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대의원회의 사무처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의안집 (INSTRUMENTUM LABORIS) 2018.10.3-28. 젊은이, 신앙과 성소 식별 소개말
교황 성하께서는 2016년 10월 6일 “젊은이, 신앙과 성소 식별”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의 주제로 선포하셨다.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예비 문서는 곧바로 그 초안 작업이 시작되었고, 교황 성하께서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서한”과 함께, 2017년 1월 13일에 발표되었다. 예비 문서에는 주로 주교회의들과 동방 가톨릭 교회 시노드, 그 밖의 교회 기구들에 보내는 설문이 첨부되었다. 설문은 대상 모두를 위한 15개의 문항들과 각 지역별 3개의 특정 질문들, ‘가장 훌륭한 실천’ 활동 세 가지를 공유하여 달라는 요청으로 구성되었다. 2017년 9월 11일부터 15일까지 열린 ‘세계 젊은이들의 상황에 관한 국제 세미나’에는 많은 전문가와 젊은이들이 참여하여 학문적 견지에서 오늘날 젊은이들이 처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도록 도움을 주었다. 교회 전체의 참여를 목표로 한 이러한 계획들 외에도,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그들이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시초부터 바로 핵심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수차례의 기회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다국어로 된 온라인 설문이 마련되고 여러 주교회의가 이를 번역하였으며 십만 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이에 답변하였다. 놀랄 만큼 풍성한 자료들이 수집될 수 있었다. 이어 2018년 3월 19-24일 로마에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준비 모임’을 개최하고, 3월 25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폐막하며 그 최종 문서를 교황 성하께 제출하였다. 준비 모임에는 오대주에서 모인 300여 명의 젊은이들이 참석하였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도 15,000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참여하였다. 예외 없이 모든 젊은이에게 귀 기울이고자 하는 교회의 바람을 표현한 이 행사에 커다란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러한 주요 원천 네 곳에서 취합된 자료는 -주교대의원회의 사무처에 직접 보내준 몇 가지 ‘의견들’이 더해져- 매우 광범한 것임에 분명했다. 여러 전문가의 도움으로 이 자료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세밀히 종합한 ‘의안집’이 집대성되었고, 교황 성하께서 함께하신 ‘주교대의원회의 사무처의 제14차 평의회’에서 이를 승인하였다. 이 의안집은 세 부분으로 나눠져, 10월에 열릴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의 진행 계획을 반영하여 그 식별 방식에 따라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다룬다. 제1부는 “인식하기”라는 제목으로 총 다섯 개의 장을 통해, 여러 관점에서 젊은이들의 현실을 듣고 그들이 처한 상황을 진단하여 다양한 사례의 상황들을 취합한다. 제2부는 “해석하기”라는 제목으로 총 네 개의 장을 통해, 시노드의 식별을 요청한 결정적인 문제들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의 열쇠들을 제시한다. 제3부는 “선택하기”로 총 네 개의 장을 통해, 시노드 교부들이 어떤 방향을 따라야 하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입장을 세우도록 도와줄 여러 요소들을 취합한다. 의안집의 결론에서는 성덕을 주제로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가 성덕을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9항)로 인식하고 이를 현대의 모든 젊은이에게 전해 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바티칸에서 2018년 5월 8일 주교대의원회의 사무처 사무총장 로렌초 발디세리 추기경
서문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목적 1. 젊은이들을 돌보는 것은 교회의 선택적 임무가 아니라 교회의 소명과 사명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곧 이것은 다가오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다룰 구체적인 분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걸으셨던 바로 그대로(루카 24,13-35 참조), 교회 또한 예외 없이 모든 젊은이와 동행하여 사랑의 기쁨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요청받는다. 젊은이들의 존재와 그들이 하는 말은 교회의 모습을 젊게 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폐막 메시지 가운데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1965년 12월 8일)와 젊은이에 관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2018년 10월 3-28일)는 같은 주제로 연결된다. 준비 모임을 소개하면서 교황 성하께서는 그 주제를 이렇게 강조하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젊은이들에게 보낸 아름다운 메시지가 떠오릅니다. …… 이는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성령께 마음을 열어 교회의 모습을 젊게 하고자 새로운 길을 찾고, 용기와 신뢰로 그 여정을 함께 나아가라는 초대입니다.” 이처럼 ‘시대 변화’ 안에서 우리는 젊은이들의 성소 식별 여정에 동행하는 것이다. 식별 방법 2. 우리는 식별을 통해 삶의 길과 방식과 근본 태도 그리고 활동 방법도 인식한다. 이는 함께 걸어가는 길이며, 그 길을 통해 우리는 제자의 눈으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문화의 역동성을 바라본다. 식별을 통해 우리는 인식에 이르고 참다운 영적 순종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럼으로써 새로움에 마음을 열고 밖으로 나갈 용기를 얻으며, 새로운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진부한 것으로 환원하려는 유혹에 저항하게 된다. 식별은 참으로 영적인 태도이다. 식별은 성령께 순종하는 것이기에 경청이며, 무엇보다도 우리 행동의 원동력이 되고 언제나 교회에 맡겨진 유일하고 단일한 사명에 새롭게 충실할 수 있는 역량이 된다. 따라서 식별은 하나의 사목 도구가 되어, 오늘날 젊은이들이 따를 수 있는 훌륭한 삶의 길을 구별하고 그 사명을 위해 기존의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르도록 해 주는 우리 여정의 결실인 지침과 제안을 제공할 수 있다. 이렇게 조성되는 길은 우리 마음이 닫혀 있지 않고 열리게 해 주며, 정해진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제기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또한 대안을 바라보고 기회를 찾으라고 우리를 초대한다. 이러한 전망에서 분명한 것은, 식별 과정을 위한 올바른 자세를 지니고 오는 10월에 있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정기 총회를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 구성 3. 의안집은 준비 모임 과정에서 취합된 도움들을 하나의 문서로 모으고 종합하였으며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각 부분은 「복음의 기쁨」 51항에서 설명하는 식별 과정, 곧 인식하기, 해석하기, 선택하기의 구조를 명확히 반영한다. 인식하기. 첫 번째 단계는 보고 듣는 것이다. 이는 다양한 환경과 맥락에서 살아가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실제 상황에 대한 관심을 요구한다. 또한 겸손과 친밀함과 공감을 요구한다. 젊은이들과 일치를 이루고 그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파악하기 위함이다(사목 헌장 1항 참조).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젊은이들이 참여하는 교회 공동체의 체험에 배려와 관심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한다. 이 첫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구체적 현실을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사회 과학이 중대한 기여를 한다는 점은 활용한 원천들에서 잘 드러나지만, 반드시 신앙과 교회 체험에 비추어 이를 살펴보고 재해석해야 할 것이다. 해석하기. 두 번째 단계는 신앙의 관점에서 비롯된 해석과 평가 기준을 이용하여 우리가 인식한 것을 검토하도록 이끈다. 그 준거의 틀은 젊은이, 성소, 성소 식별, 영적 동반과 같은 시노드 핵심 단어들에서 표현된 성서적 인간학적 신학적 범주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렇기에 신학적 교회적 교육적 사목적 견지에서 적절한 준거 틀을 확립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이러한 준거 틀은 우리가 “교회 안에는 교리와 그리스도교 생활의 수많은 측면들을 해석하는 서로 다른 길들이 정당하게 공존한다는 사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43항)을 인식하면서도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열려 있는 영적 역동성을 지녀야 하는 이유이다. 선택하기. 성소의 빛으로 바라보아야만 성령께서 우리에게 나아가라고 부르시는 구체적인 단계가 무엇인지, 그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어떤 방향을 따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식별의 이 세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사목적 접근법과 실천들을 검토하고, 우리의 목표 달성을 더욱 가능하게 해 주는 선택을 하도록 내적 자유를 북돋워야 한다. 또한 덜 효율적인 것들은 폐기해야 한다. 이는 기능적 평가와 비판적 분석으로, 다른 때나 상황에는 걸맞은 접근법일 수 있는 가치나 의미에 관한 판단은 아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고착화의 위험이 있는 교회 관행과 사목 관행에서 변화와 개혁이 필요한 부분을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제1부 인식하기: 현실에 귀 기울이는 교회 4. “실재는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복음의 기쁨」, 231-233항 참조). 제1부에서 우리는 실생활 안의 젊은이들 삶과 그들을 향한 교회의 행동을 눈여겨보고 귀담아듣도록 초대받는다. 이는 자료를 취합하고 사회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상황에서 생겨나는 도전과 기회에 신앙의 빛으로 대응하고 우리 마음 깊이 받아들여, 뒤따르는 모든 여정을 위한 구체적 기초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찬미받으소서」, 15항 참조). 지면의 한계로, 광범위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간략히 논의하게 될 것이다. 시노드 교부들은 이러한 문제들 안에서 성령의 부르심을 깨달아야 한다. 제1장 오늘날 젊다는 것 5.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젊은이들과의 공식적인 첫 만남에서 불어넣어 주신 그 활력을 우리는 한껏 누리고 있다. “이 첫 번째 여정은 젊은이들과의 만남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과 분리된 만남이 아니라 오히려 저는 사회 안에서, 그들의 사회적 맥락 안에서 그들을 만나려 합니다. 젊은이들을 고립시킬 때 우리는 그들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고 그들의 ‘소속’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소속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가족, 조국, 문화, 신앙에 소속되어야 합니다”(프란치스코, 제28차 세계 청년 대회를 맞아 리우데자네이루 사도 방문, “브라질행 기내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언론인의 만남”, 2013.7.11.). 다면적이고 다양한 상황 6. 비록 총인구에서 젊은이 비율이 점진적으로 감소하리라고 예견되지만, 16세에서 29세 사이의 인구는 전 세계적으로 약 18억 명으로 인류의 사분의 일 정도를 차지한다. 주교회의들의 응답에서 강조되었듯이 젊은이들의 구체적인 상황은 나라마다 큰 차이가 있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젊은이가 인구의 상당수(30퍼센트 이상)를 차지하는 반면, 다른 나라들에서는 훨씬 적은 비율(15퍼센트 내외 또는 그 이하)을 차지한다. 평균 기대 수명이 60세에 이르지 못하는 나라가 있는 반면 80세를 초과하는 나라도 있다. 교육, 보건, 환경 자원, 문화, 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 또는 시민, 사회, 정치 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실제로 지역에 따라 다르다. 같은 나라에서조차 때로는 도시와 농촌 사이의 상당한 격차를 발견하게 된다. 7. 준비 모임의 논의 과정은 젊은 세대가 지닌 잠재력과 그들 안에 자리한 희망과 바람을 강조하였다. 젊은이들은 의미를 찾는 주체들로, 자신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려 하는 탐구에 부합하는 모든 것에서 행동을 위한 동기와 흥미를 얻는다. 아울러 세계 각지에서 정도는 서로 다르지만, 젊은이들의 온전하고 조화로운 발전을 가로막고 약화시키며 자존감을 잃도록 몰아가는 어떤 사회적 정치적 동력이 존재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 두려움 또한 생겨난다. 폭력이 만연하는 풍조를 일으키고 일부 젊은이들을 조직범죄와 마약 밀매로 끌고 가는 엄청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 제도에 대한 신뢰를 좀먹고 체념과 방관을 정당화하는 부정부패가 판치는 정치 체계, 더 나은 미래를 찾아 이민을 떠나게 내모는 전쟁과 극빈 상황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일부 지역의 젊은이들은 국가가 종교 자유를 포함하여 근본적 자유와 개인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한편 다른 지역에서는 사회적 배척과 무대 공포증이 일부 젊은이들을 중독의 고리(특히 약물과 음주)와 사회적 고립으로 몰아간다. 수많은 장소에서 가난, 실업, 소외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물질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살아간다. 세계화 앞에서 8. 지역적 차이는 있지만 세계화 과정이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명백하다. 이에 젊은이들은 다양한 수준에서(지역적 국가적 국제적으로 또 교회 안팎으로) 사회적 문화적 참여를 실천해야 한다. 몇몇 주교회의의 보고에 따르면, 아마도 소셜 미디어를 통하여 서양 사회의 체험을 공유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일반적으로 자유와 자율과 표현에 대한 욕구가 자라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주교회의들은 젊은이들의 깊은 갈망과 무관하게 결국 개인주의, 소비주의, 물질주의, 향락주의에 자극받은 문화가 만연하고 외모지상주의가 팽배할 것을 두려워한다. 9. 여러 비(非)서구 지역의 주교회의들은 적절한 수단의 부재를 절감하면서, 연대와 공동체의 일치와 영성의 보고(寶庫)인 전통 문화를 잠식해 들어가는 이 문화적 변화에 맞대응할 수 있도록 젊은이들을 동반해 줄 방법이 있는지 묻고 있다. 더욱이, 사회적 문화적 변화 과정이 가속화되면서 교회 안에서도 세대 차이가 더욱 커지고 있다. 몇몇 주교회의들의 응답을 보면,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상황과 문화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도 드러난다. 일부 주교회의들은 젊은이들이 가져온 차이를 풍성한 새로움이라기보다 개탄할 만한 도덕적 타락의 표징이라고 여긴다. 10. 이러한 맥락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거듭 밝히셨던 관점은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준거점이 된다. “다면화된 세계화가 있다. 일치를 이루지만, 모든 사람, 모든 인종, 모든 나라, 모든 문화가 언제나 고유한 정체성을 보존한다. 그것이 세계화가 추구해야 할 다양성 안의 일치이다”(프란치스코, 로마 제3대학교 젊은이들과의 만남에서 한 연설, 2017.2.17., gina.uniroma3.it/download/1491300733.pdf). 이는 상호 연결된 세상에서 다양성을 보물로, 다원주의를 기회로 여기는 젊은이들의 말에 이렇게 반영되어 있다. “다문화주의는 대화와 관용의 환경을 증진할 잠재력을 지닌다. 세계화된 세상 안에서 우리는 사고의 다양성, 다른 이들의 생각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데에 높은 가치를 둔다. …… 우리의 다양성을 두려워 말고 우리의 차이와 우리 각자를 독특하게 만들어 주는 모든 것에 기뻐해야 한다”(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준비 모임 최종 문서[이후 준비 모임], 2항). 여전히 젊은이들은 “(그들) 문화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획일화와 쓰고 버리는 문화를 막으려고”(준비 모임 2항) 노력한다. 가정의 역할 11. 이러한 변화의 맥락에서도 여전히 가정은 개인의 전인적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준거점이다. 논의에 참여한 모든 이가 이에 동의하였다. 그러므로 이번 세계주교대의원회의와 그 직전에 개최된 세계주교대의원회의들 사이의 깊은 연관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정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중대한 차이들이 있다. 젊은이들은 일부 주교회의가 이야기한 것과 비슷하게 말한다. “세계 여러 곳에서 연장자의 역할과 조상 공경은 젊은이들의 정체성 형성에 도움을 주는 요소다. 그러나 이는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사실은 아니다. 또 다른 지역들에서는 전통 가정 모델이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다”(준비 모임 1항). 또한 젊은이들은 가정이 겪는 어려움과 불화와 그 취약성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고통을 야기하는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12. ‘주교대의원회의 사무처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설문’(이후 온라인 설문)에 대한 답변은 젊은이들에게 어머니가 얼마나 우선적인 준거가 되는 인물인지 보여 준다. 한편 아버지상에 관한 성찰이 필요하다. 특정 맥락, 특히 서양 국가들에서 아버지의 부재 또는 소실은 영적 부성의 실천에도 영향을 주는 [아버지상의] 불확실성과 결여를 자아낸다. 몇몇 주교회의는 미래의 사회 진보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신앙과 가치를 전수하는 데에 조부모가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을 지적한다. 한부모 가정의 증가도 거론된다. 13. 젊은이들과 그들 가족이 이루고 있는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어떤 젊은이들은 그들이 ‘과거에 갇혀 있다.’ 또는 ‘구식이다.’라고 여기는 것보다 더 독창적이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가족 전통에서 멀어져 간다. 반면에 세계 일부 지역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가족 전통 안에 여전히 뿌리내리고 자신이 길러진 방식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추구한다”(준비 모임 1항). 이러한 상황들은 청년 문화와 가족 윤리의 상관관계를 더욱 깊이 통찰해 볼 것을 요구한다. 여러 출처들에서 그 간극이 점점 커지고 있음이 보고된다. 그러나 참다운 삶과 관계 유지에 관심을 기울이며 교회의 지침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는 젊은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주장도 있다. 결혼과 가정은 여전히 많은 젊은이들에게 성취하고자 하는 희망이자 계획으로 남아 있다. 세대 간 관계 14. 여러 사회 분석들뿐 아니라 많은 주교회의들 그리고 ‘세계 젊은이들의 상황에 관한 국제 세미나’(이후 국제 세미나)를 통해 확인된 우리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일종의 세대 간 관계 역전이다. 오늘날 자기중심의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지구촌 문화 안에서 어른들은 흔히 그들 생활양식의 롤 모델로 젊은이들을 꼽는다. 한 교황청 부서의 확언대로, “문제의 요점은 어른의 삶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는 서구 문화계의 진정한 특징으로, 비단 신앙 안의 어른만 부족한 것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어른 자체가 부족하다.” 오늘날 젊은이와 어른 사이에 세대 갈등은 많지 않은 대신에 ‘상호 소외’가 일어난다고 여러 주교회의들이 말한다. 어른은 우리 존재의 형성 가치들을 젊은 세대에게 전달하는 데에 관심이 없고, 젊은 세대는 어른 세대를 잠재적 동맹이 아닌 경쟁자로 여긴다. 이런 식으로 젊은이와 어른의 관계는 교육적 문화적 차원이 포함되지 않은 온전히 감정적인 차원만 남을 위험이 있다. 교회는 젊은이들을 시노드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세대 간 대화의 중요한 징표라고 보았다. “우리는 교계가 우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에 감동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젊은 교회와 오래 전에 설립된 교회 간의 이 대화가 활기차고 열매 맺는 경청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준비 모임 15항). 15. 세대 간 관계와 함께 또래 관계도 잊어서는 안 된다. 또래 관계는 다른 이들과 나누는 상호작용을 근본적으로 체험하는 것이고 가족 환경에서 점진적으로 독립하는 것이다. 일부 주교회의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특징인 환대, 우정, 상호 부조의 근본 가치를 강조한다. 어느 정도 조직화된 단체에서 경험한 또래 관계는 젊은이들이 평가와 판단의 잣대에서 자유로운 상황에서 사회적 관계적 역량을 강화할 계기를 제공한다. 삶의 선택들 16. 젊음은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과정을 결정짓는 선택을 하는 특별한 시기로 여겨진다. 준비 모임에 참가한 젊은이들은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우리의 정체성 발전의 결정적 시기에는 학업 과정 결정, 직업 선택, 종교 선택, 성 정체성 발견, 삶을 바꾸는 헌신 등이 포함된다”(준비 모임 1항).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이유 때문에 출신 가정에서 독립하는 시기 또는 근본적인 선택을 내리는 시기가 크게 달라진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18세에 이르기 전에도 결혼하거나 부모가 되거나 수도 생활을 선택한다. 반면에 다른 곳에서는 청년기가 실질적으로 끝난 때인 30세 이후에 그렇게 한다. 여러 상황들에서, 성인기로의 전환이 오래 걸리고 복잡해졌으며 연속선상에 있는 과정이 아니게 되었다. 발전되기도 지체되기도 하며, 일반적으로 구직 활동이 애정 문제보다 우선한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더더욱 최종 선택을 내리기 힘들어지고, 어느 아프리카 주교회의의 지적대로, “개인 맞춤형 지원을 제공할 공식적인 틀을 만들 필요가 강조된다.” 17.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발생시키며 꾸준히 변화하는 사회 상황에서 비롯된 기회와 제약들 사이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삶의 단계에서는 젊음의 전형적인 가능성과 심리적 어려움이 모두 나타난다(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예비 문서[이후 예비 문서], 제1장 3항; 제3장 1항 참조). 필요하다면 적절한 도움을 받아 이러한 가능성과 어려움을 성장 과정 안에서 모두 인식하고 대응하며 해결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젊은이들이 직면하는 어려움으로 경직, 충동적 행동, 끈기 부족, 냉담과 공감 부족, 정서적 통찰 감소, 관계를 맺는 데에서 무능함이나 과도한 두려움 등을 언급한다. 또한 더욱 일반적으로는, 정서적 의존, 열등감, 위험 상황에서 용기와 힘의 부족, 자기중심적인 성적 만족 추구, 공격성, 과시욕, 언제나 주목받으려는 욕구처럼 정화와 해방이 필요하다고 신호를 보내는 태도가 나타난다. 그와 반대로, 소중히 여기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귀중한 자원들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 죄책감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 친지들과의 교류, 기꺼이 다른 이들을 도와 함께 일하려는 마음,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우리의 필요와 책임에 대한 식별력, 혼자 있을 때라도 선택한 바를 굳게 지키기, 어려움과 실패를 견디고 맞서 싸우기, 맡은 소임을 다하려는 책임감 등이 있다. 18. 그렇기에 젊음은 우리가 10대 때에 내딛는 자율을 향한 첫 걸음이 어른의 책임감으로 전환되는 단계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 관계와 의무에 직접 투신한다는 관점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질적 도약을 이루는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 내면생활을 잘 일궈 나갈 역량과 고독에 대응하는 능력에서도 질적 도약을 이루는 시기이다. 물론 이는 질풍노도를 경험하고 희망과 두려움이 교차하며 긍정적 부정적 측면간의 불가피한 긴장 관계에 놓이는 시험적 시기이기도 하다. 