의 인재가 되면 가문의 인재가 되는 것이다.”라고 조언한다.
6.자연으로 돌아가 왕방산에 은거
왕방산(王方山, 737m)은 포천의 진산으로 신라 헌강왕이 도선국사를 만나러 방문했던 곳이라고 하며, 태조 이성계가 왕방사에 잠시 머물렀으며, 태종 이방원이 젊은 시절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기도 하다. 왕방산은 곧 조선의 왕을 의미하기도 하고 고려의 왕을 의미하기도 한다. 굳이 누구를 섬기겠다고 말해야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성여완의 호가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이헌(怡軒)인 것을 보면 시대적 혼란기를 뛰어 넘는 유유자적한 도가적 풍미를 엿볼 수 있다.
서울에서 왕방산 가려면 의정부 시가지를 거쳐 43번 국토를 타고 축석령 고개를 넘어서 포천시내로 접어든다. 다시금 좌회전하여 87번지방도를 타고 가다가 무럭고개를 넘게 된다. 무럭고개, 무릎고개란 여러 이름을 가진「문례현(問禮峴)」은 포천 신읍동에서 신북면 심곡리(깊이울)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신북면 고일리에는 이헌(怡軒) 성여완과 그의 아들 성석린의 묘가 있다. 성여완의 맏아들 성석린에 대하여는 여러 필진을 통하거나 TV사극을 통해 ‘함흥차사’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이며 두 인물을 모르고서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역사를 논할 수 없을 만치 유명한 인물이다.
성여완은 왕방산을 바라보며 말년을 살았으며 「왕방거사」로서 누구나 함부로 찾아오기 힘든 곳에서 은거하였던 것이다. 자연 그대로, 있는 그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삶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을까? 어찌보면 요즘 TV에 등장하는‘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외딴 산 속에서 홀로사는 ‘현대판 자연인’이라고나 할까. 그의 묘와 살던 집은 왕방산 정상에서 국사봉(754m)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능선이 이어지며 북쪽으로 30리길을 용맥을 타고 가다가 회룡고조형의 땅에 국사봉을 마주하고 앉은 계류촌의 계곡이다. 그러나 그가 살았다는 집터는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고려말에서 조선초 까지의 정치적 격동기를 살다간 왕방거사 성여완은 1397년 89세를 일기로 전원에서 천수의 생을 마감한다. 왕방산의 북쪽 사면의 계곡을 따라 가면 개성으로 가는 길이지만, 그가 앉은 자리는 남쪽 왕방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지난 세월은 고려의 백성으로 살았지만, 마음은 조선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다. 철학자 루소는 자연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생활 하면서 자연스러운 성장을 해나갈 수 있도록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자연으로 돌아가자'라고 주장했다. 성여완과 성석린 부자의 묘는 현재 포천시 향토유적21호, 22호로 각각 지정돼 있다.
<참고문헌>
1.김규순의 풍수이야기(15)] 월간 사람과 산 2012년6월호 - 왕방산을 선택한 성여완 의 풍수적 지혜
2.[수필가 김창종의 포천이야기-218]왕방거사(王訪居士)와 문례현(問禮峴)
-2007년 11월 21일 [포천신문]
3.[이희용 칼럼33] 함흥차사와 포천 -ⓒ(주)포천신문사
4.김규순의‘풍수이야기’
5.신웅순 저,‘시조는 역사를 말한다’
6.창녕성씨세감록, 창녕성씨문헌지, 독곡공파보
글쓴이: 성범모(공생경제연구소장, 경제칼럼니스트)
첫댓글 창녕성씨 문중의 새로운 별이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