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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자연을 사랑한 정재(靜齋) 成聃年의 생애
"달을 사랑하여 소나무 오솔길 걷고(愛月步松逕)
구름을 보며 이끼낀 돌에 앉으니(看雲坐苔石)
옛날의 한가함을 다시 얻었네(舊閒聊復得)”
이는 성담년(成聃年) 선생이 공조정랑을 끝으로 공직을 떠난 후 지은 詩 한 구절이다.
정재(靜齋) 성담년(成聃年) 선생은 조선 성종(成宗) 때의 문신ㆍ학자로서 예문관대제학 성석용(成石瑢)의 증손이고, 할아버지는 성개(成槪), 아버지는 승문원교리 성희(成熺)이며, 생육신 성담수(成聃壽)의 동생이다.
1470년(성종1) 별시 문과에 甲과로 급제, 1476년 경연검토관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예문관수찬·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1479년에 홍문관교리를 거쳐 공조정랑이 되었고 사헌부대사헌 창녕군에 추증되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이며 저서로는 정재집(靜齋集)이 있다.(일대기는 신도비에 상세 기록되어있다.)
<朝鮮弘文館校理 贈嘉義大夫司憲府大司憲 昌寧君 靜齋成公墓碑銘>
-유년기에 겪은 불행한 家庭事 트라우마
조선시대에는 早婚이 관행이었다. 10대 소년기인 15살 때 첫 부인(동래鄭씨)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이별의 아픔으로 상심할 겨를도 없이 같은 해 당질(堂姪: 5촌 조카)인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이 상왕인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당할 때 연루되어 귀양가는 아버지의 유배길을 따라 나섰다.
창녕성씨회곡공파 세보에 이르기를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문장의 재주가 있으셨다. 아버지 仁齋公(성희)이 丙子년 士禍에 김해로 귀양갔는데 국법이 엄하여 서로 뵈올수 없었다. 공은 당시 나이가 15세였는데 도보로 따라가 온통 발이 부르터 온전한 데가 없었다. 김해에 이른 다음 울부짖으며 밥을 빌어 조석공양을 하였다. 뒤에 마을에서 뽑혀 참봉에 제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찍이 어린 나이에 첫 부인을 떠나보냈고 유배가는 아버지의 고난을 보면서 마음의 상처가 되어 이후 심약한 心性이 된 것 같다.
성종11년(1479) 12월 8일 공조정랑(工曹正郞) 성담년이 전문(箋文)을 올리기를
“신(臣) 성담년은 조부(祖父)와 아비의 음덕에 힘입어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 생활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조년(早年)에는 유리(流離)의 실업(失業)을 만났으며, 중년에는 돌아간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한탄인 풍수지탄(風樹之嘆)이 겹쳤으니, 이로 인하여 병을 얻어서 40세 이후에는 병증(病證)이 대단하고 맥(脈)은 허약해져 앓는 날이 평상시 많게 되었습니다만~~ 신(臣)은 어릴 때 우환을 겪었으므로 일찍이 번화한 것을 사절하였으며, 자취는
은둔하기에 알맞은 임천(林泉)에 깃들이고 마음은 연월(煙月)에 자리잡아서 마침내 연하(煙霞)의 병에 고질(痼疾)이 되고,
이어 시주(詩酒)의 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네 벽만 있는 집에 거처해도 오히려 너그러웠으며 빈한한 삶을 즐겨서 스스로 만족하였으니 이로써 뜻을 수양하여 장차 한평생을 마치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 쇠병(衰病)이 번갈아 이르게 됨에 허출함이 아침을 굶은 듯하고, 은우(恩遇)를 보답하기가 어려움을 생각하니 눈물이 줄줄 흐릅니다.”(성종실록) 사직을 청했다.
- 남산위에 저 소나무, 남산골 샌님
조선 건국 초 태조 이성계가 한양(漢陽)을 도읍으로 정하였을 때 높이 265m인 남산(일명 木覓山)은 풍수지리상으로 안산(案山) 겸 주작(朱雀)에 해당되는 중요한 산이었다. 남산은 우리에게 익숙한 山이다. 애국가 2절은 ‘남산 위에 저 소나무~~ ’로 시작하고 동요 ‘달달 무슨 달’에도 ‘남산같이 둥근달’이 나온다. ‘소나무 숲’의 상징인 남산에는 많은 소나무가 분포돼 있다. 소나무는 선비의 덕목을 나타내는 지조, 절개, 충절을 상징한다.
남산은 자연 경치가 매우 빼어나 지금의 한옥마을이 들어선 筆洞 지역은 조선시대 당시 우리 조상들이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마다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고 한다. 남산 북쪽 기슭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남산골이라고도 불리었다.