그 시기를 통해 우리는 정서적, 성적, 지성적, 영성적, 신체적, 관계적, 사회적 측면들을 표현하고 통합하는 법을 배운다. 이러한 여정은 우리가 날마다 하는 작은 선택들과 좀 더 중대한 결정들을 통해 펼쳐지는 것으로, 각자 저마다의 유일무이함과 우리 성소의 독창성을 발견하게 해 준다. 학교와 대학교 교육 19. 교육과 훈련 기관은 단지 젊은이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기관은 사회가 젊은이들의 지성과 인성 육성과 직업 지도를 위해 노력하는 삶의 자리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들이 있다. 이는 주로 학교와 대학교 체계가 양성이 아닌 정보만을 제공하는 데에 그쳐, 비판적 사고의 증진과 직업 측면을 포함하여 학습의 의미를 심화하도록 북돋우지 않는다는 사실과 관련한 문제들이다. 많은 나라들에서 학교 체계와 관련하여 불공평한 접근성, 도시와 시골 지역 간 훈련 기회의 차등과 경악할 만한 학업 중퇴율 등이 드러난다. 이 모두가 젊은이와 사회의 미래를 위협하는 것이다. 일부 나라들에서는, 학업도 취업도 하지 않고 있는 이들(이른바 ‘니트족’[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상황도 마찬가지로 걱정스럽고 사목적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20. 교회의 교육 기관들이 어떤 나라에서는 국가 자격 표준을 따라잡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반면, 적합한 교육 체계를 갖추지 못한 많은 나라들에서 이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민감한 직업 훈련 영역에서 가톨릭 학교 기관은 많은 나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곧, 가톨릭 학교 기관은 기술 기능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어떤 능력을 얼마만큼 가졌든 자기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법을 찾도록 돕고 있다. 극심한 가난과 박탈감이 큰 환경에서 원거리 학습이나 비공식 교육 계획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통해 학교 교육에 대한 접근성의 간극을 메울 기회를 제공받기 때문이다. 21. 비단 학교 교육뿐만이 아니다. 준비 모임에서 말했듯, “젊은이의 정체성은 외부와 상호작용으로도 또 교회 밖에서도 활성화된 특정 단체, 연합회, 운동에 대한 소속감으로도 형성된다. 때로 본당은 더 이상 관계를 이어주는 장소가 아니다”(준비 모임 1항). 긍정적인 역할 모델을 찾으려는 바람은 여전히 강렬하다. “또한 우리는 교육자들의 역할과,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청년 단체의 지도자와 같은 친구의 역할을 인정한다. 우리에게는 매력적이고 일관되며 진정한 모델이 필요하다”(준비 모임 1항). 일과 직업 22. [교육에서] 일과 직업 생활로의 이동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일부 지역에서는 학교, 대학교 과목과 노동 시장의 요구 사이의 차이 때문에 더욱 어려운 문제가 된다. 온라인 설문에 응답한 젊은이들은 안정적인 직장을 갖는 것이 기본이라고(82.7%) 진술하였다. 경제적 관계적 안정성과 개인 성취의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89.7%). 일은 가정을 이루고(80.4%) 자녀를 가지는 일처럼 각자 고유한 생활 계획을 실현하는 데에 충분조건은 아닐지언정 필요한 수단이다. 23. 청년 실업률이 특히 높은 곳에서 일과 직업에 기울이는 관심이 더욱 크다. 더 가난한 환경에서는 일자리가 사회 구제의 가치를 지니며, 반면 실직은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나게 만드는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된다. 특히 아시아의 젊은이들은 성공, 사회적 명성, 직업윤리의 문화에 부응해야 하며, 그 문화가 부모의 기대에 투영되고 학교 교육을 규정하며 고도의 경쟁 풍토, 편향된 선택, 매우 강도 높고 스트레스 가득한 업무의 부담을 낳는다. 준비 모임에서 확인되었듯, 젊은이들은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것을 재확인해야”(준비 모임 3항) 할 필요성을 여전히 믿는다. 또한 그들은 두려움을 자아내는 극도로 척박한 경제 상황에서 희망과 꿈을 간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지적한다(준비 모임 3항 참조). 몇몇 주교회의들은 성소와 직업 간의 관계뿐 아니라 직업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성소 의식의 수준’을 더욱 철저히 연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젊은이, 신앙과 종교 24. 다양성과 차이는 젊은이들이 자라나는 종교적 맥락에도 적용된다. 어떤 나라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다수를 차지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도 하지만 차별이나 순교에 이르는 박해의 고통을 겪기도 한다. 일부 환경에서 그리스도교는 그 신뢰성을 저하시켰던 정치적인 선택처럼 과거 자신의 선택이 만든 결과와 맞서야만 한다. 가톨릭 신자들이 다른 종교 전통이나 전통 문화의 문화적, 영적 풍요로움과 상호작용하는 환경도 있다. 또한 어떤 환경은 세속화되어 종교를 순전히 사적인 사안으로만 여기고 또 어떤 환경에서는 신흥 종교나 유사 영성(뉴에이지 등)의 영향력이 극적으로 커져 나간다. 그리스도교와 종교들은 어떤 지역에서는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여전히 사회생활을 지탱하는 근간을 이룬다. 어떤 나라에서 가톨릭 공동체는 단일 공동체가 아니며 인종적 문화적 소수(토착 공동체)뿐 아니라 종교적 소수(다양한 예법)로 이해된다. 또 다른 나라에서 가톨릭 공동체는 이민해 온 신자들에게 문을 열 것을 요청받는다. 25. 사회학 연구로 젊은이들의 신앙과 종파 소속에 관련해서도 꽤 다양한 상황이 드러난다. 국제 세미나가 강조했듯, “일부 젊은이들의 신앙에 대한 무관심과 냉담은 (그리고 교회의 매력 부족은) 주요 종교 제도들이 우리 현대인의 의식에 부합하기 어렵다는 데서 기인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개인 생활과 공동체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불확실성에 맞서 새롭고도 간절하게 의미를 찾도록 요구하는 사회적 맥락이 있다. 더욱이, 오늘날 젊은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다양성에는 수많은 종교적 영적 활력의 징표들이 있다. 이러한 활력은 주요 교회들 안과 밖 모두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신자들과 비신자들, ‘타종교 신자들’의 이러한 공존은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기보다 -특정 조건 아래에서- 서로 인정하는 상황에 유익해 보인다. 이러한 상호 인정은 한편으로는 오만하거나 자만하지 않는 더욱 인간적 면모를 갖춘 무신론이나 불가지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광신적이기보다 대화에 열린 종교적 믿음, 이 둘이 공존할 때 특히 가능하다.” 제2장 체험과 언어 26. 준비 모임에서 효과적으로 강조했듯이, 젊은 세대는 현실에 대한 특별한 접근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자산이자 독창성의 원천이지만 어른들에게 혼란과 당혹스러움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급한 판단을 피해야 한다. 젊은이들의 접근법은 이론적 분석보다는 구체성과 행동이 우선한다는 데에 바탕을 둔다. 이는 지적 차원에 대한 등한시나 맹목적 행동주의는 아니다. 이는 젊은이들의 자발적인 행동 방식으로, 그들은 일을 실천하면서 이해하고 문제가 제기되는 그 순간에 그 문제를 풀고 있다.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은 비록 급진적인 형태일지라도 서로의 차이에서 오는 다원성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정체성 인정을 상대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활양식의 존재와 이를 포용하려는 노력에 대한 기본적 인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동 노력의 결실에서 그것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모든 이가 느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사회 참여와 투신 27. 사회의 모순에 직면하여 많은 주교회의가 자원봉사 활동을 통해서도 보이는 젊은이들의 감수성과 참여에 주목한다. 자원봉사 활동은 책임을 맡으려는 젊은이들의 자발성과 그들이 지닌 재능과 기술과 창의력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바람을 보여주는 단초이다. 그들 마음에 더욱 와 닿는 문제들 가운데 사회와 환경의 지속가능성, 차별과 인종주의 문제가 두드러진다. 젊은이들의 참여는 흔히 결집력과 정치적 힘을 행사하고자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잠재력을 활용하는 전례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연대에 기초하고 환경을 염려하는 비판적인 생활양식과 소비와 투자 모델의 전파, 사회와 정치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투신과 참여, 새로운 방식의 복지와 취약한 개인에 대한 보호 등이 이루어진다. 대륙별로 취합된 몇 가지 최신 사례에서 보듯 젊은이들은 결집할 수 있다. 이들은 특히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안들을 지지하고자 할 때에, 또 자신이 단순히 다른 무리들에 끌려가는 입장이 아니라 참으로 핵심적 역할을 할 수 있을 때에 결집한다. 28. 젊은이들은 정의의 증진과 관련하여 교회의 이미지가 어떻게 ‘양분되어’ 보이는지 강조한다. 교회는 한편으로, 교회가 역사의 고비마다 가장 작은이들과 함께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갖는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심각하고 만연한 부패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여전히 많은데, 복음으로 감도되는 대안을 세상에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순응하게 될 위험을 지녔다. 영성과 신심 29. 다양성이야말로 젊은이들이 신앙과 종교적 실천과 맺는 관계를 가장 잘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준비 모임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일반적으로 젊은이들은 비록 일상생활에서 거룩함과 꽤 유리되어 있음에도 자신들이 영성에 열려 있다고 주장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종교는 사적인 문제라고 믿으며 자신이 영성적이기는 하되 (종파에 소속된다는 의미의) 종교인은 아니라고 여긴다(준비 모임 7항 참조). 종교는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는 우선적 길로 여겨지지 않는다. 종교는 흔히 이데올로기와 다른 사조들과 동등하거나 때로는 대체 가능하고, 심지어 개인적 직업적 성공으로도 대체된다(준비 모임 5항 참조). 30. 이와 같은 다양성은 젊은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이루는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많은 젊은이들이 예수님을 구세주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여기고, 흔히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통해 그분께 다가간다고 느낀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지는 않지만 그분을 훌륭한 인간이며 윤리적 준거점으로 여긴다. 또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은 실존적 관련성이 없는 과거의 인물 또는 (그들이 교회에 느끼는 거리감만큼) 인간의 경험에서 동떨어져 있는 인물이다. 예수님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가 젊은이들의 눈에 그분이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게 만든다. 젊은이들은 그리스도인의 완덕이 인간 능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저 너머에 있다는 생각에 이끌려 그리스도교를 달성 불가능한 기준으로 보게 된다(준비 모임 6항 참조). 여러 맥락을 보면, 젊은 가톨릭 신자들은 자신의 일상생활에 강렬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기도와 성사의 기회를 찾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기대가 지닌 세대적 특수성에 사목자들이 언제나 부응하고 있지는 못한다는 점도 깨달아야 한다. 교회 생활 안의 젊은이 31.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자신을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라고 느끼며, 활발한 교회 참여를 통해 이를 강력히 표현한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등의 지역과 여러 국제 운동 안에서 교회가 자신들과 매우 가까이 있음을 체험하며, 심지어 복음에 따라 살아가지 않을지언정 자신들이 교회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준비 모임 7항) 젊은이들이 있다. 몇몇 주교회의는 젊은이들이 교회에 꼭 필요한 부분이 되고 있다고 -또 그렇게 여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젊은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사목의 근본적 차원이라고 강조한다. 청년 단체들, 운동이나 연합회에 소속된 청년 단체들조차 정작 교회 공동체의 삶에는 온전히 참여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드물지 않게 본다. 일부 주교회의들에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목표는 이러한 분리의 역학을 극복하는 것이다. 32. 많은 젊은이들이 주변인이 될 위험을 언급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핵심 일꾼이 되기도 하는 여러 교회 활동들이 존재한다. 젊은 세대의 특징인 여러 형태의 자원봉사 활동이 두드러진다. 어린이 사목과 마찬가지로 교리교육과 전례의 활성화도 또 다른 활동 영역으로, 이는 분명 오라토리움회나 다른 비슷한 사목 조직에서 특히 결실을 맺는다. 운동, 연합회, 수도회도 젊은이들에게 참여와 공동 책임의 기회를 제공한다. 여러 상황들에서, 자신을 표현할 중요한 통로를 신체와 정서 활동, 음악과 노래 안에서 찾는 젊은이들을 위한 신앙 접근법으로 대중 신심은 여전히 중요하다. 또 다른 전국, 국제, 대륙 차원의 모임과 함께 세계 청년 대회는 많은 젊은이들의 삶에서 탁월한 역할을 한다. 한 주교회의가 말하듯, 세계 청년 대회는 “젊은이들이 삶의 주요 도전들에 맞서고, 사회와 교회 공동체에서 책임감 있게 자기 자리를 찾도록 도와주는 신앙과 친교의 생생한 체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33. 젊은이들은 팀워크를 두드러지게 좋아하고 잘 한다. 이는 많은 상황에서 자산이 된다. 때로 이러한 열린 자세가 어른과 직무 봉사자들의 지나친 권위주의와 충돌한다. “많은 경우 젊은이들은 교회 안에서 제자리를 찾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이들은 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교회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교회 경험을 통해, 교회가 자신들을 아무 실수가 없어도 지도력을 발휘하거나 결정을 내리기에 너무 어리고 경험이 적다고 여긴다고 해석한다”(준비 모임 7항). 마찬가지로 분명한 사실은, 젊은이들이 참여하고 인정받는 곳 어디서나 교회의 방식과 역동성은 강력한 생명력을 얻어 사람들의 관심을 주목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 대륙의 편재성(遍在性) 34. 젊은이 세계에 대한 디지털과 소셜 미디어의 침투성이 증명된다. 준비 모임에 참석한 젊은이들은 이렇게 피력했다. “젊은이들의 삶에서 소셜 미디어의 영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소셜 미디어는 젊은이들의 정체성과 생활 방식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디지털 환경은 유례없이 지리적 거리를 넘어 사람들을 일치시킬 수 있는 커다란 잠재력을 지닌다. 이제 정보, 사상, 가치, 공동 관심의 교환이 더욱더 가능해졌다. 온라인 학습 도구에 대한 접근이 먼 곳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교육 기회를 활짝 열고, 온 세상의 지식을 저마다의 손끝에 가져다주었다”(준비 모임 4항). 35. 웹은 고독, 조종, 착취, 폭력의 장소가 될 수도 있다. ‘다크 웹(dark web)’과 같은 극단적 사례까지 있다. 젊은이들은 그 위험성을 알고 있다. “특정한 악행들의 발전을 도울 때 기술의 이중성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위험은 고립, 나태, 황폐, 권태 등을 통해 증명된다. 온 세상 젊은이들이 강박적으로 미디어 제품을 소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초연결 세계에서 살고 있음에도 젊은이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여전히 동류의 사람들과만 한정적으로 이루어진다. …… 소셜 미디어의 출현과 함께, 이는 뉴 미디어 회사들이 젊은이들의 삶에 권력을 행사하는 정도를 넘어서는 새로운 도전을 불러왔다”(준비 모임 4항). 이러한 상황은 다양성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능력의 개발을 가로막기에, 그러한 능력을 개발하는 일은 젊은이들을 위한 실제적 교육 과제가 된다. 주교회의들은 비판적 평가에 더욱 역점을 두면서도, 이러한 이중성에 동의한다. 무지나 부적절한 교육 때문에도 사목자들과 보통 어른들은 이러한 새로운 언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때로는 악마가 되게 하는 ‘보이지 않고 어디에나 있는 원수’ 앞에 서 있다고 느끼며 두려워하곤 한다. 음악과 다른 형태의 예술적 표현들 36. 매우 많은 주교회의들이 음악은 젊은이들의 기본 언어라고 말한다. 음악은 그 안에 끊임없이 빠져드는 젊은이들 삶의 배경음악으로서, 일반적으로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함에도 교회의 탐구가 미치지 못하는 방식으로 젊은이들의 정체성 형성에 도움을 준다. 음악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신체적으로도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낸다. 음악은 내면세계를 열게 하여 의사소통을 돕는다. 또한 음악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 외에도 다른 형태의 교육으로 증진된 생활양식과 가치들에 맞갖은, 또는 그것을 대체하는 생활양식과 가치들을 전달한다. 일부 청년 문화 안에서 음악의 세계는 어른들이 접근할 수 없는 일종의 피난처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음악의 힘 때문에 음악계는 사업적, 심지어 투기적 이해관계에도 쉽게 영향받고 조종될 수 있다. 37. 음악과 음악의 공유는 사회화 과정의 도화선이 된다. 콘서트는 수천 명의 젊은이들을 한데 모은다. 왠지 모르게 개인적 차이들은 뒷전에 미뤄 놓고 함께 모여야 할 필요를 느낀다. 주요 음악 행사는 사람들이 자신을 벗어 던지고 낯선 이들과 융화됨을 느끼는 볼거리와 들을거리, 무용, 동작, 친밀감과 신체 접촉 등 총체적 체험이다. 때로는 이러한 행사들이 수동적 경청의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때로는 약물의 사용으로 증폭된 음악의 영향이 비인격화의 결과로 이어진다. 음악 연주는 개인적 사회적 가치를 모두 지닌다. 많은 젊은 작곡가들과 음악인들이 자기 세대의 삶의 경험을 해석해야 할 책임을 느끼고 사회적 연관성이 있는 주제들, 곧 성 관련 주제부터 대인관계, 전통 문화의 고양 등에 관한 메시지를 또래들에게 전달하고자 힘쓴다. 38. 음악보다 덜 광범위하지만 많은 다른 형태의 예술적 표현, 곧 회화, 조각, 영화 제작, 시각 미술, 무용, 연극, 사진, 만화, 그래픽 디자인, 웹 아트, 글, 시, 문학 작품 등의 향유는 젊은이들의 개인적 사회적 정체성 형성에 근본적 역할을 한다. 젊은이들은 그러한 예술적 표현들이 활발히 실천될 때에, 특히 더욱더 많은 신기술을 사용하는 실험적 기획을 통해, 개인 창의성을 훈련하고 문화 표현에 참여할 수 있다. 민족과 지역 전통과 결합된, 특히 소수 인종과 관련된 예술적 표현의 형태들은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표현들이 젊은이들을 교육 수준이나 과학 기술 수단의 사용 능력과 무관하게 과거의 유산과 연결시켜 주고 문화 활동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스포츠의 세계 39. 스포츠는 젊은이들의 성장과 대화에서 또 다른 중요한 영역이다. 교회는 세계 각지에서 스포츠를 통한 노력을 기울인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스포츠를 비공식적 교육의 일환으로 여기고, 공식 교육의 지적 빈곤을 메우고자 스포츠 분야에서 더욱 활발히 활동할 것을 요청하신다(가톨릭교육성이 주관한 국제 대회 “교육의 현재와 미래: 쇄신의 열정” 참가자들과 나눈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대담, 2015.11.21.).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가 ‘스포츠화’ 되어 왔다고 믿고 이를 특히 젊은이 세계에 적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그럴듯한 말을 넘어서, 우리 사회에서 스포츠 활동을 통해 어떠한 가치와 모델이 증진되는지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너무도 흔히 스포츠 활동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심지어 속임수를 써서라도 이루는 성공에 연연하며, 패배한 선수들의 노고와 헌신을 잊어버리곤 한다. 40. 대형 콘서트와 마찬가지로, 대중 스포츠 행사들은 지극히 의전적인 특성을 지니고 우리의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스포츠계에도 기업과 투기적 조작이 있고 인간의 존엄에 반하며 (금지 약물 복용처럼 젊은 아마추어 선수들 사이에 만연한 모든 행위와 부정부패 등) 페어플레이와 같은 가치에 역행하는 관행에도 물들어 있다. 스포츠와 하등 상관이 없는 불만과 사회 긴장으로 부추겨진 폭력의 형태들이 전혀 낯설지 않다. 한편, 패럴림픽 운동과 같은 예에서 볼 수 있듯, 스포츠는 여러 형태의 배척과 소외로 고통받는 이들을 통합하는 매우 강력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제3장 쓰고 버리는 문화 안에서 41.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끊임없이 질책하시듯이, 쓰고 버리는 문화는 현대 사고방식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젊은이들이 얼마나 빈번히 그 희생자가 되는지를 주교회의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경고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젊은이들 또한 이러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무책임한 소비를 선택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쓰고 버려지게’ 만들거나 환경을 훼손하는 그러한 행동에 빠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이러한 행동과 사고를 돕고 부추기고 있으며 결국 무관심과 배척을 조장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42. 교회는 이번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통해서도 근본적 인식 활동을 함으로써 불의와 착취의 젊은 희생자들에게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부름받는다. 젊은이들이 자기표현을 하는, 특히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들을 마련하는 것은 젊은이들이 모든 부정적 주장에 맞서서 개인의 존엄을 되찾게 하는 길이다. 그리하여 너무도 자주 역사에서 잊힌 이들에게 이름과 얼굴을 찾아 준다. 이는 ‘버려진’ 젊은이들이 지닌 잠재력을 표현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젊은이들은 그들 스스로 발전의 주체가 되고, 그들의 시각은 지속적 성장과 희망의 역동성 안에서 공동선을 이룩하는 데에 생생한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구체적 체험에서 시작되며 바로 그럼으로써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시편 118[117],22; 루카 20,17; 사도 4,11 1베드 2,4 참조). 직업 문제 43. 주교회의들이 강조하였듯, 여러 나라에서 청년 실업은 과장이 아니라 비극적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결과는 경제적 문제가 아니다. 흔히 가정, 복지 체계, 자선 단체들이 뛰어들어 실업자들의 물질적 필요에 부응하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실직 젊은이들이 박제된 이상향에 취해 있거나 그것조차 잃을 지경에 내몰리는” 것이다(프란치스코, 교황청 라틴아메리카 위원회 위원들에게 한 연설, 2014.2.28.). 준비 모임에 참가한 젊은이들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이러한 시각이 반영된다. “때때로 우리는 결국 우리 꿈을 버리게 된다. 우리는 특히 젊은이들의 희망감을 무참히 앗아가는 수많은 사회-경제적 압력 때문에 너무나도 두려움에 빠져 있고, 그중 일부는 꿈꾸기를 그만둔다. 가끔은 꿈꾸기를 계속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다”(준비 모임 3항). 44. 젊은이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존엄이 부인되는 직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에서 야기되는 비슷한 결과가 있다. 때로는 착취와 동일한 비공인 불법 노동, 인신매매, 갖가지 형태의 강제 노동과 노예 노동의 사례가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전 세계의 또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준비 모임에 참석한 젊은이들은 고용과 노동자의 적이 될 지도 모르는 기술 진보에 관하여 관심을 보였다. “로봇 공학과 자동화와 같은 인공 지능과 신기술의 출현은 모든 범주의 노동자들의 고용 전망을 위태롭게 한다. 양심적으로 신중히 사용하지 않는다면, 인간 존엄이 그 활용의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기술은 인간 존엄에 해를 끼칠 수 있다”(준비 모임 4항). 