남산골 샌님!
KBS연속극 주제가로도 나왔던 남산골 샌님은 선비들이 衣食住 생활이 비록 가난해도 불의에 굴하지 않고 지조를 굳굳이 지킨다는 말로, 가난한 선비들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는 말. 이들의 정신적 기질을 선비정신이라 했다.
- 남산골 선비 성담년(成聃年)의 五言詩
남산에 지은 草家 집 한 채, 내 천성이 그윽한데를 좋아하네,
달을 사랑하여 소나무 오솔길 걷고, 구름을 보며 이끼낀 돌에 앉으니
만나는대로 정흥이 일고, 오락가락 멋대로 노니네
며칠동안 비가 부슬 부슬, 처마 끝에 구름이 자욱하더니
오늘 아침엔 문득 다시 개어서, 짙푸른 기운이 뚝뚝 떨어지려 하네
소나무 오솔길에 이슬이 산뜻하고, 시내에 맑은 물은 소리도 요란해라
오늘 따라 술벗도 오지 않으니, 작은 서재가 더욱 고요하구나
회포 읊어서 詩나 한 首 지어볼까, 거문고 줄 골라도 곡조가 안되네
대지는 원래 한가함과 바쁨이 없고, 소지는 외물에 마음이 시달리네
여러날 동안 출퇴근 없으니, 옛날의 한가함을 다시 얻었네
한가하고 일 없음이 바로 眞境, 진경은 본시 사물이 없는 법
있는 건 다만 망천의 흥뿐, 멋대로 산보하며 나혼자 걸었네
이 詩는 동문선에 실려 있다.
(弊廬卜南山 淸幽性所僻 愛月步松逕 看雲坐苔石 情興因所遇 往來任自適 連日雨霏霏
雲煙宿簷角 今朝忽復晴 空翠濃欲滴 松蹊風露淨 石澗淸流聒 酒伴亦不來 小齋益淸寂
哦懷欲就句 調琴未成曲 大知無閑忙 小知形所役 累日無卯酉 舊閒聊復得 閒懶是眞境
眞境本無物 只有輞川興 散步自怡悅)
공직을 떠나 남산 풍광에 매료되어서 낙향하기 전 公은 한 동안 남산골에 은거한 것으로 보인다. 남산골 샌님이 되어 마치 중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처럼 맑은 시냇물 대하고 자연을 벗하며 시를 읊기도 하면서 비로소 여유로움을 찾은 것일까? 그 징표가 그의 부회(賦懷)라는 오언시에 그대로 잘 나타나 있다.
진정한 자유를 알아 그것을 만끽하며 넉넉하고 풍요로운 마음으로 살다 간 가슴 따뜻한 자유인이었다고 볼수 있다. 고요하고 자연스런 읊조림과 멀리 세속의 티끌을 넘어 서서 맑고깊은 운치를 칭송하는 긍정적인 사고와 자연에 대한 합리적인 이치를 폭 넓게 구현한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 거침없는 직언으로 순탄치 못한 벼슬 길
성종원년 별시문과에 甲科로 급제하였다. 院에 출근하러 나가는 길에 馬上에서 대학 중용을 외어 院에 도착한 다음에야 그쳤는데 항상 이렇게 하였다. 예문관修襈 겸 經筵검토관에 임명되고는 성의를 다하여 임금에게 충언을 아뢰였으며 사건을 만나면 용감히 말하였다. 이 때 바야흐로 황주의 극성(棘城)에 성을 쌓으려고 하여 축성사를 동원하려 하자 공은 항소를 올려 “만약 극성을 쌓는다면 백성들이 내외의 마음을 품게 될 것이니 국가의 이익이 아닙니다.” 하였으므로 즉시 중지하도록 명령하였다.
성종 8년6월에 公은 검토관으로서 啓言하기를 “仙術을 구하는 것이 이익이 없음은 한무제를 보면 알수있는데도 唐나라 헌종은 오히려 혹 했습니다. 眞德秀의 大學衍義에 역대 仙佛에 대한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한 자취를 기재하였으니 성학에 도움이 있는 것이 이 책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만일 이에 마음을 두어 성찰을 가하신다면 聖學에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전지를 내리시기를 “사람이 견문은 있어도 능히 말하는 자는 적다. 나는 네말을 듣고 깊히 가상하게 생각한다. 옛말에 정을 숨겨 자기 몸을 아끼는 것은 추위를 견디는 겨울 매미라고 할만하다. 추우면 매미는 울지 못하는데 이러한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즐기지 않을 것이다.” 하시고 인하여 털로 만든 말안장 하나를 하사 했다.