청년 이민 45. 청년 이민은 이민에서 엄청난 비율을 차지한다. 준비 모임이 강조했듯이 그들을 이민으로 내모는 원인은 다중적이다. “젊은이들은 더 나은 삶을 꿈꾼다. 그런데 많은 젊은이들이 더 나은 경제 여건과 환경을 찾고자 이민으로 내몰린다. 그들은 평화를 희망하고 특히 매체에서 묘사되는 ‘서구의 신화’에 매혹된다”(준비 모임 3항). 또한 그들은 “두려워한다. 많은 나라들에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준비 모임 1항). “모든 대륙과 대양에서 공통으로 꾸는 꿈은, 젊은 사람이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찾으려는 바람이다”(준비 모임 3항). 46. 성인 가족과 동반하지 않은 미성년자나, 고학년일 때 외국에 도착한 미성년자들의 상황은 특히 취약하다(프란치스코, 2017년 세계 이민의 날 교황 담화, “취약하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아동 이민”, 2016.9.8. 참조). 인신매매의 희생자가 될 위험이 크며 일부는 문자 그대로 아무도 모르게 실종된다. 특히 출신 국가와 도착지 국가 사이에 사회적 문화적 차이가 크다면, 정체성과 소속 문화에 대한 성찰에서 심각한 위기를 경험하는 2세대 젊은이 이민도 여기에 추가해야 한다. 47. 많은 주교회의들이 강조하듯이, 청년 이민은 그들의 출신국에서는 전도유망하고 용감한 인적 자본의 빈곤화를 초래하며 지속적 발전을 위협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이민을 받아들이는 사회에 -그리고 교회에- 막대한 변화의 힘을 제공하지만, 적절하고도 장기적 전망을 지닌 프로그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준비 모임에 참석한 젊은이들이 피력한 큰 경고를 우리는 성찰해야 한다. “이민과 난민을 환영하는 문제에 관하여, 또는 이민과 난민 현상의 첫째가는 원인에 관하여 구속력 있는 합의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의 존엄을 돌보라는 보편적 부름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그러하다”(준비 모임 2항). 우리는 이민 청년들과 함께 전쟁이나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계속 살아가는 이들도 기억해야 한다. 준비 모임에 참석한 젊은이들은, “수많은 전쟁과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폭력 상황에도 젊은이들이 여전히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준비 모임 3항)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다양한 형태의 차별 48.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성별, 사회 계층, 소속 종교, 성적 성향, 지리적 위치, 장애, 민족을 이유로 불평등과 차별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국제 연구조사가 보여준다. 이는 젊은이들이 깊이 관심을 두는 문제이다. 이에 관하여 준비 모임은 매우 명확히 말한다. “여러 수준의 인종주의가 세계 각지의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준비 모임 2항). 많은 주교회의들이 똑같은 상황에 대해 보고한다. 준비 모임은 교회 영역에서조차 젊은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차별의 형태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오늘날 여성이 여전히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다는 일반적인 사회 문제가 있다. 교회 안에서도 사실 그러하다”(준비 모임 5항).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교회가 참다운 논의를 통해, 또 서로 다른 생각과 표현에 열린 마음을 갖고 이러한 문제들에 접근할 수 있다.”(준비 모임 5항)는 점을 인식하며, “교회와 사회 안에서 여성들이 활약할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준비 모임 5항) 하고 자문한다. 끝으로, 젊은이들은 종교에 바탕을 둔 끊임없는 차별, 특히 그리스도인을 향한 차별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소수 종교로서 다수 종교가 가하는 폭력과 압박에 노출된 곳에서도, 그리스도교가 매우 세속화된 상황에서도 적용된다(준비 모임 2항 참조). 질병과 고통과 배척 49. 일부 주교회의들과 준비 모임은 많은 젊은이들이 여러 충격적인 일들 또는 여러 형태의 질병과 고통과 장애의 결과와 맞닥뜨려야만 했음을 보았다. 그들은 교회의 따스한 환대와 지원에 의지하며, 그들 가족들도 이를 필요로 한다. 특히 생활수준이 높은 나라들에서는, 매우 불행한 상황을 겪었거나 사회 안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젊은이들 사이에 여러 형태의 심리적 욕구 불만, 우울, 정신 질환, 섭식 장애 등이 점점 퍼져나가고 있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자살이 15세부터 44세까지의 연령대에서 사망 원인의 1위이다. 50. 다양한 지역의 여러 주교회의들이 젊은이들 -심지어 어린이들- 사이에서 횡행하는 여러 일탈 행위들(괴롭힘, 폭력, 성 학대)뿐 아니라 물질 남용과 중독(전통 약물과 합성 약물, 음주, 도박과 인터넷 중독, 음란물 등)의 확산에 대해 우려의 소리를 높인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러한 형태의 중독은 많은 예에서 보듯 악에 굴복하는 사람들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배척의 역학에서 나온 결과임이 분명하다. “쓰고 버려질 운명의 이 젊은 세대를 파괴하고 있는 약물이라는 전 지구적 무기가 있다!”(교황청 라틴아메리카 위원회 위원들에게 한 연설, 2014.2.28.) 이 모든 것이 이와 같은 행위에 빠져 있는 개인들의 취약성뿐 아니라 크게는 그 피해자와 가족들과 사회가 얼마나 취약해지는가 하는 문제를 표면화하게 한다. 사회 모순에 직면하여 일어나는 일탈과 폭력에 대한 대응과 마찬가지로, 남용과 중독으로 젊은이들 심지어 미성년자까지도 결국 교도소에 갇히고 만다. 형사법 체계가 사회 재적응 기회를 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해 보면, 사회에 가하는 해악이 거의 없는 젊은이들의 교도소행은 그들을 달아나기 힘든 범죄 조직에 빠져들게 할 위험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높은 재범률이 이를 보여 준다. 편견과 차별 때문에도 특정 민족과 사회단체 구성원들에게 불공평한 구류가 선고된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제4장 인간학적 문화적 과제 51. 우리 시대의 사회와 문화들은 서로 다른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들을 특징짓는 분명한 핵심 문제들이 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다시 대두되는 그 문제들을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학적 문화적 시대 변화의 표징으로 인식하게 된다. 모든 시대의 파수꾼이자 지표인 젊은이들은 다른 어떤 이들보다도 그 문제들을 새로운 기회의 원천이며 동시에 유례없는 위협으로 인식한다. 모든 이가, 특히 젊은이가 건전한 정체성을 이룩하는 길에 엄청난 도전을 불러오는 인간 조건의 ‘탈바꿈’에 대해 말하는 분석자들도 있다. 몸, 애정과 성 52. 핵심 문제 가운데 으뜸은 육체와 그 여러 측면에 관한 것이다. 자연과 문화의 경계이자 교집합인 몸은 언제나 피조물로서 갖는 한계 의식을 상징하고 수호해 왔으며,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여야 할 선물이다. 생의학 연구 기술의 발전은 우리 몸에 대한 다른 개념을 탄생시키고 있다. 몸과 기계, 신경 회로와 전기 회로를 더욱 과감히 통합하려는 전망은 사이보그를 전형적인 상징으로 여기며, 생물학적 기제의 통제와 관련해서도 육체에 대한 기술우월주의적 접근을 옹호한다. 이러한 점에서, 난자 기증자와 대리모들로 젊은이들이 선호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처럼 새로운 발전은 순전히 윤리적 평가를 넘어서 몸과 그 효용의 한계에 대한 관념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세대들은 자신이 지닌 피조물의 본성적 차원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해석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극한 체험이 더욱더 매력을 얻어 사회적 인정이나 강렬한 감정 경험의 기회로서 자기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지경에 이른다는 점도 거론해야 한다. 나아가, 조기 성 행위, 다수의 성 상대자, 디지털 음란물, 온라인상의 신체 노출, 매춘 관광 등은 성과 애정 생활의 아름다움과 본질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 53. 교회 차원에서 몸과 애정과 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성적 차이의 의미와 남성과 여성 특유의 성소의 역동성을 재발견하고 인정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교육과 신앙 여정의 핵심 요소로 늘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 연구 결과, 많은 젊은 가톨릭 신자들이 성 윤리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음이 드러났다. 어떤 주교회의도 해결책이나 방안을 제시하지 않지만, 많은 신자들이 “성 문제를 더욱 개방적이고 편견 없이 논의해야 한다.”고 믿는다. 준비 모임은 젊은이들이 “피임, 낙태, 동성애, 동거, 혼인”과 같은 논쟁적 사안들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교회 안에서도 사회 안에서도 매우 뜨겁게 토론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교회의 가르침을 기쁨의 원천으로 믿고, 교회가 “그 가르침들을 대중적 인기가 없음에도 수호할 뿐 아니라 더욱 심도 있는 가르침으로 선포하기를”(준비 모임 5항) 원하는 젊은 가톨릭 신자들이 있다. 교회의 그러한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여전히 교회의 일원으로 남고자 하며, 그 문제에 관하여 더욱 명료함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준비 모임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미 젊은이들이 금기시하지 않고 자유롭게 논의하고 있는 동성애와 성 관련 사안들과 같이 논쟁적 주제들에 대해 실천적 관점에서 말해줄 것을”(준비 모임 11항) 요청한다. 새로운 인식 패러다임과 진리 추구 54.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계 각국은 ‘가짜 뉴스’, 곧 (디지털 또는 기타) 대중 매체를 통한 그릇된 정보의 거침없는 유포와 진짜 뉴스로부터 이를 식별하는 데에 증대되는 어려움에 대처하고 있다. 공론의 자리에서 진리와 추론은 설득력을 잃은 듯하다. 그래서 ‘탈 진리(post-truth)’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한 주교회의가 지적하였듯 “소셜 네트워크와 디지털 매체 안에서는 진리의 위계가 없는 것이다.” 55. 젊은이들은 특히 이러한 풍토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의 커뮤니케이션 습관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길을 찾는 데에 동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준비 모임은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우리가 동일시할 수도 있는 다른 어떤 세속 단체와도 구별되게 만드는 진리이시다.”(준비 모임 11항)라는 문장을 사용하였다. 탈 진리의 세상에서 이 문장은 이전 시대와 비교할 때 불가피하게 또 다른 중요성을 갖게 된다. 이는 세상 정신을 따르고자 그리스도교의 가장 귀중한 특징을 포기하는 문제가 아니다. 젊은이들도 이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된 문화 환경에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성경 전승에 따라 진리는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참으로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진리를 체험할 때에 인간은 진리를 발견한다. 이러한 진리를 입증하고 증명할 뿐 아니라 증언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를 준비 모임의 젊은이들은 이렇게 깨닫는다. “교회 구성원들의 개인 이야기들은 복음화의 효과적인 길이다. 개인적 체험은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준비 모임 15항). 56.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매체의 작동 방식과, 무수히 제공되는 정보들 가운데 이용할 정보 원천을 선택해야 하는 필요가 사람들을 점점 더 같은 생각을 가진 개인들과만 접촉하게 이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 단체와 기관과 연합회도 폐쇄적 조직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15항 참조). 디지털 세계의 인간학적 영향력 57. 인간학적 관점에서 볼 때, 디지털 기술의 거센 물결은 시공간의 개념, 자아 인식,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의사소통과 학습과 정보 획득 방법에 매우 깊은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경청과 독서보다 이미지가 우선하는 현실 접근은 우리의 학습 방법과 비판 능력의 발전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장차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는 데에 기초한 신앙 전수의 방식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주교회의 응답들을 보면, 현재의 변화를 온전히 인식하고 있는 주교회의는 거의 없는 듯하다. 58. 디지털 매체의 맹목적 이용으로 사람들은 고립의 위험에 노출된다. 그 고립은 극단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데, 이러한 상황은 일본말 히키코모리(hikikomori)로 알려져 있으며 여러 나라, 특히 아시아에서 점점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또 다른 위험은 환영에 지나지 않는 찰나의 행복에 몰입하는 것으로, 이는 여러 중독의 형태로 이어진다. 준비 모임의 젊은이들은 이 점을 인식한다. “젊은이들은 흔히 온라인에서 하는 행동과 오프라인에서 하는 행동을 구분하곤 한다. 젊은이들에게 디지털 생활을 영위하는 법을 교육해야 한다. 온라인상의 관계는 비인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디지털 공간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취약함을 모른 체하게 만들고 우리의 자아 성찰을 방해한다. 음란물과 같은 문제들이 젊은이의 성 인식을 왜곡한다. 이렇게 이용된 기술은 인간 존엄을 도외시하는 가상 평행 현실을 창조한다. 거짓된 개인 정보 전달에 따른 정체성 소실, 가상 인격의 구축, 공고한 사회적 존재감의 상실과 같은 또 다른 위험도 있다. 나아가, 다음과 같은 장기적인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정보 접근의 신속성으로 기억과 문화와 창의성이 훼손되고, 단편적인 정보 분산에 이어 집중력이 손실된다. 또한 외모의 문화와 지배가 존재한다”(준비 모임 4항). 제도에 대한 불만과 새로운 형태의 참여 59. 여러 현대 사회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특징은 제도들의 취약성과, 교회를 포함하여 그러한 제도들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 저하이다. 온라인 설문에 대한 응답들은, 매우 극소수의 젊은이들만이(16.7%) 자신이 국가의 공적 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들은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그럴 재량과 기회가 한정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시민 사회든 교회 영역이든 여러 차원에서 믿음직한 지도력이 부족하다고 맹렬히 비난한다. 특히 명백한 취약성은 부정부패의 만연에서 기인한다. 제도는 공동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누군가 제도를 자기 발아래 두어 자신의 개별 이익에 봉사하게 할 수 있다면 제도의 신뢰성은 극적으로 훼손된다. 그런 까닭에, 부정부패는 여러 사회의 토대를 좀먹는 골칫거리이다. 사회 정의의 과제는 인간 존엄에 온전히 봉사하는 공정한 제도의 수립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60. 참여의 길에 열려 있을 때에, 회의론의 먹잇감이 되지 않고 책임 의식을 더욱 갖추게 될 때에, 제도를 향한 경각심은 유익한 것이 될 수 있다. 일부 주교회의들은, 불확실성과 미래를 향한 두려움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더 이상 그러한 제도에 매이지 말고 그들 안에서 자신의 삶으로 증언하면서 가치를 전달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개인적 제도적 측면에서 일관성과 진정성은 신뢰를 위한 기본 요소이다. 과잉 제안들 안의 결정 장애 61. 앞서 언급된 몇 가지 요소들이 모여, 세계 일부 지역에서 우리가 ‘결정 장애의 문화’ 안에 살아가고 있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된다. 결정 장애의 문화는 온 생애를 결정짓는 선택이 불가능하거나 의미 없다고 여긴다. 기회와 제안이 폭증하고 있는 세상에서, 언제든 뒤집을 수 있는 선택들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자신의 바람을 끊임없이 억누르는 의미라도 그러하다. “인식하기, 해석하기, 선택하기”의 단계를 주축으로 이루어지는 성소 식별 과정은 흔히 선택의 순간에, 또는 그 선택을 실행에 옮기는 순간에 머물러 있곤 한다. 때론 말씀에 자신을 내어맡기고 신앙 안에서 걸어가야 하는 힘겨운 노력이 필요 없는 외적인 안위만을 추구한다. 또 때로는 놀라우신 하느님께 마음을 열려면 우리의 신념을 버려야 한다는 두려움에 압도되어 버린다. 62. 불안한 근무 조건과 사회 불안이 모든 중장기 계획을 방해한다. 일부 주교회의들, 특히 서양의 주교회의들은, 젊은이들이 경제적 자립의 어려움 없이 혼인하려는 계획은 상당한 난관에 봉착한다고 이야기한다. 더욱이, 온라인 설문 답변에서 드러나듯이, 많은 젊은이들은 아무것도 안정적이지 못하고 심지어 참과 거짓을 구별하기조차 어려운 세상에서 명쾌한 결정이 어떻게 가능할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긴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자기 삶을 책임지는 길로 어떠한 삶의 결정을 내리는가 하는 문제이다. 세속화를 넘어 63. 지난 두 세기 동안 예측된 바와 달리, 세속화가 인류의 불가피한 운명이 되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학술 문헌들은 여러 방식으로 끊임없이 ‘거룩함의 귀환’과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상황이 사제성소와 수도 성소의 감소, 세계 각지에서 텅 비어가는 성당들의 상황과 공존하고 있다. 그렇기에 거룩함의 귀환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같은 종파에 속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근본적으로 다양한 개인의 길을 특징으로 하는, 제도화되지 않고 갈수록 ‘유동적인’ 것으로 묘사되는 종교성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이다. 젊은이들의 상황에 관한 국제 세미나 참석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매우 분화된 젊은이 세계에는 종교적 영적 활력에 대한 수많은 표징들이 있다.” 소비주의와 과학 환원주의가 가져온, 순전히 내재적인 세계관에 대한 불만이 다른 수많은 영적 여정을 통해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 문들을 열어 주고 있다. 어떤 주교회의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젊은이들은 자신이 삶의 의미를 찾고 이상을 추구하며 고유한 개인 영성과 신앙을 찾고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로 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는 종교에 대해 이처럼 변화된 태도의 특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리하여 그 원인과 일어날 수 있는 결과를 해석하고, 그것이 복음 메시지 선포에 어떤 기회를 주는지, 그리고 어떠한 위험이나 어떤 불확실성을 자아낼 수 있는지 규명하기 위함이다. 한편, 여러 곳에서 전통주의자나 근본주의자의 제안이 젊은이 세계 일부에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외국인 전투 요원과 다양한 과격화 사례 등이 있다. 또 이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우리는, 몇몇 동유럽 주교회의들이 주목한 놀라운 상황을 찾아볼 수 있다. 영적 종교적 실천이 점차 의무에서 선택적 여가 시간 활동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곧, 개인 선택의 측면이 강조되는 한편, 그러한 실천은 다른 많은 대안들과도 경쟁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제5장 젊은이들에게 귀 기울이기 64. 예비 문서에서 그랬듯, 주교회의들은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거듭 표명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참으로 교회에 요청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주교회의 답변들은 다양하고 광범위했다. 온라인 설문에서, 일부 젊은이들은 상당히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면서 자기 생각들을 거리낌 없이 전하고자 애썼다. 젊은이들은 준비 모임의 체험도 같은 선상에서 해석했다. 주교회의는 여러 모로 젊은이들에게 귀 기울였지만, 대체로 교회 단체에 구성원으로 활발히 참여했던 젊은이들에게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들이 전체 젊은이 세계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길 위험이 존재했다. 예상대로, 온라인 설문에 참여한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이미 교회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거듭 언급한 바에 따르면, 젊은이들에게 귀 기울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이 있는 곳에 함께하면서 그들의 일상 체험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준비 모임 참석자들은 이처럼 열정적으로 진술했다. “교회와 다른 기관들이 이번 준비 모임 과정을 통해 배우고 젊은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기를 우리는 희망한다”(준비 모임 서론). 다수의 온라인 설문 응답자들도 이러한 기회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 경청의 노고 65. 한 젊은이가 내놓은 의견이 인상적이다. “우리 현대 세계에서 경청을 위해 들이는 시간은 결코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다”(온라인 설문). 경청은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절실히 찾고 있는 가장 믿음직하고 용감한 언어임이 준비 모임에서도 드러났다. 예외 없이 모든 젊은이에게 참으로 귀 기울이는 것이 교회에서조차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많은 젊은이들은 어른들 세계가 그들의 목소리를 흥미롭거나 유용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느낀다. 사회나 교회 영역에서도 그러하다. 한 주교회의에 따르면, 젊은이들은 “교회가 젊은이들이 겪는 상황에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지 않는다.”라고 느끼고, 교회가 “젊은이들의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 다른 주교회의에 따르면, 젊은이들은 “교회가 손을 내밀어 그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을 반갑게 맞아들여 대화하고 환대해 주기를 교회에 요청하고 있다.” 이 젊은이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그 이유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준비 모임 7항). 분명 그 이유들 가운데 경청에 대한 실패와 무관심을 찾을 수 있다. 또한 “교회는 종종 너무 엄격해 보이고, 대개 지나친 도덕주의와 연결되어 있다”(준비 모임 1항). ‘진정한 교회’를 향한 바람 66. 대부분 매우 세속화된 지역 출신인 수많은 젊은이들은 교회에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는다. 교회를 그들 삶의 중요한 대화자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 젊은이들은 교회가 귀찮거나 짜증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라고 교회에 공공연하게 요청한다. 이는 무비판적이거나 충동적인 거부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중대하고 합당한 원인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성 추문이나 경제적 추문이 그 원인으로, 젊은이들은 이와 관련하여 교회가 “그 제도 안에서 자행된 성 학대에 관하여 무관용의 입장을 계속해서 지켜 나가기를”(준비 모임 11항) 원한다. 젊은이들의 삶과 감수성을 적절히 파악하지 못하는 성품 직무자의 미비함에도 원인이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젊은이들에게 수동적 역할만이 맡겨진다는 문제도 있다. 또한 현대 사회 안에서 교회의 교리와 윤리적 입장을 설명하는 데에서 교회가 겪는 어려움도 있다. 67. 매우 비판적인 순간에서도, 젊은이들은 기본적으로 교회가 모범과 지식과 공동 책임과 지속적인 문화로 빛나는 제도가 될 것을 바란다. 어느 주교회의는 이렇게 말한다. “젊은이들은 교회가 설교를 하는 것보다 복음의 빛으로 그들 삶의 상황에 함께하는 것을 보기 원한다!” 한마디로, 젊은이들이 하려는 말은 이런 것이다. “현대의 젊은이들은 진정한 교회를 갈망한다. 우리가 특히 교계에 요청하고자 하는 것은, 투명하고 환대하며, 정직하고 매력적이며, 의사소통할 수 있고 가까이 가기 쉬운, 기쁘고 상호 작용하는 공동체이다”(준비 모임 11항). ‘더욱 관계적인’ 교회 68. 