사간원 정원으로 옮겼으며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는데 四佳 徐居正이 대제학으로서 大平閑話(한문으로 편집된 해학적 이야기책이므로 일종의 문헌 설화)를 짓자 공은 임금에게 아뢰기를 “서거정은 한 시대의 문형을 맡았는데도 후세에 남길만한 교훈을 만들지 않고 사대부의 집안일을 엮어 손벽이나 치며 웃는 자료를 삼고있으니 심히 불가합니다.”하였다.
四佳는 이 말을 듣고 “이런 사람은 산수 좋은 지방관으로 보내어 풍월이나 읊조리게 해야 한다.”하고 얼마후 黃澗현감으로 제수되었다가 공조정랑으로 돌아오게 되자 공은 탄식하기를 “우리들은 지난날 경연에서 모셨는데 金銀을 맡는 공조의 일을 하겠는가”하고 성종 10년 기해 11월에 상소하여 病으로 사직하니 임금께서 내의원의 약재를 하사하였다.
홍문관교리 성담년이 봉서(封書)를 올렸으나 유중불하((留中不下, 임금이 소장(疏章)을 궁중에 머물러 두고 관계기관에 회부하지 않던 일))하였다. 전교하기를 “성담년이 나로 하여금 大學의 본전(本傳)을 겸해서 읽도록 하였는데 그 뜻은 매우 좋았다. 그러나 내가 읽는바가 너무 많은데 어찌하겠는가? ” 하고, 그에게 음식을 대접하도록 명하였다. (성종실록 1479년 기해 성종10년, 5월27일)
- 말이 맞지 않는 미친 아이(狂童)를 추국할 수 없다.
漢城에 황사비가 내렸다. 민심이 흉흉했다. 그 때문에 성종 9년(1478) 4월15일 ‘현덕왕후(단종을 낳은 문종의 비)를 복위하자’는 소위 '昭陵복위상소'가 올라왔다. 현덕왕후를 복위시켜 인심을 편안하게 하여야 하늘의 재앙을 마감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 당시 25세 젊은 유생 남효온이 「성종대왕에 올리는 상서(上書)」였다. 당시로서는 국가적 금기사항으로 되어 있던 세조 치세의 어두운 상흔을 공개적으로 들춰낸 최초의 언론이었다.
오늘날 인심이 소릉의 폐출을 억울해하므로 천재지변과 이상기후가 빈발한다는 것이었다. 소릉은 노산군을 낳은 현덕왕후가 문종의 현릉에 합장되기 전의 능침이다. 즉 현덕왕후를 복위시켜 인심을 편안하게 하여야 하늘의 재앙을 마감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먼저 성균관이 발칵 뒤집혔다. 남효온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정체절명의 순간이다.
"이런 부박한 풍조를 두고 볼 수 없으니 국문하자." 최고공신 한명회도 좌시하지 않았다. "소릉복위와 공신배척은 세조를 비난하고 헐뜯은 것이므로 남효온과 이심원을 처벌하지 않으면 공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 남효온과 이심원을 구원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성삼문의 再從弟로서 성담수(成聃壽)의 친동생인 성담년(成聃年)과 노사신(盧思愼)이 나서서 소수의견을 냈을 뿐이다. 사연인 즉 "말이 맞지 않는 미친 아이를 추국할 수 없다." 광동(狂童)이니 불문에 부쳐야 한다는 논리였다. 자칫 참화가 일어날 뻔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무사하였다. 성종의 '求言으로 인한 언론을 처벌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뜻이 확고했던 것이다.(이종범의 士林열전 남효온 편)
-금병산 아래 달전마을에서 유유자적
세종자치시와 대전의 경계에 우뚝선 금병산이 있다. 해발 372m 높이의 금병산은 신라시대에는 금평산, 고려시대에는 만인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러다 조선 창업의 뜻을 품고 팔도 명산을 찾아 기도를 하던 태조 이성계가 ‘비단 병풍을 갖추고 치성하라’는 현몽을 꾼 뒤 이곳을 ‘비단 병풍’을 뜻하는 금병산이라 이름 붙이고 산천 기도를 했다고 전해진다.
公은 말년을 금병산 자락 아래 공주의 달전(지금의 세종시 금남면 달전리)에서 보냈다.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고단함에 쉽게 지치지도, 사무치는 외로움에 쉽게 빠지지도 않는 법, 마치 오언시 부회처럼 “~ 여러날 동안 출퇴근 없으니 옛날의 한가함을 다시 얻었네~ ” 철학자 루소가 말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를 실천했다고나 할까?