많은 젊은이들은 교회의 새로운 접근법이 특히 관계적 측면에서 확고할 것이라고 믿는다. 젊은이들은 “덜 제도적이고 더욱 관계적인” 교회를 원한다고 무수한 주교회의들이 말한다. 그러한 교회는 “선입견 없이 사람들을 환대”할 수 있는 “친절하고 친밀한” 교회이며, “환대하고 경청하며 소중히 아껴 주고 통합하는 곳으로 여겨지는 가정”과 같은 교회 공동체이다. 또한 준비 모임에 따르면, “우리는 환대와 자비의 교회를 필요로 한다. 그러한 교회는 자기 뿌리와 유산을 인식하고, 기준을 따르지 않는 이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이를 사랑하는 곳이다”(준비 모임 1항). 69. 교회 생활에 더욱 잘 참여하는 젊은이들은 다양하면서 구체적인 요청을 하였다. 흔히 대두되는 주제는 전례이다. 젊은이들은 살아 있으면서 가까이 있는 전례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전례는 흔히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또는 가족 의식을 체험”(준비 모임 7항)하도록 나아가지 못한다. 젊은이들은 강론에 대해 말한다. 많은 이가 복음의 빛으로 자신의 상황을 식별하는 데에 강론이 적절히 동반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은 기쁨에 이끌린다. 그 기쁨이 우리 신앙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준비 모임 7항). 그런데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흔히 그러한 기쁨을 전할 능력이 없는 듯 여겨진다. 70. 교회 안팎으로 대화를 시도하라는 요청도 있다. 젊은이들은 우리 시대의 여러 주요 문제, 곧 교회와 사회 내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인식과 강화 등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일부 젊은이들은 신앙을 다른 지식과 종교 전통과 풍성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 주는 문화로서 해석할 것을 교회에 권유한다. “세계화된 세상, 타종교와 대화하는 세상에서, 교회는 모범을 보일 뿐 아니라 다른 종교와 전통을 지닌 이들과 평화롭고 건설적인 대화를 하기 위한 신학적 지침을 갖추어야 한다”(준비 모임 2항). ‘정의에 헌신하는’ 공동체 71. 여러 형태의 가난에 시달리는 세계 각지의 젊은이들은 물질적 도움이나 그들의 고통을 치유하는 데에 함께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교회가 시민 사회 증진에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기관으로 여겨지는 곳에서 젊은이들은 이렇게 묻는다. 교회의 이 예언적 현존이, 여러 그리스도교 공동체 생활을 둘러싼 폭력과 압제와 박해에도 용기와 인내로 계속될 수 있는가. 많은 젊은이들이 다양한 사안들에 다가가는 더욱 실천적인 운영을 교회에 요청한다. 참으로 가난한 이들의 편이 되어 주고, 환경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검소와 투명성을 분명하게 선택하고, 시민 사회와 온 세상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철저한 방식으로 참되고 분명하며 담대하게 악을 고발하라는 것이다. “교회는 인신매매와 강제 이민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특히 시급한 마약 밀매와의 싸움을 위한 계획들을 강화해야 한다”(준비 모임 14항). 신학생들과 젊은 수도자들의 의견 72. 많은 신학생들과 젊은 남녀 수도 생활 양성자들은 이번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주제에 크게 기뻐하며 이 주제에 관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의 의견을 표명하였다. 그들이 지적하고 제안한 사항들에 따라 우리는 세 가지 구체적인 방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형제애와 연관된다. 심한 경쟁과 개인주의의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함께 공유하는 유대와 애정을 중심으로 참다운 형제적 삶을 요구한다. 그들은 교회가 ‘형제애에 대한 예언적 존재’, 곧 그들의 가정이 되어 줄 수 있는 집이 되기를 바란다. 그 다음으로, 영성에 대한 요구가 있다. 곧, 하느님과 맺는 긴밀한 관계와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를 요구하는 것이다. 세상의 일부 지역은 초월적인 것에 기꺼이 열려 있다. 반면에 ‘배타적 인본주의’가 팽배한 또 다른 지역들에서, 교회는 사람들의 삶에 초월의 빛을 비추는 신비적인 존재가 되도록 요청받는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사람들은 전례를 예언의 때로 본다. 마지막으로, 철저한 따름에 대한 강한 요구가 있다. 개인적 일관성을 한결같이 지킬 수는 없다 해도 그러하다. 봉헌 생활과 성품 직무의 선택이 경제적 사회적 안전의 추구와 연관되는 몇몇 상황과는 별개로, 일반적으로 젊은이들이 이러한 생활 형태를 선택할 때에 그들은 철저한 복음적 삶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철저한 복음적 삶은 하느님과 우리 형제자매들을 위한 자기 봉헌을 향하여 함께 나아가는 구체적이고 점진적인 동반을 필요로 한다. 제2부 해석하기: 신앙과 성소 식별
73. 제2부에서 우리는 제1부에 제시된 상황들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게 하는 일부 요소들과 원동력들을 깊이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살아가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우리의 준거 지평이 되는 동시에 건전한 불안감과 복된 위기의 원천이 된다. “우리를 애먹이지 않는 신앙이야말로 문제가 있는 신앙입니다. 우리를 성장시키지 않는 신앙이야말로 성장할 필요가 있는 신앙입니다. 우리를 일깨우지 않는 신앙이야말로 일깨워야 할 신앙입니다. 우리를 뒤흔들지 않는 신앙이야말로 뒤흔들 필요가 있는 신앙입니다”(프란치스코, 로마 교황청에 한 성탄 하례 인사, 2017.12.21.). 제1장 젊음의 축복 74. 젊음은 현재의 상태만이 아니라 인간 삶의 특정 시기이다. 젊음에 대한 이 진리를 이해하려면, 성경과 인간학의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느님의 말씀께서 우리에게 인간 삶의 이 결정적인 단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요소들을 제시해 주시기 때문이다. 교회가 실제로 “세상의 참 젊음”이라면, 젊음의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에 빛을 비춘다는 것은, 교회가 “자신의 모습을 젊게 하는”(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메시지,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데에 도움이 되는 소중한 요소들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교회가 새로워진 젊은 원동력을 재발견하도록 교회를 향하여 하는 호소이기도 하다”(프란치스코,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준비 모임에서 한 연설, 2항). 그리스도, ‘젊은이들 가운데 한 젊은이’ 75. 젊음은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삶의 시기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이 시절을 지내시며 당신의 현존으로 젊음을 거룩하게 해 주셨다. 리용의 이레네오는 우리가 이 사실을 깨우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말을 남겼다. “예수님께서는 인간 본성 가운데 어떠한 것도 업신여기거나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당신께서 인류를 위해 제정하신 그 율법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거치신 그 모든 나이를 거룩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통하여 모든 이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아, 아동, 청소년, 청년, 중장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각 시기를 거치셨습니다. 유아들을 위해 유아가 되어 유아들을 거룩하게 해 주셨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해 어린이가 되시어 이 시기의 모든 어린이를 거룩하게 해 주셨고, 이와 동시에 아이들에게 공경과 공정과 순종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젊은이들을 위해 젊은이가 되시어 젊은이의 본보기가 되시고 주님을 위해 그들을 거룩하게 해 주셨습니다”(성 이레네오, 『이단반박』[Adversus Haereses], II,22,4).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젊은이들 가운데 한 젊은이’이시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그리하셨듯이(루카 24,13-35 참조) 젊은이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걸어가시고자 하신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젊은이들이 각자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전부 내어 주시고자 하신다(요한 10,10 참조). 사랑의 기쁨으로의 보편적 부르심 76. 온라인 설문에서 한 젊은이는 이렇게 확신에 찬 답변을 하였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슬픔이 아니라 사랑과 기쁨의 원천입니다!” 젊은 시절과 관련하여 되풀이되는 주제는 기쁨이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코헬 11,9; 참조: 지혜 2,6). 기쁨의 명령은 다른 이에게 관심과 매력이 되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중심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젊음 안에 머무른다. 육체는 그 자체로 빛나고 충만하여 사랑의 자리가 된다. 이는 바로 사랑으로 빚어졌기 때문에 영원을 향하여 나아갈 운명인 인간 존재의 신비 자체로 이해된다. “모든 것을 바라는”(1코린 13,7) 바로 이 사랑 때문에, 모든 젊은이는 부활의 선포자가 되도록 부름받고 있다(마르 16,6 참조). 아가서 전체는 서로를 바라고 원하는 두 젊은이의 사랑을 기리고 있다. 이는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구체적인 사랑에 대한 실질적인 상징으로서, 사랑을 통한 기쁨의 소명이 보편적이고 억누를 수 없는 것임을 보여 준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기꺼이 진심으로 젊은이의 기쁨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되어야 하는 자신의 소명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2코린 1,24 참조). 체력, 정신력,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 77. “젊은이의 자랑은 힘이다”(잠언 20,29). 젊음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특징으로 한다. 체력이 한창때인 이 젊음의 시기에는 삶의 도전들에 맞서고 과감히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특유의 용기가 늘 함께한다. 젊을 때부터 모세의 시종으로 일해 온 여호수아라는 성경 인물 안에서 이러한 자질들은, 약속된 땅을 차지할 수 있게 하느님 백성을 인도하라고 부름받은 바로 그 순간 명백히 드러난다. 여호수아는 여러 차례 모세(신명 31,7.23)와 하느님(여호 1,6.7.9)의 독려를 받는다. “힘과 용기를 내라.” 바로 이 말을 교회는 삶의 도전들과 위기에 맞닥뜨리는 모든 젊은이에게 해 주고자 한다. 그러고 나서 요한 사도의 다음과 같은 말도 전하고자 한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며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1요한 2,14). 제1부에서 살펴본 상황 분석이 보여 주듯, 오늘날 젊은이들은 삶의 이러한 단계의 전형인 힘과 용기를 잃어버리고 두려움과 좌절에 빠지기 쉽다. 교회 자신도 그릇된 세속적 안위에 안주하면서 열정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이 열정은 신앙의 위험도 감수하여야 하는 교회 본연의 소명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동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불확실성, 두려움, 희망 78. 특히 우리 시대에 젊은이들은 삶 앞에서 예측 불가능하고 유리된 실존적 체험을 한다. 미래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은 불확실성을 낳고, 가능한 선택의 폭이 광범해진 상황은 혼란을 야기한다. 한편, 증오와 폭력이 난무한 곳에서 새로운 세대들은 두려움에 가득 차 그들 자신의 고유한 자원들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 부패와 불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어떻게 젊은이들이 희망의 예언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겪은 상황과 같다. 예레미야는 민족들의 예언자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주님께 자신의 나이가 어리다고 아뢰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 1,6).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자기 곁에 계셔야 한다고 느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은총으로 미약한 그의 삶에 든든한 희망을 가져다주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젊음에는 경험 부족이 따른다. 따라서 삶이 마련해 놓은 큰 임무에 직면했을 때,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확신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모든 젊은이는 그들을 동반하고 지지하며 친밀하게 가까이 있어줄 누군가를 열망한다.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친히 그에게 하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고 나서야 마음을 놓았다.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 준다”(예레 1,8).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들을 결코 잊지 않는 어머니인 교회를 요청하고 있다(이사 49,15-16 참조). 넘어지고 뉘우치고 받아들이기 79. 사랑하는 자질을 키우는 일은 언제나 젊음의 묘미이자 도전이 된다. 무절제한 방식으로 추구되거나 실천되는 사랑은 제어하기 힘든 열정이 되고 슬픔만 안겨 주는 파괴적 충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삶 속에는 죄와 악도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용서와 환대를 청하는 젊은이들의 울부짖음을 우리는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복음서에 가장 잘 알려진 비유들 가운데 하나가 두 아들과 형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는 ‘밖으로 두 번 나온 아버지의 비유’라고도 일컬을 수 있다(루카 15,11-32 참조). 첫 번째는 경솔하고 방탕한 시절을 거치고 집으로 돌아온 작은 아들을 환영할 때이고, 두 번째는 마음이 굳고 무뎌진 큰아들을 타이르며 집안으로 들어가 동생이 돌아온 것을 함께 기뻐하자고 청할 때였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많은 젊은이들이 살면서 계속 찾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찾지 못하는 진정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 비유는, 자식들이 자유의 대가를 치를지라도 그들의 선택을 묵살해 버리지 않는 용기 있는 아버지를 제시한다. 그는 마음이 넓어서 한 사람도 제외시키지 않고 가족 전원이 다시 하나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이다. 교회는 이 지상 여정에서 만나는 모든 젊은이가 바로 이러한 아버지답고 어머니다운 자세를 경험할 수 있게 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경청의 자세와 동반의 필요성 80. ‘예비 문서’에서 살펴보았듯이, 요한과 마리아의 모습은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와 성소 식별의 여정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효과적으로 보여 준다. 이러한 성소 식별의 길은 단 한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젊은이의 스승이고 모범이며 벗인 예수님과 함께 계속 나아가야 하는 삶의 여정이다. 81. 젊은이들과 직접 관련된 성경의 부르심들 가운데 하나는 사무엘의 성소이다(1사무 3,1-21 참조). 거기에서, 젊음의 시기는 경청을 위한 시기이지만 또한 생명의 말씀과 하느님 말씀을 혼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시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매우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른들에 비해서 젊은이들은 경험이 부족하다. 어른들은 “경험으로,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는 훈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다”(히브 5,14). 따라서 어른이라면 선을 택하고 악을 피하는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길러진 올바른 양심으로 빛나야 할 것이다. 젊은 세대들과 함께하는 동반은,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복음화하는 임무에서 선택적 요소가 아니라, 교회의 의무이자 모든 젊은이의 권리이다. 엘리가 신중하고 현명하게 함께 있었기에, 사무엘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노인들의 꿈과 젊은이들의 예언은 늘 함께 이루어지고(요엘 3,1 참조) 세대 간 협력의 효력을 확인해 준다. 신앙의 성숙과 식별의 은총 82. 무엇보다 먼저, 신앙은 환대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은총이고, 신앙 성숙은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그런데 우리는 먼저 다음의 사실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혀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항; 「복음의 기쁨」, 7항). 이 만남으로 삶을 뒤바꾸어 놓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리하여 대화와 책임 의식을 가지고 삶을 이끌어가게 된다. 모든 젊은이들은 자라면서, 거대한 삶에 비해 그들 자신이 너무나도 작고 자기 삶의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한 다른 사람들, 그 누구보다도 부모님의 보살핌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젊은이들은 자기 삶을 잘 살려면 자신도 다른 이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 자신을 키워 준 보살핌과 섬김의 자세들을 그대로 따라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은 식별의 은총을 청하여야 한다. 식별은 우리 혼자 힘으로 개발할 수 있는 어떤 기술이 아니다. 식별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받아들이고 신중하고 현명하게 수련하면서 길러 나가야 하는 은총이다. 그리고 식별의 은총을 받아들여 그 열매를 맺을 줄 아는 젊은이는 다른 젊은이들과 모든 사람들을 위한 축복이 된다. 83. 젊은 솔로몬 임금은 자신의 중요한 임무를 위해 하느님께 바라는 것을 청하라는 요청을 받고 “듣는 마음”을 청하였다(1열왕 3,9). 하느님께서 이를 높이 평가하셨음은 곧바로 알 수 있다.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1열왕 3,11-12). 실제로, 모든 젊은이는 어느 모로 자기 삶의 ‘주인’이다. 그러나 그들이 식별을 청할 수 있으려면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들이 충만한 자기 봉헌에 이를 수 있으려면 그들과 함께해 주는 동반이 필요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젊은 왕비 에스테르의 이야기는 교훈적이다. 백성의 기도가 늘 그녀를 동반하고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었기에(에스 4,16 참조), 에스테르 왕비는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고 용감하게 목숨의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자기 백성을 구하고자 하였고 이로써 젊음의 용기와 여성의 헌신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인생 계획과 성소의 역동성 84. 젊음의 시기에 정체성이 확립된다. 복잡하고 단편적인 성향, 여러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특징으로 하는 시기이니만큼, 인생 계획의 정립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위태로운 상황에서, 교회가 줄 수 있는 도움은 주로 삶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뒷받침하는 데에 집중된다. 가장 바람직한 경우에 그리고 젊은이들이 더 수용적인 곳에서, 이러한 사목 형태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성소를 발견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런데 여기서 성소란 결국 소수의 뽑힌 이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말이고 이로써 하나의 사목 계획이 정점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목 활동 방식에는 ‘성소’라는 말에 담긴 충만한 진리를 축소시키거나 폄하시킬 위험이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측면에서, 예수님과 부자 청년의 만남을 떠올려 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마태 19,16-22; 마르 10,17-22; 루카 10,25-28). 여기에서 우리는 나자렛 출신의 스승님께서 그 젊은이의 인생 계획을 지지하지 않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그분께서는 이를 성취하는 법을 제안하시지도 않고, 추가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권유하시지도 않는다. 그분께서는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당신께 묻는 젊은이의 공허함을 채워 주려고도 하시지 않는다. 적어도 예수님께서는 그 젊은이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지지하심으로써 이러한 공허함을 달래 주려 하시지는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공허함을 채워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그 젊은이에게 자기 자신을 비우고, 자기를 내어주는 새로운 전망을 위한 여지를 만들라고 요구하신다. 이러한 삶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요한 14,6) 그분을 만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참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게 만드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젊은이가 자신의 삶 전체를 바꿀 것을 요구하신다. 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가진 것을 버리고, 믿으라는 부르심이다. 이는 계획적인 사고방식을 깨라는 도전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지나치면 자기도취가 되고 자기 안으로 침잠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논리 안으로 들어가 당신을 따르라고 이 젊은이를 초대하신다. 그 전에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사랑 가득한 눈길로 계속 그를 바라보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제2장 신앙의 빛으로 밝히는 성소 85. 젊은이들은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준비 모임 최종 문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성소와 그 모든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돕는 교회를 추구한다”(준비 모임 3항). 그렇게 하려면 ‘성소’라는 말의 의미를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예외 없이 모든 젊은이를 마음에 두고 있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인간 실존의 성소적 전망을 확실하게 조명해 달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젊은이들 자신은 교회가 그들을 도와 “간단명료하게 성소를 이해할 수 있게”(준비 모임 8항) 해 줄 것을 교회에 청하고 있다. 여러 주교회의의 답변들과 젊은이들이 직접 제시한 많은 견해들을 통해서, 우리는 성소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성품 직무와 특별한 봉헌 생활에 대한 성소를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 주교회의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젊은이가 성소를 식별하는 데에서 사목의 취약점은, 성소의 개념을 직무 사제직이나 봉헌 생활의 선택으로만 국한시키는 데에 있다.” 86. 우리는 성소에 대한 이 ‘좁은’ 시각을, 지난 두 차례의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여정과 비교하여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3차 임시 총회와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4차 정기 총회에서는 이렇게 단언한다. “혼인은 성소이다. …… 혼인하여 가정을 꾸리겠다는 결심은 성소 식별의 결실이어야 한다”(「사랑의 기쁨」, 72항). 