그는 생을 마칠 때 까지 전원에서 스스로 詩酒로 유유자적하다가 그가 애정을 쏟아부은 자연으로 돌아갔다. 성종14년에 별세하니 향년42세. 너무나 짧은 생애이다. 公의 묘소는 금남면 달전리 산12번지에 있다. 풍수적으로 보면 주산인 금병산에서 龍(산)이 내려와 식사태왜형(食蛇苔哇形 또는 蛇頭形)을 이루니 이는 뱀의 입(口) 부위, 귀(耳)부분이 명당이다. 앞쪽에 개구리 형상이 있으면 더욱 좋은데 이런 곳에 묘를 쓰면 귀한 인물이 나온다고 한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과연 공의 後孫들은 어떠한가?
후손들도 문인이 많다.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몽선(夢宣)으로 한성좌윤을 지냈으며 필법이 호건하고 시율이 뛰어났다. 차남 몽정(夢井)은 문과에 갑과로 급제 후 도승지, 병조참판, 한성부 판윤, 대사헌등을 지냈으며 시호는 양경(襄景)이고 문집이 간행되었다. 영의정 김상진의 매부이다. 타고난 성품이 단아하고 순수하였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의 증손 성수익(成壽益)은 강원도도사, 형조정랑, 형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다. 현손인 성진선(成晉善)은 대사간, 홍문관부제학, 승정원우지 등을 지냈다.
공의 6대손 성하종(成夏宗)은 청백리였다. 1603년(선조 36년) 무과에 급제한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형조좌랑, 군기시 첨정, 훈련원 부정을 거쳐 갑산부사, 길주목사, 함경도 병사 등을 역임하였다. 1633년(인조 11년) 강계부사로 있으면서 인근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이름을 떨쳤다.
이때 청백한 목민관으로 근무했던 생생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인조 11년)>에 ‘강계부사 성하종은 청렴 검소하고 자상한데,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되게 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자진해서 2백 석의 쌀을 바치고 1년을 더 유임시켜 줄 것을 애원하므로 평안도에서 이 일을 아뢰니, 임금이 유임을 허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636년(인조 14년) 성하종은 김상헌, 김덕함, 이안눌, 김시양과 함께 청백리로 선정되었고, 창흥군(昌興君)에 봉해졌으며,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었다. 1643년(인조 21년) 다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북방 방어에 크게 공헌하였는데, 그 때에도 청렴했던 선생의 일상이 <조선왕조실록(인조 21년)>에‘북병사 성하종이 임지로 떠나기에 접견하여 임금이“함경도로 가는 길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수령들은 다 무신으로서 청렴하고 간소한 자가 적은데, 그대는 본래부터 청렴한 지조가 있으니 그들의 모범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후 1645년(인조 23년) 함경도 경성에서 병으로 인해 7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선생의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은 슬퍼하며 특별히 예장(禮葬)을 명하였으나 대신들이 그동안 관례가 없다고 하여 부의(賻儀)와 조제(弔祭)할 것을 명하고 병조판서를 증직하였다. (출처: 淸白吏, 이술(而述) 성하종(成夏宗), 장성군 평생교육센터 2016.1.12.)
(靜齋)공은 성품이 항직(抗直)하고 광랑(曠朗)하여 세상과 부앙(俯仰)하지 않으셨다. 후손들이 크게 출사함에 사후 양경공(襄景公)의 녹훈(錄勳)으로 純忠輔祚 공신 嘉義大夫 사헌부대사헌 창녕군에 추증되었다.
- 만일 나를 믿지 못하거든 이 墓碣名을 보라
소년기에 첫 부인과 사별 후 비문(碑文)에
“아름다운(懿厥) 鄭씨여 成씨가로 시집왔도다. 슬프다 壽하지 못함이여 내 심정이 아프고 또 슬프다. 그대와 굳건히 동거하여야 하는데 당신의 무덤 이미 견고하니 길이 편안하시라. 만일 나를 믿지 못하거든 이 묘갈명(墓碣名)을 보라"고 썼다.
↑<정재공 묘 바로뒤에 강릉金씨묘, 그 뒤에 동래鄭씨묘>
17대 종손 성승모는 “원래 (첫 할머니)墓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이었으나 서울시 도시계획에 의하여 1960년대 에 지금의 세종시 금남면 달전리 夫君 곁으로 이장되었다. ”고 전한다.
死後 500여년이 지난 후에 영혼이나마 재회다. 너무나도 애절한 이별의 혼이 사후에라도 사랑하는 남편 곁으로 찾아간 것이라고 할까? 아니면 남편으로서 첫 부인을 못잊어 합장은 아니어도 남편 곁으로 불러들인 것일까? 정재공 墓는 繼配 강릉金씨 앞에 단독墓다. 남자의 情은 하나라고 했는데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사랑하는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정재公 자신만이 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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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성범모( 대종회보 편집장, 경제칼럼니스트, 전 문경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