이렇게 볼 때, ‘성소’라는 용어에 대한 편협한 시각이 젊은이들 안에 강한 편견을 만든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젊은이들은 성소 사목을 오로지 사제와 수도자 ‘모집’만 목표로 하는 활동으로 간주하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젊은이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는 이러한 교회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젊은이들에게 의미 있고 더 광범위한 ‘청년 성소 사목’을 위한 토대를 다질 필요가 있다. 성소 전망 안에서 인간 삶 87.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인류의 성소적 전망을 분명히 재정립하였다. 공의회는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여, 온 인류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도록 예정되어 있는지를 밝히고(교회 헌장 3.13항; 사목 헌장 19.32항 참조) 또한 보편적 성화 소명을 설명하였다(교회 헌장 39-42항 참조). 그리하여 이러한 해석 전망 안에서 개별 성소들, 곧 성품 직무와 봉헌 생활의 성소뿐만 아니라 평신도 성소(교회 헌장 31항 참조), 특히 혼인 성소(교회 헌장 35항; 사목 헌장 48.49.52항 참조)를 이해하였다. 뒤이어 발표된 교도권의 가르침도 그 연속선상에서 ‘성소’라는 말의 유비적 특징을 인식한다. 또한 각 개인의 사명과 또 모든 이의 친교에 관하여 ‘성소’가 가리키는 실재를 특징짓는 그 많은 차원들도 인식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아 88. 성경은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다고 밝히면서(콜로 1,16 참조) 우리가 성소의 신비를 하느님 창조를 특징짓는 실재로 이해하도록 이끈다. 이로써 모든 남녀의 실존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밝혀지는 것이다. 바오로 6세 복자께서는 이미 이를 언급하셨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어떤 사명을 지니고 있다”(「민족들의 발전」, 15항). 또한 베네딕토 16세께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대화의 피조물로 창조하셨다고 단언하셨다. 곧, 창조하시는 말씀께서 “우리 각자를 개인적으로 부르시면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볼 때 삶 자체가 성소임을 보여 주신다.”(「주님의 말씀」, 77항)고 밝히셨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성소에 관한 인간학만이 인간을 참되고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에 적절해 보인다. ‘준비 모임’ 동안 일부 비신자 젊은이들과 타종교 젊은이들이 세상과 역사 속에서 그들의 성소를 식별하고자 하는 그들의 바람을 증언한 사실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준비 모임 8항 참조).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89. 성소로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젊은이의 성장에 매우 중요한 일부 요소를 강조할 수 있다. 이는 삶이 운명으로 또는 임의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삶이 우리가 독자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사적 자산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우리 삶에 합당한 숙명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기 때문에 성소가 없다. 후자의 경우에는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인간을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은 ‘성소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소 식별은 우리 육신과 자아, 타인, 세상과 이루는 화해 여정의 형태를 취하여야 한다. 충만한 기쁨과 사랑을 향하여 90. 성소로서 삶의 개념은, 인간이 자기 창조라는 기만과 자기도취적 자아실현이라는 망상을 떨쳐 버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선익이 되도록 우리를 위해 예정해 두신 하느님의 계획에 역사적으로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성소 문화를 증진하여야 한다. 이 새로운 성소 문화는 생명과 희망을 낳는 사랑의 친교의 기쁨과 언제나 연결된다. 실제로 충만한 기쁨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리고 이어서 우리도 개인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상황(가정, 일, 사회적 국가적 사명) 속에서 다른 이들을 사랑하도록 부름 받을 때 비로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성소 91. 그리스도론적 사건은 창조를 완성으로 이끈다. 한처음부터 창조를 움직인 그 신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의 신비가 밝혀진다. …… 새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신비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 주는 바로 그 계시 안에서 인간을 바로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에게 그 지고의 소명을 밝혀 주신다”(사목 헌장 22항).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초월하도록 부름받았음을 깨닫는다. 실제로 그분 말씀에 대한 경청이 우리를 ‘깊은 데로 저어 나가도록’(루카 5,4 참조) 이끌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에만 의지할 때에는 전혀 가늠할 수조차 없던 지평으로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 준다. 세례 성소 92. 그러나 신약에서 성소는 그분을 더 가까이에서 따르도록 특정한 사람들을 부르는 초대를 가리키기도 한다. ‘예비 문서’에서 제시하였듯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첫 제자들을 만나시는 복음 이야기가(요한 1,36-39 참조) 이러한 성소의 전형이 된다. 예수님 부르심의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를 때 비로소 드러난다. 이 목적은 바로 스승님과 대화를 나누고 친교를 맺는 것이다. 이는 처음부터 명백히 드러날 수는 없는 것으로, 마치 우리가 책임을 맡아 주도적으로 모든 세부 사항을 기획해 나가는 어떤 계획의 결실과도 같다. 이것은 신앙의 눈을 통해 볼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시듯, 신앙은 “그 여정이 진행되는 정도까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열어 주시는 지평 안으로 들어가는 정도까지만 ‘본다’”(「신앙의 빛」, 9항). 93. 세례 안에서 하느님 자녀가 된 사실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로마 6,4-5; 8,14-16 참조) 모든 성소 여정은 파스카 여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여정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새 삶을 얻고자 옛 삶을 버리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당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신”(히브 12,2) 바로 그분이시다. 그러므로 제자가 되려면 충실한 신앙에 따르는 고통과 포기가 요구된다는 것을 알더라도, 신자들은 마음을 잃지 않고 계속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아버지의 오른편에 가셨고 그리로부터 언제나 당신 성령과 더불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부르심 94.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 가운데에서 몇 명을 뽑아 특별한 직무를 맡기신다. 이는 사도들의 성소에서 매우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루카 6,13 참조). 또한 그들에게 당신의 어린양들을 돌보라고 당부하셨다(요한 21,15-19 참조). 마찬가지로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았다”(로마 1,1; 참조: 1코린 1,1). 특별한 사명으로의 부르심을 언급하는 본문들에서는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아무런 대가를 바라시지 않고 지명하신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또한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선택받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신비가 계시되며 구원 역사 안에서 임무를 맡는다는 사실도 두드러진다. 때로는 이 성소와 더불어 부름받은 사람에게 새로운 이름이 부여되는 경우도 있다. 95. 온 교회의 ‘성소’ 전망 안에서만 특별한 ‘부르심들’은 이해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교회(ecclesia)라는 이름 자체는 제자 공동체의 성소적 특성과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으로서 교회의 정체성을 가리킨다(1코린 1,26; ?현대의 사제 양성?, 34항 참조). 교회 안에서, 특별한 임무에 대한 성소는 어떤 특권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부르시는 그 은총을 눈에 보이게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세리 레위에게 “나를 따라라.”(마르 2,14) 하시며 그를 교회의 사도로 삼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마르 2,17) 오셨음을 우리 모두에게 선포하시는 것이다. 교회의 성소와 교회 안의 성소들 96. 교회 성소의 참된 징조와 충만한 실현은 마리아 안에서 이루어진다. 젊은 처녀 마리아는 “예”라고 응답함으로써 성자의 강생을 가능하게 하였고, 마침내 다른 모든 교회 성소가 실현되는 조건들을 수립하였다. 이 ‘마리아 원칙’은 교회 안에 다른 직무적 은사적 법적 원칙을 앞서고 또 이를 넘어서는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뒷받침하고 동반한다. 97. 나아가, 우리의 세례 성소가 교회의 선교 본성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면, 세례 성소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교회의 선교 본성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또 모든 사람들 사이에 이루는 친교를 향하여 이끌리는 것이다. 사실, 다양한 교회 성소들은 다채롭게 표현되며, 이를 통해 교회는 형제적 공동체 안에서 받아들인 복음의 참된 표징이 되라는 부르심을 성취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여러 형태들은 예수님 사건을 증언하여야 하는 사명을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로써 모든 사람이 예수님 사건 안에서 구원을 발견하게 된다. 98. 바오로 성인은 그의 서간들에서 이 주제를 여러 번 되풀이하여 다룬다. 교회의 모습을 다양한 지체들로 구성된 한 몸으로 제시하고, 각 지체가 긴요하고 몸 전체와 결합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모든 지체들이 조화롭게 일치할 때에만 몸이 생기를 띠고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이러한 일치의 기원은 바로 성삼위의 신비 자체에 있다. 실제로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1코린 12,4-6). 99. 따라서 그리스도인 삶의 다양한 형태들은 독자적으로가 아니라 그 상호성과 은사 교류 안에서만 생각하고 이해하여야 한다(?평신도 그리스도인?, 55항; ?봉헌 생활?, 31항 참조). 이것이 교회가 인류 역사 안에서 예수님을 온전히 닮은 모습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교회의 생활과 사명을 위한 교계의 선물과 은사의 선물의 관계에 관한 신앙교리성의 최근 서한 「활기찬 교회」(Iuvenescit Ecclesia)는 은사에 관한 올바른 신학을 발전시키는 데에 유용한 지침들을 제시해 주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성령께서 교회의 젊음을 위해 끊임없이 교회 안에서 샘솟게 해 주시는 은총의 선물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환영하고 현명하게 함양하여야 할 것이다. 다양한 성소의 길 100. 마지막으로, 성소에 대한 더 폭넓은 시각은 성소 식별이 잠재적으로 모든 이를 포함한다고 여기도록 우리에게 요청한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소 사목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교회의 모든 사목 활동이 본성상 성소 식별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것이다. …… 성소 사목을 교회의 모든 복음화와 모든 사목의 얼로 여겨야 한다”(‘성소 사목과 봉헌 생활: 전망과 희망’ 국제 대회 참석자들에게 한 교황 성하 메시지, 2017.11.25.). 가정 101. 가정에 관한 최근 두 차례의 세계주교대의원회의와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은 교회 안에서 가정의 성소와 가정의 기여에 관하여 풍요로운 통찰력을 제공해 주었다. 가정은 자신이 부름받은 대로 상호 사랑과 자녀 출산과 교육을 통하여 복음을 증언하는 데에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메시지에 함축된 성소의 의미를 되살리고, 또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속한 사랑의 문화 안에서 이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목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두 가지 전략적 요소는 젊은 예비부부의 혼인 준비 여정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과 동반해 주는 것이다. 성품 직무 102. 교회는 성품 직무 성소가 그리스도교 생활과 모든 남녀의 구원을 위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깨닫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이 생활 신분에 대한 후보자들을 돌보고 양성하며 동반하는 일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많은 교회들이 사제성소 후보자 수의 감소에 대해 염려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성소 사목에 대해 새로운 성찰을 요구한다. 성소 사목은 성품 직무 성소와 당신 양 떼의 목자가 되라 하시는 예수님 부르심이 지닌 매력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봉헌 생활 103. 봉헌 생활의 예언자적 증언도 재발견하고 젊은이들에게 그 고유한 매력을 더 잘 소개할 필요가 있다. 봉헌 생활의 증언이 지닌 매력은 ‘평범함에 대한 무감각증’을 치유하는 영약이 되고 세상과 세상의 논리를 완전히 뒤바꾸는 은총에 열려 있다는 데에 있다. 철저한 복음적 삶의 매력을 젊은 세대들에게 환기시켜 주어, 그들이 하늘 나라의 선취이자 그들 삶의 충만한 실현으로서 정결과 청빈과 순명의 예언적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이는 소비와 시장 논리가 지배적인 이 시대에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직업과 성소 104. 성덕으로 부름받아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모든 선택의 순간에, 특히 자신의 생활 신분에 관한 중요한 선택만이 아니라 자기 직업과 관련된 여러 선택의 순간에도, 성소의 눈으로 보는 법을 익힌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주교회의들은, 모든 이의 삶에서 온갖 풍요로운 결실을 맺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이 직업과 성소의 관계를 재발견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길들을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젊은이들에게 성소의 관점에서 직업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는 길들도 찾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유례없는 독신 상황 105. 마지막으로, 일부 주교회의들은 특별한 봉헌도 혼인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남아 있겠다고 선택하는 사람들이 성소적으로 어떤 신분에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교회와 세상 안에서 독신의 수가 증가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 제3장 성소 식별의 역동성 식별 요청 106. 준비 모임에서, 한 젊은이는 우리 삶에서 식별의 중요성을 분명히 표현하였다. “오늘날, 신자든 비신자든 수많은 여느 젊은이들처럼 저도 특히 저의 미래 직업과 관련하여 여러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아무것도 결심한 게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걱정만 됩니다. …… 제 삶의 깊은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지금 저는 마치 막다른 벽 앞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공허함 앞에서 저는 식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준비 모임 동안, 그의 문제는 거듭 거론되고 좀 더 구체적이고 깊게 다루어지면서 젊은이들이 지닌 어려움들을 드러내었다. “‘당신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그들은 삶과 초월적인 것을 늘 연결지어 생각하지는 않는다”(준비 모임 5항). 실제로 흔히 젊은이들은 매우 극단적인 접근과 그만큼 매우 순진한 접근, 이 양단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한없이 치열한 경쟁 상황 속에서, 한편으로는 이미 예정된 피할 수 없는 운명에 휘둘리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남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추상적인 이상에 압도되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존재로 여기기 힘들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상황이 교회를 위한 어떤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식별의 과정을 시작하는 법을 모르고 있다. 이 점이 교회가 젊은이들과 동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준비 모임 9항).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이 사실을 인식하고 계신다. “이 시점에서 많은 교회 공동체들이 젊은이들의 식별을 돕는 방법을 모르거나 식별을 위한 역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가진 여러 문제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렇다고 움츠려 들어서는 안 됩니다”(프란치스코,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준비 모임, 질문 2항에 대한 답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식별과 그리스도교 전승에서 말하는 식별 107. 준비 모임에 참석한 젊은이들은 식별의 필요성을 체험하면서도 식별이라는 말이 젊은이들이 잘 사용하는 어휘가 아니기 때문에 식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가 힘들다고도 밝혔다. “한 사람의 성소를 식별하는 일은, 특히 이 용어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비추어 볼 때, 하나의 도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이 도전에 선뜻 응할 것이다. 한 사람의 성소를 식별하는 일은 인생 여정을 따라 계속 이어지는 하나의 모험이 될 수 있다”(준비 모임 9항). 108. 실제로, 식별이라는 용어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이 의미들은 서로 상충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일치하지도 않는다. 더 넓은 의미에서, 식별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말한다. 그리스도교 전승에서 더 전형적인 의미인 두 번째 의미로, 식별이란 개인이나 단체나 공동체가 그들의 실제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영적 움직임을 말한다. 나아가, ‘예비 문서’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식별이란 용어는 여러 관행들과 상황들의 다원성에 적절한 말이다. “사실, 식별의 형태 가운데 하나는 시대의 표징을 읽는 것이며, 이는 역사 안에서 성령의 현존과 활동을 인식하도록 이끌어 준다. 그러나 도덕적 식별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다. 식별의 또 다른 형태인 영적 식별은 유혹을 깨닫고 이를 뿌리침으로써 충만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형태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의미들이 연결되어 있음은 분명하며, 이러한 연결로 식별들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을 수 없다”(예비 문서 제2장 2항). 성소 식별의 제안 109. 성소 식별에는 구체적으로 여러 단계들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준비 모임에서 말씀하신 대로, 모든 남녀에게 공통으로 해당되는 단계가 있다. “우리는 모두 식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식별이라는 이 말이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주제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공허함이나 불안감이 들 때, 우리는 식별해야 합니다”(프란치스코, 준비 모임, 질문 2항에 대한 답변). 이러한 의미에서,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바로 맨 처음부터 “예외 없이 모든 젊은이”(예비 문서 제3장 2항)를 염두에 두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이 그들 자신에 대한 분명한 진리를 깨닫도록 이끄는 여정에서 젊은이들을 동반하고자 하는 우리의 열린 자세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곧, 우리는 젊은이들이 생명의 선물을 환영하고, 사회와 세상에 기여해야 하는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는 여정에 동반하고자 한다. 나아가 교황께서는 교회가 더욱 폭넓게 모든 사람에게 식별을 제안하는 것은 바로 신앙의 확신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강조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개인적으로 부르십니다. 이는 발견했을 때 우리를 기쁨에 넘치게 하는 은총입니다(마태 13,44-46 참조). 이러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믿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실하시고 여러분을 참으로 믿으시기에 그분께는 결코 한 치의 모자람도 없으십니다”(프란치스코,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준비 모임에서 한 연설, 2항). 110. 청년 신자들에게 식별의 전망은 주님과 이루는 인격적 관계의 역동성 안에 자리하기 때문에 새로운 깊이를 지니게 된다. 청년 신자들은 교회의 구성원으로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증언하는 사명에 동참함으로써 하느님 사랑에 응답할 수 있는 여러 가능한 길들을 발견하고자 더 열린 마음으로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성소의 전망은 훨씬 더 폭넓어지고 더 근본적이 된다. 이에 비해, 많은 주교회의들에서 보내온 답변이 보여 주듯, 성소에 대한 좁은 시각에 따라 교회 지도자들과 많은 신자들은 성소 식별을 젊은이들이 생활 신분(혼인, 사제직, 봉헌 생활)을 선택하는 길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성소 식별은 사회 참여나 정치 참여의 선택, 또는 직업의 선택에도 해당될 수 있다. 111. 무엇보다도, 성소 식별은 서로 다른 대안들 가운데에서 한번 결단을 내린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 연장되어 우리가 그 결심을 실행하고자 구체적으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함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식별은 하나의 생활 방식이기도 하다. “식별은 또한 우리가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와 같이 특별한 시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식별은 우리가 주님을 더욱 충실히 따르도록 도와주는 영적 투쟁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식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때와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을 수 있으려면, 주님의 감도를 놓치지 않으려면, 또한 성장하라는 주님의 초대를 흘려버리지 않으려면 식별이 필요합니다. 식별은 흔히 중요해 보이지 않는 미소한 것들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위대한 것은 단순한 일상 현실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69항). 식별은 은총이면서도 모험이라서 두려움도 느끼게 한다. 인식하기, 해석하기, 선택하기 112. 앞서 보았듯이, 교회는 식별의 가능성이 신앙의 확신에 기초한다고 본다.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명백히 고백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의 내면 깊숙이에서 -성경에 따르면 ‘마음속’에서, 그리고 신학 전승에 따르면 ‘양심’ 안에서- 그들의 생각과 바람을 통하여 활동하고 계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말한다. 사람들의 생각과 바람은 개인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겪으면서 생겨나 관념과 표상과 계획들을 낳는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복음의 기쁨」 51항에서 제시하시고 ‘예비 문서’에서도 거듭 밝히고 있는 식별의 세 ‘단계’인 ‘인식하기, 해석하기, 선택하기’는 이처럼 내적 역동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113. 인식하기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수많은 감정과 바람과 느낌에 ‘이름을 붙인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감정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숨기거나 억누르면 안 되는 것이다. 교황께서도 이에 대해 언급하셨다. “모든 것을 개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정을 가장하거나 위장해서는 안 됩니다. 떠오르는 생각들은 식별을 거쳐야 합니다”(준비 모임, 질문 2항에 대한 답변). 따라서 성소 식별의 여정은 사람들이 각자 겪는 다양한 경험들(가정, 학업, 직업, 우정, 연애, 자원 봉사 활동, 그 밖의 여러 일)에서 드러나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이러한 여정은 곧은길을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더 빈번하고, 성공도 실패도 불가피하게 따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젊은이가 편안함을 느끼겠는가? 어디에서 그가 더 강렬한 ‘만족’을 느끼겠는가? 이것이 다가 아니다. 삶의 경험들은 여러 다른 방식으로 이처럼 모호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열망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것이 나를 참으로 ‘사랑의 기쁨’을 향하여 나아가게 북돋워 주고 있는가?” 이러한 해석들을 기초로 하여, 그저 충동이나 사회적 압력의 결과가 아니라 자유와 책임을 실천하는 선택을 내릴 수 있다. 114. 인간 자유의 행동인 식별은 오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예비 문서’에 언급된 대로, “인간의 마음은 대개 나약함과 죄 때문에, 여러 가지 감정, 심지어 상반되는 감정들에 끌리기 때문에 분열된다”(예비 문서 제2장 4항). 식별하는 이도 그의 정서와 지력과 생활 방식을 계속 형성해 나가고 있는 한 사람이라는 것은 불가피한 사실이다. 115. 그리스도교 지혜는 이 지혜를 받아들이고 여기에서 영감을 이끌어내는 이들에게 말씀, 교회 가르침, 영적 동반처럼 매우 소중한 수단들을 제공해 준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살아 계신 규범이신 예수님과 상호 작용을 하고 ‘그분의 마음을 지닐’ 정도로 긴밀하게 그분을 아는 데에 도움이 된다. 따라서 식별의 참된 여정은 경청과 기도 자세, 스승을 향한 온유함, 힘든 결정이라도 결정을 내리겠다는 의지를 요구한다. 이는 준비 모임의 젊은이들이 논의한 주제이기도 하다. “성경을 읽고 자아를 더 깊이 인식하고자 노력하는 일처럼 침묵과 내면 성찰과 기도에 시간을 보내는 일은 좋은 기회이지만, 극소수의 젊은이들만 이를 활용한다. 이러한 분야들 안으로 더 잘 이끌 필요가 있다. 신앙에 기반을 둔 모임들, 운동들, 동아리들에 참여하는 것도 젊은이들이 성소를 식별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준비 모임 9항).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는 전통적으로 ‘양심 성찰’이라 부르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실제로 양심 성찰은 사람들이 하느님 현존의 표징들을 인식하고 일상생활의 현실 안에서 하느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이유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이러한 실천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나아가 자기 길을 찾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권유하신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날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과 대화하면서 진실한 ‘양심 성찰’을 거르지 않도록 부탁합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69항).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나누는 이러한 대화 안에서, 한 교황청 부서가 젊은이들에게 바라는 대로 “젊은이들의 정서 함양”이 참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정서 함양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안위와 이해관계보다는 선과 진리에 더 잘 결합되도록 도울 수 있다.” 우리 양심의 역할 116. 양심은 식별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한 교황청 부서가 상기시켜 주는 대로 “양성이 있어야 한다면(물론 양성은 있어야 한다!), 이 양성은 자유와 양심에 대한 교육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어떤 상황들에 “교회가 대처할 때 개인의 양심을 더 잘 고려하여야 한다.”(「사랑의 기쁨」, 303항)고 강조하셨다. 그런데 주교회의들의 답변들에 따르면, 실제로 양심은 관심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양심의 역할은 우리의 실수나 죄를 인정하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길을 찾는 모든 어려움은 말할 나위 없이 우리의 개인적 한계와 상황의 한계를 고려하여, 비록 우리의 이상적 기준에는 못 미치더라도, 우리의 양심은 우리가 어떤 선물들을 나눌 수 있고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도와준다. 117.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주목하였듯이, 우리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다”(사목 헌장 16항). 이러한 믿음의 전망에서 바라볼 때, 우리 양심의 작용이 얼마나 보편적인 인간학의 가치를 지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양심은 믿는 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남녀에게 물음을 제기하고, 모두 이에게 응답하여야 한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삶을 뒷받침하는 사회 관계망 안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로 사랑받고 있는 경험 덕분에,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하라는 부르심은 그 자체로 기준이 되는 명령으로써 양심에 물음을 던진다. 우리 양심의 이러한 고양은 바로 주님의 행동 방식에 대한 관상에 근거한다. 곧, 예수님께서는 바로 당신 자신의 양심 안에서 아버지와 긴밀한 대화를 나누시면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러하셨듯이 가장 힘들고 가장 고통스러운 결단을 내리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특별한 성소의 참된 기준이 되신다. 현실 직시 118. 젊은이들은 그들 자유의 한계와 또 이에 따른 그들 식별의 한계를 경험한다. “젊은이들이 그들의 성소를 식별하는 데에는 많은 요소들이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교회, 문화적 차이, 직업적 요구, 디지털 세계, 가족의 기대, 정신 건강, 마음가짐, 소음, 또래의 압력, 정치 상황, 사회, 기술을 들 수 있다”(준비 모임 9항).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은총이고 또한 우리를 관통하는 다름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구체적인 현실은 그 제약들과 더불어 우리가 마음속으로 절실히 깨달아온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곧,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높다는 원칙이 식별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모든 바람은 아무리 숭고한 바람이어도 구체적이고 일관된 선택을 통해 구현되어야 한다. 이러한 선택에는 반드시 제약이 있어야 하고, 절제의 문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절제의 문이 없으면 거룩하고 충만한 삶으로 나아가는 길도 없다. 119. 일상생활을 직시하는 것은, 특히 여건상 자신의 목적지를 향한 전진을 ‘중단하거나’ ‘지연할’ 수밖에 없을 때, 자극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중단과 지연은 많은 나라의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그들의 기술을 선용할 참다운 기회가 없거나 경력을 쌓을 충분한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들 때문에 개개인이 건강한 ‘각성’의 단계를 겪게 되고 어떠한 직업적 성취나 삶의 목표도 그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충만하고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을 결코 채워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이러한 상황들은 매우 유익한 것이 된다. 이로써 자신의 진정한 의미와 자신의 성소를 더 깊이 추구하고픈 의욕이 생겨난다. 우리 시대의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흔히 상황들이 이 단계를 지연시키도록 이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미 사람들이 예를 들어 정서적인 견지에서 강요된 결정을 해버리고 난 뒤에야, 또는 그들의 생활 방식을 정하고 -재정적인 부분도 포함하여- 쉽게 무를 수 없는 책무를 맡고 난 뒤에야, 이 단계를 겪게 한다는 사실이다. 제4장 동반의 기술 120. 영성 전통 전체는 특히 성소 식별 과정에서 동반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강조한다. 준비 모임에 참석한 젊은이들은 이러한 동반의 필요성을 거듭 표명하였고, 특히 멘토의 증언과 인간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많은 주교회의들도, 젊은이들이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러한 봉사를 제공해 달라고 얼마나 요청하고 있는지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도 이를 보장해 주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강조하였다.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동반’ 121. “젊은이는 누구나 예외 없이 인생 여정에서 동행받을 권리가 있다”(예비 문서 제3장 2항). 성소 동반은 자유를 펼칠 수 있게 하는 과정이다. 곧, 삶의 다양한 차원들을 마련해 주고 또 폭넓은 의미 안에서 이러한 차원들을 통합하는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연유로, 참다운 동반은 성소를, 이미 예정된 운명이나 완수해야 할 과업, 효과적인 수행법을 찾음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는 이미 짜여있는 하나의 대본으로 제시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를 중요히 여기신다. 또한 그분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하나의 약속이 된다. 곧, 시련과 오류에도 전진하겠다는 의지와 담대함, 노력과 상상력이 필요한 하나의 약속이다. 122. 우리가 받은 답변들을 통해, 일부 주교회의가 동반을 (간헐적인 만남, 좋은 조언, 여러 주제에 관한 대화 시간도 포함하여) ‘넓은’ 의미로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또 다른 일부 주교회의들은 동반을 ‘그리스도교 코칭’(Christian coaching)의 범주 안에 있는 매우 구체적인 어떤 것으로 본다. 젊은이들을 동반하는 이들은 남자도 여자도 될 수 있고 수도자도 평신도도 부부도 될 수 있다. 또한 공동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교회가 젊은이들을 동반하는 일은, 실제 상황과 동반받는 이의 교회 참여와 신앙심의 정도에 따라 매우 다양한 직간접적인 형태를 띠고 수많은 차원들을 아우르며 많은 수단들을 활용한다. 영적 동반 123. 많은 주교회의들은 개인적 영적 동반이 성소 식별을 위해 유일하지는 않더라도 우선적인 자리를 차지한다고 여긴다. 이는 날마다 우리 삶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신앙의 관점에서 이를 인식하고 해석하고 선택하는 법을 배우는 기회가 된다(「복음의 기쁨」, 169-174항 참조). 동반의 개인적 관계 안에서, 멘토를 위해서나 동반받는 이들을 위해서나 남자와 여자의 접근 방식에 차이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영적 부성과 모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풍요로운 전통을 더 깊이 이해하고 지킬 필요가 있다. 124. 영적 동반은 카운셀링, 코칭, 멘토링, 튜터링과 같은 또 다른 종류의 개인적 동반과는 구별되는 색다른 특성들을 지닌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상호 관계와 연관성도 맺고 있다. 개인의 단일성과 동반 관계의 통합성에 대한 시각을 잃지 않으려면, 우리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영적 동반과 그밖에 다른 여러 친밀한 형태가 이루고 있는 상호보완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친밀한 형태에는, 우리 일상의 삶 안에서 젊은이들의 식별을 돕고 그들의 양심과 자유를 기르는 양성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이들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심리적 동반 125.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대로, “영적 식별은 인문학에서 비롯된 실존적, 심리적, 사회적, 도덕적 식견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영적 식별은 이러한 식견들을 초월한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70항). 특히, 영적 식별과 심리적 동반이나 심리치료 사이의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도 유익하다. 심리적 동반이나 심리치료도 초월적인 것에 열려 있다면 통합과 성장의 길을 위해 근본적이라는 것이 입증된다. 이러한 종류의 동반은 개인이 자신의 열망을 성취하는 데에서 그 개인의 자질, 한계, 발전에 초점을 맞춘다. 반대로, 영적 동반은 더욱 구체적으로, 개인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가장 개인적인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복음과 성경 전체에서 출발하여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개인이 나누는 긴밀한 대화를 북돋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신중한 교수법으로 영적 동반 안에 심리학 차원을 통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경청과 공감만이 아니라 말씀과의 만남을 통한 식별이 가능해진다. 또한 신뢰만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서도 복음의 기쁨이 우리의 고결한 열망을 일깨워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간다. 꿈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삶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며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동반과 고해성사 126. 영적 동반의 은사가 필연적으로 성품 직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옛 전통에서, 영적 대부모는 성직자들이 아니라 평신도들, 흔히는 수도자들이었다. 동반이 사제들이 맡는 역할들 가운데 하나가 된 오늘날의 관행은 동반을 흔히 고해성사 집전과 겹쳐지는 면담으로 한정시켜 버릴 위험이 있다. 사제들이 가까이 있어 준다 하더라도, 화해의 교역자와 영적 멘토는 서로 다른 목적과 방법과 언어를 갖추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성소 동반은 죄를 용서하는 고해성사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성사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접하는 것은 이 여정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동반과 성사의 상호 관계 안에서 다양한 영성 전통들이 여러 다른 감각들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 가정, 양성과 사회 동반 127. 일상생활이 전개되는 상황들은 친밀함을 위한 많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특히 영적인 의미에서나 더 폭넓게 인간다운 의미에서 성장을 향한 우리의 여정에 동반하는 친밀함을 말한다. 이러한 동반은 이를 제공하는 이들의 소속 단체의 임무들 가운데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가 있고, 또 이 동반에 참여하는 개인들의 열린 마음과 역량과 투신에 바탕을 두는 경우가 있다. 일부 주교회의들은 성소 식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가정의 역할을 언급한다. 특히 부모가 자녀들에게 영감을 주는 신앙과 신심의 역할 모범이 될 때 그러하다. 곧, 부모는 언제나 자녀에게 신앙의 첫 증인들이 되는 것이다. 성품 직무자들이 부족한 곳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일어날 수 있다. 가족이 경제적 또는 직업적인 성공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이다. 이는 결국 성소 식별의 엄중한 여정을 위한 가능성을 막아 버린다. 이따금 가정 파탄은, 장기적인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계획하는 가능성과 관련하여, 젊은이들에게 환멸을 안겨다 주기도 한다. 동반은 여러 다른 명칭들을 통해서도 학교와 대학교 차원에서 많은 교육 체계의 주요 관심사항이 된다. 동반은 특정 개인들에게 맡겨지는 임무이기 이전에, 교육 공동체 전체에 스며들어 있는 교육의 기본자세이자 사고방식인 것이다. 직업 훈련에서 튜터링도 젊은이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측면에서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일부 주교회의들이 지적한 대로, 이러한 종류의 동반은 “학교나 대학교나 다른 교육 기관들이 젊은이의 성소 식별에 이바지하는 매우 중요한 통로”이다. 더욱이 이는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분별력을 가지고 현실에 접근하고 하느님 목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북돋우는 기회가 된다. 또한 특별한 일로 젊은이들을 계속 만나는 어른들이 젊은이들의 인간적 성숙이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동반을 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상황, 역할, 직업들이 있다. 스포츠 코치의 역할이나, 특수 기관(교도소, 여러 종류의 쉼터, 상담소, 진료소)에서 교육의 책무를 맡고 있거나 일하는 이들, 또는 전문가들(의료인, 심리학자, 교육자 등)의 역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전문 직업인으로서 그들의 책임 한도 안에서이지만, 이러한 형태의 동반이 영적으로 중요할 수 있고 성소 식별 과정에 한 몫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시대의 표징을 읽는 동반 128. 젊은이들은 그들이 직면한 사회적 현실의 도전을 받고 있다. 사회 현실은 흔히 강렬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대한 해석은 동반을 필요로 하고 시대의 징표를 확인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성령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가리켜 주시며 젊은이들과 교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신다. 만연한 부패, 커져만 가는 구조적 불평등, 인간 존엄의 무시, 인권 침해, 여자들과 아동에 대한 차별, 조직화된 폭력 그리고 불의 앞에서 젊은이들이 느끼는 분노에 대해서는, 주교회의가 보내온 답변들을 살펴보면, 그 누구도 이에 합당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안에서도 이러한 사안에 대해 논의할 자리가 없어 보인다. 또한 세계 도처에서, 젊은이들 스스로가 가해자든 피해자든 폭력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기만에 쉽게 사로잡혀 버리곤 한다. 무분별한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젊은이들의 이상주의적 포부를 악용하는 법을 알고 있다. 또 다른 상황으로는, 종교 박해나 광신주의나 정치적 폭력이 젊은이들의 마음에서 평화롭고 풍요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꺾어 버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들도 동반을 위한 교회의 예언자적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일선의 자리들이다. 일상생활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동반 129. 마지막으로, 일상의 동반이 있다. 이는 흔히 조용히 이루어지지만 그렇다고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자기 삶을 온전히 인간다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가 그들의 증언을 통해 이러한 일상의 동반을 한다. 성소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전체가 하는 동반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 전체는 공동체의 관계망을 통해 생활 방식을 제시하고, 개인적 성화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는 이들 옆에 있어 준다. 한 교황청 부서가 언급한 대로, “식별에서 동반의 개인적 측면은 신학적으로나 형제애적으로나 유익한 그리스도교 체험의 일부일 때에야 비로소 풍요로운 결실을 거둘 수 있다. 실제로, 자기 증여의 삶을 위한 구체적인 길들을 올바로 식별하는 전제 조건인, 자신을 내어 주고자 하는 열망도 공동체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멘토의 자질 130. 멘토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지니고 있는 신비를 존중하고 이미 그들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주님을 믿도록 부름받고 있다. 멘토는 자신이 행동이나 제안보다는 그 존재 자체로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범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영적 동반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깊은 정서적 교류-전승이 심오한 창조의 관계로서 영적 대부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는 멘토 자신도 무엇보다 영성적으로 또 어느 정도는 심리학적으로 견실한 양성을 받고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열린 자세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멘토는 참으로 경청과 식별을 통하여 다른 이에게 보탬이 될 수 있고, 또 자신의 역할과 관련하여 가장 빠지기 쉬운 위험들을 피할 수 있다. 이러한 위험들로는, 자신이 동반하고 있는 이들의 탐구와 선택의 책임을 대신해 버리는 경우, 성 관련 문제들이 표면 위로 드러나는 것을 거부하거나 회피해 버리는 경우, 그리고 결국 선을 넘어 실제로 모욕을 주거나 지나치게 의존적인 사이가 될 가능성이 있을 정도로 자신이 영적 여정에서 도움을 주고 있는 이들과 부적절하고 해로운 사이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동반받는 당사자가 상처를 입는 것은 물론이고, 이에 더해 두려움과 불신의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하여 동반의 실천에 대한 열의가 꺾이고 만다. 131. 상당수의 주교회의들은 동반이 까다로운 일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동반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자질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믿음이 충만하고 유능하고 믿을 만한 멘토를 요구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느님과 교회와 관계를 더욱 깊이 쌓아가며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이들을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멘토가 신뢰를 줄 수 있고 현명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상기시켜 주셨다. 멘토는 “그 어떤 것에도 겁먹지 않고, 귀 기울여 들을 줄 알고, 제때에 옳은 말을 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다”(프란치스코,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준비 모임, 질문 2항에 대한 답변). 132. 준비 모임에 참석한 젊은이들은 멘토의 면모를 자세히 묘사하였다. 멘토는 “교회와 세상에 몸담고 있는 충실한 그리스도인, 꾸준히 성덕을 추구하는 사람,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는 믿을 만한 벗, 젊은이들의 요구를 귀여겨듣고 친절하게 응답해 주는 사람, 사랑이 넘치고 자의식이 정립되어 있는 사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영적 여정의 기쁨과 슬픔을 아는 사람이다”(준비 모임 10항). 젊은이들에게는 멘토가 자신의 인간성과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이따금 멘토들은 떠받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들이 추락하면, 젊은이들이 교회 활동을 지속해 나가는 데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준비 모임 10항). 또한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멘토는 마치 젊은이들이 수동적인 추종자들인 것처럼 젊은이들을 주도해서 안 된다. 오히려 젊은이들과 나란히 걸어가면서 그들이 이 여정에 능동적인 참여자가 되게 하여야 한다. 멘토는 젊은이의 식별 과정에 따르는 자유를 존중하고 그들이 이를 더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수단들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멘토는 교회 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젊은이의 역량에 대해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멘토는 젊은이 안에 뿌려진 믿음의 씨앗을 싹틔워 주어야 한다. 성령의 작용이 곧바로 결실로 나타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 역할은 사제와 수도자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평신도에게도 그러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주어야 한다. 모든 멘토는 견실한 양성을 받아야 하고 지속 양성에도 열심히 참여하여야 한다”(준비 모임 10항). 신학생들과 젊은 봉헌 생활자들에 대한 동반 133. 개인 동반은 신학생들의 “양성에서 반드시 필요한 방법이다”(「사제성소의 선물」, 45항). 그러나 이는 남녀 수도 양성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무엇보다 먼저, 개인 동반은 성소를 식별하고 은사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데에 이바지한다. 개인들뿐만 아니라 교회도 이미 내린 선택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멘토는 언제나 내적으로 자유로워야 한다. 신뢰감을 준다는 것은, 통제의 은밀한 형태들마저도 없앤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양성이 중단되는 경우나, 사람들이 또 다른 대안의 길들을 발견하도록 돕는 경우도, 선례로 볼 때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경우들이 성품 직무자들과 봉헌 생활자들의 수가 부족한 곳에서도 하나의 실패로 간주되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동반은 양성받고 있는 이들이 인간적으로 또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동반은, 다른 이들도 그들의 성소를 찾고 이에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동반에 필요한 자질을 갖춘 남녀 인재군을 창출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는 실질적인 양성 투자도 될 것이다. 134. 양성자들의 경험이 보여 주듯, 성품 직무와 봉헌 생활을 위한 후보자들은 우리 시대의 젊은이로서 사회 매체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파급에서 비롯되는 그들 또래의 문화와 세계관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다. 동반은 힘든 일과 실망스럽고 마음이 식는 순간들도 통합하도록 장려하면서 그들의 사도적 열정뿐만 아니라 그들의 개인적 영성 생활을 심화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심리적 어려움이 생길 때에는, 영적 동반과 더불어 특별한 동반이 있으면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영적 동반도 후보자들이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일시적인 기간이어도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단계에 충실히 적응하여 양성이 끝날 때만을 기다리면서 살아가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양성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주님과의 만남은 현재에 이루어진다. 135. 우리 시대에 끊임없이 제기되는 도전은 다름의 통합이다. 특히, 서로 다른 나라와 문화 출신의 사람들이 모이는 양성의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문화 간 대화를 나누는 데에 함께 동반해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양성을 마치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자질을 기를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젊은이들은 다른 문화들을 접하는 데에 매우 관심이 많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풍조가 매우 강해서 심지어 다양성을 부정하거나 평준화하거나 폄하하기도 하는 사회에서 온 젊은이들은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데에 실질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136. 동반은 사람들의 배경에 따른 적절한 여정을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오늘날 사람들의 배경은 입학이나 입회 가능 연령, 학업 수준, 이전 양성 과정, 직업 경력과 정서적 체험, 교회적 배경(본당, 단체, 운동 등)의 측면에서 계속 다양해지고 있다. 동반은 참으로 개개인에게 맞추어진 양성 여정을 위한 핵심 수단이 되며, 이러한 여정을 젊은이들은 높이 평가한다. 반면 그들은 획일화된 제안들에서는 존중받지 못하는 아쉬움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들의 학업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교육적 동반에도 적용될 수 있다. 제3부 선택하기: 사목적 선교적 회개의 여정 137. 제2부에서 살펴본 상황을 해석하는 요소들을 바탕으로, 이제 우리는 젊은이들을 향한 교회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가장 적절한 전망과 방식과 도구들을 밝히는 데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교회의 사명은 젊은이들이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며 사랑의 기쁨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성소의 이러한 역동성 안에서, 교회 자신도 모든 젊은이를 동반하는 일에 헌신하면서 스스로 사목적 선교적 회개의 길을 통해 새롭고 기쁜 사도직 열정을 되살릴 수 있다. 제1장 통합적 전망 출발하는 교회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식별 138.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준비 모임 개회식에서 젊은이들을 만나셨을 때 말씀하신 대로,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교회가 새로워진 젊은 역동성을 재발견하라는 교회에 대한 부르심이기도” 하다. “교회 안에서 우리도 현존과 친밀함의 새로운 형태들을 배워야 한다”(프란치스코, 준비 모임에서 한 연설, 3항). 한 주교회의는 “젊은이들은 교회의 자세와 방향과 관행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고 매우 명확히 주장하였다. 또 다른 주교회의도 자기 관할 지역 안에서 시행되고 있는 쇄신의 길들을 숙고해 보고 이렇게 밝혔다. “이러한 시도들 이면에 있는 진짜 문제는 더 전반적으로, 우리가 추구하고 있고 제시하고자 하는 교회의 모습과 관련된 것이다. “출발하는 교회”라는 표현은 이러한 전반적인 문제를 적절히 표현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를 실행하는 방법을 알려 주는 유용한 수행 지표들을 찾고 있다.” 이는 “단호한 식별과 정화와 개혁의 과정”(「복음의 기쁨」, 30항)을 요구한다. 또한 ‘신자들의 신앙 감각’에 온전히 동참할 자격이 있는 젊은이들의 말에 진심으로 마음 깊이 귀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139. 이러한 전망에서, ‘선택하기’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응답을 한 번에 전부 제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 공동체로서 우리의 사명을 위한 식별의 여정을 수행할 수 있게 역량을 키워나가는 실질적인 단계들을 확인한다는 의미이다. 나아가, 우리가 교회의 일상생활 속에서 식별을 잘 실천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성소 식별을 향하여 함께 나아가는 우리의 동반이 해당 젊은이들에게 신뢰를 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실제 상황에 적용하기 전에, 식별의 실천이 우리 공동체의 활동 방식이 되어야 한다.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주교회의들은 복잡한 세상에서 지도 하나 없이 그들이 나아갈 길을 찾아나가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이번 주제를 통해 식별 역량의 증진을 위한 기반을 다지는 장이 될 것이다. 분열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느님 백성 140.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여정은 ‘우리가 함께 걸어가는 길’이다. 이 여정에는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이 지닌 부요함을 재발견하라는 시급한 초대도 포함되어 있다. 하느님 백성은 교회를, 흔히 분열과 불화로 점철된 세상 안에서 친교의 예언자적 표징으로 정의한다. 이 백성은 “그 신분으로 하느님 자녀의 품위와 자유를 지니며, 성령께서 마치 성전에 계시듯 그들의 마음 안에 머무르신다. 이 백성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여야 한다는 사랑의 계명을 그 법으로 지니고 있다(요한 13,34 참조). 마지막으로 이 백성은 하느님의 나라를 그 목적으로 삼는다”(교회 헌장 9항). 역사적 현실 안에서, 하느님 백성은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 하느님의 백성은 “이 세상의 다양한 민족들로 구체화되며, 이 민족들은 저마다 고유 문화를 가지고 있다”(「복음의 기쁨」, 115항). 하느님 백성 안에서, 성령께서는 “풍요롭고 다양한 은사를 가져다주시면서 동시에 결코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조화인 일치를 일구어 주신다”(「복음의 기쁨」, 117항). 이 역동적인 정체성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선교하러 출발하는 교회가 되도록 재촉한다. 이로써 교회는 “중심이 되려고”(「복음의 기쁨」, 49항) 노심초사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계속해서 교회 ‘울타리’ 너머에서도 누룩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교회는 은사의 상호 교류 논리에 따라 자신이 줄 것도 있고 받을 것도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역동성 안에서, 교회는 대화를 교회의 양식과 방법으로 선택하여, 복합적인 실재 안에 여러 유대와 연관 관계가 존재한다는 인식을 증진시켜야 한다. -복합적인 실재를 단절된 조각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좁은 시각일 것이다.- 또한 일치를 향한 긴장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한다. 획일주의에 사로잡히지 않고, 각 부분이 전체적으로 함께 지닌 부요함과 그 고유성을 간직하면서도 모든 부분이 수렴되려면 일치를 향한 긴장이 필요하다(「복음의 기쁨」, 236항 참조). 어떠한 성소도, 특히 교회 안에서, 대화의 이 열린 역동성을 벗어나서는 자리할 수 없다. 또한 성소 식별을 동반하려는 모든 진정한 노력은 언제나 가장 가난하고 가장 취약한 형제자매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으면서 이러한 지평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열매 맺는 교회 141. 개인이든 집단이든 모든 이가 사랑의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우리의 삶을 내어 주고 아낌없이 헌신하는 이러한 역동성은, 교회가 자신에게 맡겨진 권한을 행사하는 방식의 특징도 된다. 교회는 참으로 열매를 맺는 방식으로, 따라서 친교를 창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다. 어떤 해석에 따르면, 권위는 어원상 창조주께서 생각하시고 바라신 그 기원 안에서 모든 피조물을 ‘성장하게 만드는’ 역량을 의미한다(권위 있음을 가리키는 영어 authoritativeness는 어원상 성장하다는 뜻의 라틴어 augeo에서 나왔고, 여기에서 저자 auctor, 권위 auctoritas가 파생된다). 권위를 행사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휘어잡으며 통제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장을 촉진하고 자유를 발휘하게 하는 책임을 맡는다는 의미이다. 142. 따라서 교회는 젊은이들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이건 늘 이렇게 해 왔어.’라는 말만 되풀이하지 말고, 젊은이들이 진정한 주역이 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사목 방식과 체계적인 내적 구조 방식을 결정하는 이러한 전망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바라고 있는 진정성에 대한 요구와 온전히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젊은이들이 자신과 동반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완고한 재판관도 아니고, 의존적인 성향을 키우며 걱정 많고 과잉보호하는 부모도 아니다. 젊은이들이 기대하는 동반자는 자신의 나약함에 움츠려 들지 않고 마치 질그릇처럼 자기 안에 간직되어 있는 보물을 빛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2코린 4,7 참조). 그렇지 않을 때, 그리고 특히 또 다른 적지 않은 대안들이 있을 때, 젊은이들은 결국 다른 곳으로 향하고 말 것이다(준비 모임 1.7.10항 참조). 143. 성소 식별을 위한 동반이 열매를 맺으려면 통합적인 전망을 받아들이면 된다. 실제로, 성소는 단절의 원리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성소는 그 사람의 모든 차원을 통합하고 풍요롭게 해 주는 중추가 된다. 그 사람의 타고난 탈렌트부터 그의 장단점을 아우르는 개성에 이르기까지, 마음속 가장 깊은 열정에서부터 학습을 통하여 습득한 기술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체험하는 성공에서부터 실패에 이르기까지, 관계를 맺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역량에서부터 한 민족이나 사회 안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고유한 역할을 맡는 능력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차원을 아우르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동반의 봉사는 그저 겉으로는 서로 무관하거나 영적이지 않은 일련의 요소들에 따라 좌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양성 주체들 사이의 협력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제2장 일상생활 안으로 깊이 들어가기 144. 기쁘고 충만한 삶을 향한 부르심은 언제나 사회적 관계와 문화적 상황 안에서 이루어진다. 젊은이들은 일상의 상황들을 마주할 때 동반과 양성을 필요로 하며 주인공이 되고자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나가기, 보기, 부르기”(예비 문서 제3장, 1항)로 부름받는다. 곧, 교회는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상황의 제약과 기회들을 알고 대처하는 데에 시간을 투자하여 사랑의 기쁨을 향한 부르심이 누구나 알 수 있게 울려 퍼지도록 요청받고 있다. 또한, 동반의 여정에 힘입어 젊은이들은 사회와 대인 관계들과 일상생활의 원동력(우정, 애정, 시간과 돈 등)이 불러일으키는 소망, 생각, 감정, 느낌을 인식하고 식별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통합적 관점에서 젊은이들의 삶이 펼쳐지는 영역과 상황 사이의 관계, 사목 관행에서 변화의 필요성, 멘토 양성의 요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145. 특히 자신과 다른 사람과 단체, 사회 또는 문화 안에서 나약함을 경험하고 마주하는 것은 힘든 만큼 가치가 있다. 젊은이들에게 이는 숨겨진 자질을 발견하고, 성소의 목적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하며, 끊임없이 사소한 안위만을 찾는 데서 벗어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교회는 이 길을 동행함으로써 교회의 사명을 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영역과 새로운 자원을 발견할 것이다. 학교와 대학교에서 동반 146. 실질적으로 모든 주교회의는 젊은이들이 자기 삶의 계획과 사회의 발전을 추구하도록 동반하는 데에 학교, 대학교, 다른 여러 교육 기관이 지니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러 지역에서 이러한 교육 기관은 교회적 성격을 명확히 지니지 않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접하게 되는 -유일한 장소는 아니라도- 주요한 장소가 된다. 경우에 따라, 이러한 곳은 심지어 많은 젊은이들이 알지도 못하고 가지도 않는 본당을 대신하게 된다. 또한 이번 준비 모임에 참석한 젊은이들은 이러한 부분에서 교회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학교는 많은 젊은이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종종 다양한 사회 경제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곳이기에 여기에 투입되는 자원은 결코 낭비되는 것이 아니다”(준비 모임 13항). 특히, 학교를 그만 두었거나 학교에 갈 수 없는 많은 젊은이들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이 요구된다. 총체적 전망과 통합적 양성의 필요성 147. 가톨릭 교육 기관을 포함하여 많은 학교와 대학교에서, 교육과 양성은 습득된 지식을 인격적 성장보다는 노동 시장에 적용하는 것을 강조하는 순전히 실용적인 목표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 기술과 학문적 소양을 총체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의 기준이 되는 지평은 “생태 문화”(「찬미받으소서」, 111항 참조)이다. 또한 우리는 지성과 욕망 그리고 이성과 감정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복잡한 현대 세계에 잘 대처하고 그 다양성과 대화할 수 있는 책임감 있는 시민을 양성하여야 한다. 우리는 젊은이들이 학문과 문화적 참여에 영성적 차원을 통합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젊은이들이 의미 있는 개인의 진로뿐만 아니라 그들이 속한 사회의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는 길도 식별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148. 교육에 대한 이러한 통합적 개념은 교육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과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물질적 경제적 제도적 구조를 포함한 체계적 쇄신을 요구한다. 교사, 교수, 개인교사, 교육의 길에 참여하는 모든 전문가들, 특히 버려지고 낙후된 지역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이 하는 소중한 봉사에 교회는 감사하고 있다. 참된 소명을 재발견하고 새롭게 적용하려면 그들의 온전한 양성을 위한 새로운 투자가 필요하다. 그들은 내용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인간적 성숙함을 보여 주는 증인이 되도록 부름받고 있다. 교육자들은 영적 부모로서 젊은이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젊은이들이 자기 삶의 주체가 되고 주인공이 되게 할 수 있다. 가톨릭 학교와 대학교의 특수성과 부요함 149. 전 세계의 많은 주교회의는 가톨릭 학교와 대학교에 감사를 표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가톨릭 학교와 대학교의 목표는 개종 권유가 아니라 “청소년들이 모든 실재에 관한 인간적 가치관을 키우도록 하는 것이다. 이 실재에는 초월성도 포함된다.”(가톨릭교육성이 주관한 국제 대회 “교육의 현재와 미래: 쇄신의 열정” 참가자들과 나눈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대담, 2015.11.21.). 이러한 관점은 가톨릭 학교와 대학교가 다른 지역 교육 주체들과 함께 일하도록 이끌며 또한 다양한 사람들이 대화에 참여하는 자유롭고 열린사회에서 폐쇄적 이념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150. 이러한 교육 기관들이 그들의 사명에 충실하려면 학생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가치들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는지 밝혀야 하며 지속적인 평가와 자기평가의 문화를 증진해야 한다. 추상적인 선언문이 아니라, 우리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학업을 세상의 문제들과 가장 가난한 이들의 요구와 환경 보호에 대한 책무로 여길 수 있게 얼마만큼 학교가 도움을 주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포르투갈 대학교들에 한 연설에서, 가톨릭 대학교와 관련하여 현실을 분석하고 서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현대 문제에 대안을 마련하는 진정한 연구와 토론의 자리”를 만들어야 하며 “도덕적, 영성적, 종교적 차원이 연구에 포함되어야 한다. 가톨릭 학교와 대학교는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교육학의 모든 것을 실천으로 보여주도록 요청받는다.”고 말씀하셨다(포르투갈의 가톨릭 대학교와의 접견, 2017년 10월 26일). 151. 특히 교회 대학교와 대학, 교육 기관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모든 가톨릭 학교와 대학교에 대해서- 영감을 주는 확실한 기준을 고려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기준에는 케리그마에 대한 영성적, 지성적, 실존적 관상, 모두를 아우르는 대화, 지혜와 창의력을 발휘하는 학과간 연구, “관계망 구축”의 긴급한 요구(「진리의 기쁨」, 4항 참조)가 있다. 경제, 노동, 공동의 집 돌보기 새로운 발전 모델 찾기 152. 온전한 인간적 성숙을 향한 동반은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보는 것을 포함한다. 또한 이는 교회와 교회 기관이 지속 가능에 관한 전망을 지니고 일관된 생활방식을 증진하며 최근 만연한 환원주의(기술우월주의적 패러다임, 이윤의 숭배 등)에 맞서라고 요구한다. 「찬미받으소서」는 생태적 회개의 가능성을 신뢰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지속적인 변화의 역동성을 창출하려면 개인의 선택뿐만 아니라 정치 지도자들에 압력을 가하는 공동체적, 사회적 선택도 포함되어야 한다. 한 아프리카 주교회의가 말했듯, 이러한 이유로 젊은이의 기여가 필수불가결하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 나라 젊은이들의 역동성과 교회와 사회 발전 정책에 대한 그들의 책임감 있는 참여를 인식하고 있다.” 지속 가능성의 증진을 위해서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연구하는 다양한 학과목들 안에서 자신의 지적 자원으로 이에 헌신하며, 이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여야 한다. 153. 작은 몸짓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으며 쓰고 버리는 문화와 전혀 다른 논리에 기초한 선택들을 증진하는 영성을 발전시키는 데에서, 교회는 매우 중요한 특별한 기여를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이렇게 되새겨 주신다.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이러한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또한 우리의 신학교와 수도회의 교육 기관에서 사람들이 책임 있는 소박한 삶을 살고, 감사하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가난한 이들의 어려움과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교육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찬미받으소서」, 214항). 노동과 기술 혁신 154. 제조업계에서 디지털 정보 기술 혁신과 그 침투 과정은 세계적으로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알려진 상황을 만들었다. 이는 또한 노동 시장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교육 활동과 젊은이에 대한 동반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도록 요청받는다. 지속적 변화를 특징으로 하는 상황에서, 미래에 필요할 기술 역량을 지금 가늠하기란 불가능하며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도태될 위험이 있기에, 교육과 동반은 특별한 책임이 있는 분야이다. 그래야 모든 젊은이의 재능이 발휘되고 그 누구도 뒤처지거나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과 동반의 목적은, 기술 혁신에 발맞추어, 전문 기술을 개발하고 저마다의 의미 있는 일을 하며 모든 이가 품위 있는 일자리를 가질 권리를 보호하고 그러한 역량을 키우도록 보장하려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노동 시장의 인간화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는 현실 접근법을 지닌 이들이다. 다시 말해, 젊은 세대는 노동 시장에서 협동 방식을 촉진하고, 다름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문화를 증진하며, 팀워크를 중시하고, 일과 삶의 다른 차원들 사이에 균형을 잡는 데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모든 이를 위한 일자리 창출에 협력하기 155. 새로운 경제 모델의 증진을 위해 대안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변방에서 그리고 쓰고 버리는 문화의 결과로 고통받는 단체들 사이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대안들이 있다. 이러한 변방이나 단체들은 이미 다른 곳에서는 잃어버린 연대의 가치와 실천을 지켜나가고 있다. 청년 실업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특히 젊은이들을 위한 직업의 기회를 창출할 수 있는 이러한 경험들을 지원하려면, 무엇보다도 자원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받은 일부 의견들이 보여 주듯이, 몇몇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교회가 자신의 풍부한 문화적 고정 자산을 창조적으로 사용하여 이를 위한 연구에 참여하는 방안을 찾기를 요청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주도하는 사업 계획과 기획을 고무하고 단순한 경제적 수익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 ‘생산적인’ 것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청년 문화의 틀 안에서 적극적인 시민 정신과 정치를 위한 양성 156. 일부 주교회의는 사회 윤리적 문제(자유, 정의, 평화, 생태, 경제, 정치)에 젊은이들이 민감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동반과 지지와 격려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랑의 계명은 사회적 가치를 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회적 가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덜 부패되고 더욱 공정한 사회 구축을 위한 헌신을 포함한다. 적어도 일부 사람들에게 사회적 정치적 참여는 참된 성소가 된다. 그들의 성숙을 위해 영성적 측면에서도 동반해 주어야 한다. 여하튼, 성소 식별은 공동선에 대한 기여를 창의적으로 숙고하지 않은 채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공동선에 구체적으로 이바지하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이다. 157. 많은 젊은이들은 사회 참여를 통해 그리스도 신앙에 대해 궁금해 하고 관심을 (재)발견한다. 더 나아가 정의를 위하여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그들의 참여는 비신앙인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하는 기회가 된다. 많은 주교회의는 젊은이들이 시민, 사회, 정치에 참여하도록 양성하는 새로운 길을 소개하거나 찾고 있으며, 특히 젊은이들이 참여하고 책임을 맡으며 또래와 대화하도록 격려함으로써 그렇게 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두드러진다. 젊은이들이 주체가 될 기회를 부여하는 전문 기술과 학문 프로그램의 증대, 국제 교류와 자연 환경 보호의 경험을 포함하여 가장 작은 이들과 다른 사회 환경을 접하고 봉사하는 실질적인 경험의 제공, 준비 모임에서도 강조된 가치인(준비 모임 3항 참조) 교회의 사회 교리와 통합 생태학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시작하여 상황을 해석하고 평가할 요건의 제공, 사회의 역동성을 해석하는 데에 성경이 주는 도움을 강조하면서 정의에 대한 영성의 심화 증진, 체계적 제도적 차원에 대한 통찰을 유지하면서 일상 행동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춘 생활양식으로 변화하게 이끄는 길에 대한 지원이 있다. 158. 또한 젊은이들은 일반적으로 부패에 맞서 싸우는 것과 차별의 문제에 매우 예민하다. 특히, 준비 모임에서는 여성의 존엄 증진을 가장 먼저 지적하면서 단호히 말한다. “교회는 이러한 젊은이들이 소외되지 않고 받아들여진다고 느끼도록 보증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준비 모임 5항). 민족, 문화, 또는 종교적 소수자와 이민을 특징으로 가속화되는 다문화 사회는 편견에 맞서고 여러 형태의 인종 차별 또는 신분 차별을 극복하는 방법을 마련할 것을 요청한다. 159. 다시 한 번 사회와 시민 참여와 관련하여, 준비 모임 여정은 또한 우리가 집중해야만 하는 여러 상황들을 강조하였다. 먼저 군대나 경찰 업무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의 상황이 있다. 이들이 특정 가치들을 지니고, 특히 특별한 상황(평화 사명, 자연 재해 등)에서 시민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자신의 역할을 인식하게 도와주어야 한다. 둘째로, 전 세계적으로 부르는 명칭은 다르지만(공익 근무 기간, 휴학 기간, 사회 자원 봉사 기간 등) 전담 봉사 체험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상황이 있다. 이 시기는 준비 모임이 강조하듯이, 종종 자신의 장래를 식별을 하는 좋은 기회이다(준비 모임 15항 참조).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하는 젊은이들을 다른 이는 할 수 없거나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값싼 노동력으로 치부해 버리는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디지털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 배우기 160. 준비 모임뿐만 아니라 여러 주교회의는 디지털 기술의 신중한 사용에서 젊은이들을 동반하는 문제를 강력히 다룰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다. 준비 모임에서 한 가지 방법이 제시되었다. “먼저, 교회는 젊은이들과 대화함으로써 기술에 대해 깊이 이해하여 기술의 사용법을 식별하는 데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교회는 기술, 특히 인터넷을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비옥한 자리로 보아야 한다. …… 둘째, 교회는 온라인 아동 학대와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을 포함한 만연한 음란물의 위기와 이 모든 것이 인간에게 주는 타격에 대처해야 한다(준비 모임 4항). 161. 많은 주교회의는 잠재력을 지닌 인터넷을 사목적 만남과 성소 지도를 위한 도구로 인식한다. 특히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가 그 밖의 다른 수단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는 데에 어려움이 있는 곳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점에서, 또한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들의 기술을 교회 안에서 향상시켜야 한다. 대중 매체와 디지털 세계는 단지 사목에서 활용되는 도구만이 아니고, 현실과 대조되는 가상 현실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며, 복음화되어야 할 고유의 문화를 가진 실제 생활 공간이라고 여기는 개념이 아직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컨대, 비디오 게임만 해도 일부 국가에서는 사회와 교회가 마주한 중대한 도전이다. 젊은이들에게 인간과 세상에 대한 우려스러운 시각을 조장하여 폭력으로 두드러진 인간관계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내면세계와 정체성 확인에서 음악 162. 모든 예술 언어 가운데, 음악은 특히 듣기와 내면세계 차원과 연결되어 있다. 정서적 영역에 음악이 주는 영향은 성소 식별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젊은이들이 어떤 음악 장르와 음악가의 음악을 선택하여 듣는가는 젊은이들의 정체성, 특히 사회적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영성을 증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음악 제작이 충분히 가능하다. 또한 우리는 공동체 생활과 신앙의 여정에서 노래와 음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일부 젊은이들은 (그레고리오 성가와 정교회 수도원 성가 또는 복음 성가와 같이) 다양한 그리스도교 전통들의 수준 높은 음악에 매료된다. 그러나 때로는 더욱 상업적인 현대 음악 언어들을 본떠 만든 음악들은 묵상을 하거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부 주교회의는 다른 종파와 종교가 제공하는 “활기차고 수준 높은 음악”이 더욱 단순하고 더욱 직접 와 닿는 언어이기에, 가톨릭 청년 신자도 포함하여 젊은이들에게 더욱 매력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다. 163. 주요 음악 행사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젊은이들도 인정하는 수준 높은 음악 제작에서 시작하여 진정한 축제와 사회적 가치를 지닌 음악을 재발견하는 기회를 증진해야 한다. 세계 청년 대회와 주요 국가적 지역적 행사들은 젊은이들의 만남을 마련하는 교회 프로그램을 음악과 결합시켜, 그러한 모임들을 위한 또 다른 방식을 제시할 수 있다. 스포츠와 경쟁 164. 스포츠의 크나큰 영향력을 고려하여, 여러 주교회의는 교육과 사목의 목적으로 스포츠를 권장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한다. 우리 몸을 돌보고 단련하는 것, 협력을 강조하는 단체 원동력, 페어플레이의 가치와 규칙 준수, 희생정신의 중요성, 관용, 소속감, 열정, 창의력은 스포츠를 인격적 화합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긍정적인 교육 기회로 만든다. 다채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성공과 실패의 경험은 식별을 위한 훈련의 장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무슨 수를 써서도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을 뒤로 하고 훈련에 기울이는 노력을 내적 성장을 위한 기회로 바꾸는 건전한 경쟁을 젊은이들이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 아닌 진정한 전인 교육 공동체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스포츠 단체-특히 교회와 연결된 스포츠 단체-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이유로 코치, 기술진, 감독을 지속적으로 양성하여 그들이 자신의 교육적 역할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순전히 경쟁적인 분야를 넘어서 서로를 인정하고, 특히 다문화 상황에서 사회 조직과 공동체 유대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는 새로운 교육의 자리를 마련하려는 생각은 바람직하다. 우정과 또래의 동반 165. 정체성 확립과 인간관계 기술의 발전을 위해 가족의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도구로 또래 집단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젊은이들이 여가와 휴가를 함께할 때, 또한 자기 또래나 더 어린 이들에게 멘토가 되는 기회를 가질 때, 이는 우정을 키워 나가며 책임감의 아름다움과 봉사의 보람을 발견하는 중요한 기회가 된다. 공동체의 유대와 생각의 나눔, 다른 이들을 통해 자신을 알고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능력은 또래 교육과 그것이 가져오는 “학습하는 공동체”의 성공 요인이다. 특히, 이는 (성, 중독 예방 등)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어른들의 말에서 거리감이 느껴지고 신뢰하기 어려워서 행동의 변화를 불러오는 데 효과적이지 않을 때에 유용하다. 불편과 소외의 상황에서 친밀함과 도움 장애와 질병 166. 많은 젊은이들의 삶에서 고통은 예견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그들의 몸과 영혼에 흔적을 남긴다. 종종 정신과 감각 신경과 신체의 질병과 장애는 젊은이들의 희망을 꺾고 애정과 성 문제를 고통으로 바꾼다. 한 젊은 장애우가 준비 모임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기에 결코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장애는 여러분 자신의 삶에 대해 자문하고 여러분의 유한함에 대해 생각하도록 촉구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경험하는 젊은이들도 기쁨과 선교에 대한 소명을 드러낼 방법을 찾도록 부름받는다. “고통이 일상이 될 때에 어떻게 복음의 기쁨을 전할 수 있는가?” 또한 이들은 이처럼 자기 내면의 힘을 발견하도록 부름받는다. “나는 울어도 좋을 권리를 가졌으나 계속해서 투쟁하고 사랑할 의무도 있다.” 이러한 젊은이들은 또래의 도움에 의지하는 한편 친구들에게 자신의 한계를 대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 인간적으로 성숙하도록 돕는다. 질병 또는 장애를 가진 젊은이들을 통합할 줄 아는 운동들이나 공동체들은 특히 유익하다. 그들은 이러한 젊은이들의 가정을 지원하고, 다른 젊은이들과 모든 사람을 위한 그들의 기여를 소중히 여긴다. 복음의 기쁨으로 활기를 얻은 공동체는 불편을 대체할 마르지 않는 창의력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어떤 상황에서, 특히 아프리카에서 인체 면역 결핍 바이러스(HIV)나 에이즈(AIDS)에 걸린 젊은 환자들을 청년 사목에 통합하는 혁신적인 길이 활성화되고 있다. 중독과 다른 취약성 167. 약물, 술, 그리고 향정신성 물질의 사용은, 다른 오래된 그리고 새로운 중독과 같이, 젊은이들을 예속시키고 그들의 생명을 위협한다. 이러한 불편한 상황에 빠진 일부 젊은이들은 위탁 가정이나 교육과 재활 공동체와 같은 기관의 도움으로 재출발할 좋을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들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다른 삶의 방향을 식별하여 선택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동반하여야 한다. 또한 종종 그들에게 낙인을 찍고 그들을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는 사회 상황에서 그들이 다시 통합될 수 있게 지원해 주어야 한다. 이에 일부 교회 기관이 괄목할 만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원을 받을 만하다.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폐쇄적이 되려는 유혹을 극복해야만 한다. 영성적 관점에서도 이러한 기관에서 일할 전문가와 봉사자들을 양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함께, 예방 문화의 증진, 그리고 마약 밀매자와 중독의 기제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에 맞서 싸우는 교회의 입장 정립이 이루어져야 한다. 젊은 수인들과 함께 168. 젊은 수인들의 재활은, 교육 활동을 통해 과거의 경험을 되돌아보고, 과거의 실수를 인정하며, 과거에 겪었던 정신적 충격을 치유하고, 재통합을 위한 사회생활 기술과 직업 기술의 습득을 격려하는 개인 맞춤형 프로젝트 참여를 필요로 한다. 영적 그리고 종교적 차원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교회는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를 위해 일하며 수감자들을 동반하는 모든 이(교정사목 담당 사제, 자원 봉사자 등)에게 감사한다. 또한 그들은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젊은 수인들에 대해서도 다루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방안도 모색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감옥 체계 안에서 일하며 매우 복잡하고 때로는 험악한 상황에 대처해야만 하는 사람들(교도관, 심리학자, 교육자 등)을 위한 인간적이고 전문적인 양성과 동반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전쟁과 폭력의 상황
169. 전 세계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이나 다양한 강도의 무력 분쟁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다. 일부 젊은이들은 강제로 또는 감언이설에 넘어가 불법 무장 단체나 무장 범죄 조직에 가입하게 되고 일부 젊은 여성들은 강간과 학대를 당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종종 다양한 정신적 사회적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는다. 일반적으로 말해, 심각한 폭력 상황에서 성장하는 것은 인격적 성숙에 장애가 되며, 이러한 상황은 특히 인간관계의 기술을 다시 습득하고 과거의 정신적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특수한 동반과 교육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요인들을 성소 식별의 길에서도 고려해야 한다. 기쁨을 향한 부르심은 이러한 젊은이들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국가나 지역 차원에서 화해의 길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잔혹한 폭력으로 고통받는 젊은이들의 삶을 회복하고 분열과 분노와 복수를 극복할 수 있는 소중한 힘을 그들에게 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청년 이민과 환대 문화 170. 이민과 난민의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특히 인신매매와 착취로 인한 희생자들이 고충을 겪고 있기에, 그들의 존엄과 행위 능력을 법적으로 보호하고 동시에 이민을 받는 나라들은 통합의 방안을 증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교회 단체가 실행하고 있는 계획과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의 참여는 매우 중요하다. 이민 1세대와 2세대인 청년 이민들이 기쁨으로 나아가는 길과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가능성을 발견하도록 그들을 동반하는 것은, 성소의 식별을 위한 동반이라는 차원에서 특별한 도전 과제가 된다. 그것은 다문화 차원을 고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국제 결혼을 한 부부들도 문화와 종교의 관점에서 많은 섬세함과 특별한 관심으로 동반해야 한다. 직무 사제직 또는 수도 생활에 대한 성소를 느끼는 이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다양한 문화가 있는 경우, 청년 사목을 포함한 모든 사목은 온갖 소외를 없애고 참된 만남의 기회를 증진하여야 한다. 죽음을 직면하기 171. 안타깝지만, 젊은이의 죽음은 드문 일이 아니며 살인을 저지르는 젊은이도 있다. 이러한 부분에서, 교회의 모성과 교회의 경청과 동반은 반드시 필요하다. 젊은이들은 때로는 그들을 속이고 착취하고 결국에 버리는 세상과 사회와 문화의 폐단으로 죽음에 이른다. 다른 경우, 질병과 고통의 신비를 통해 인간 생명의 한계와 충격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또한 많은 이들에게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기는, 젊은이의 충격적인 자살도 있다. 다른 상황에서, 참된 순교로서 신앙을 지키기 위한 젊은이들의 죽음은 예언적이며 성덕의 풍요로운 증언이 된다. 어떤 경우라도 죽음은, 특히 젊은이들의 죽음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궁극적 질문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교회가 이러한 경험을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새로운 기회로 여긴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일부 주교회의는 어떻게 젊은이의 죽음이 실제로 모든 이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로 이끄는지 의아해 한다. 동반과 선포 172. 동반이 이루어지는 많은 사회, 교육, 사목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든 젊은이들 안에서 어떻게 지워질 수 없는 창조주의 모상이 새겨져 있는지 그리고 심지어 젊은이들이 성령을 모르거나 알고 싶어 하지 않더라도 성령께서 그들 각자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증언합니다.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삶을 선물로 바라보며 쓰고 버리는 문화와 죽음의 문화에 맞서는 길을 소개함으로써 하느님의 일에 기여하도록 부름받습니다. 이러한 일은 교회의 복음 선포의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복음이 제안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이다(루카 4,43 참조). 이는 세상에서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에서 다스리시는 그만큼, 사회생활은 보편적인 형제애, 정의, 평화, 존엄의 자리가 될 것이다”(「복음의 기쁨」, 180항).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단순히 비정부 기구나 자선 단체가 될 수 없다. 교회의 구성원은 공공연히 예수님의 이름을 고백해야만 한다(「현대의 복음 선교」, 22항 참조). 그들의 일은, 나누고 동반하고 용서하는 예수님 사랑의 훌륭한 징표가 되어야 한다. 173. 모든 동반은 기쁨을 향한 부르심을 소개하는 길이며, 그래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증진하는 적절한 자리가 될 수 있다. 케리그마는 “우리의 모든 도덕적 종교적 의무에 앞서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표현하여야 한다. 이는 진리를 강요하지 말고 자유에 호소하여야 한다. 또한 기쁨과 격려와 활력과 조화로운 균형을 특징으로 하여야 한다”(「복음의 기쁨」, 165항). 모든 동반은 봉사하는 사람과 그가 속한 공동체에게 신앙이 성장하는 기회가 된다. 이러한 이유로, 좋은 멘토의 주요 요건은 직접 ‘사랑의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기쁨은 세속적 만족의 허울을 벗기고 다른 이에게 그 사랑의 기쁨을 전하려는 소망으로 마음을 가득 채운다. 174. 이러한 복음으로 들뜬 마음은 젊은이들이 교회와 거리를 두거나 교회에 대해 불평할 때 그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우리를 지켜 준다. 일부 주교회의가 언급하였듯이, “젊은이들에게서 멀어진 교회”에 관해 말해야 한다. 교회는 교육적 원동력의 부족과 사도적 소심함에 대해 다른 이를 비난하지 않고 그 대신에 회개의 길로 나아가라고 부름받는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요나 증후군’을 극복하는 것은 여전히 달성해야 할 목표로 남아 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34항 참조). 요나 예언자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요나는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인 그 뜻을 마음으로 공감할 수 없었기에 피해 달아났다. 요나의 고난이 강조하는 실질적 문제는 복음 선포자들의 복음화와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참된 복음화이다. 복음화된 공동체만이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3장 복음화되고 복음화하는 공동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복음적 전망 175. 젊은이들의 상황에 관한 국제 세미나에서, 젊은이들에게 공동체 경험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젊은이들은 “제도들에 대해 과민 반응”을 보이는 반면에 그들은 또한 “참된 공동체”안에서 의미 있는 관계와 “빛을 비추고 한결같은 증언자”들과의 인격적 만남을 찾고 있다(준비 모임 5항 1.10 참조). 많은 주교회의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열려있고 포용적인 교회의 본성을 더욱 강력하게 강조하기를 원했다. 교회는 복음 선포의 핵심적 특징과 점진적인 복음 선포를 수호하는 틀 안에서 젊은이를 동반하도록 부름받는다. 복음 선포는 젊은이들의 자유가 성숙되는 속도에 맞추어 점진적으로 진행되며 이 진행은 그들의 일상에서 역사적이고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또한 “최초의 가장 위대한 복음 선포자”(「현대의 복음 선교」, 9항; 「복음의 기쁨」, 12항)이신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르는 신자 공동체는 밖으로 나아가 젊은이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을 만나 그들 마음이 타오르게 하고 그들 곁에서 걸어가도록 부름받는다(루카 24,13-35 참조). 176. 엘리트주의와 비판만 일삼는 집단에 갇히게 되는 위험은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서도 이미 큰 유혹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께서는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칭송한다. 비록 그 여자는 선택된 민족에 속하지 않았지만 큰 믿음을 보여 주었다(마태 15,22-28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맞아들이지 않은 사마리아인들을 불살라 버리고자 하는 제자들을 호되게 꾸짖으신다(루카 9,51-55 참조). 예수님께서는 선택된 민족에 속하는 것과 율법을 따르는 것이 자동적으로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언하신다(루카 18,10-14 참조). 하느님 아버지와 멀어져 있었던 경험을 한 다음에 새로운 일치를 이룰 수도 있으며 하느님 아버지 집에서 생활하지만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없는 경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루카 15,11-32 참조).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스승님을 세 번 거부하고 유다는 그분을 배반하는 반면, 백인대장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이었다(마르 15,39 참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신의 눈으로 ‘본다’는 오만과(요한 9,41 참조) 하느님에게서 온 기준과는 다른 기준으로 판단하는 오만을 버리도록 부름받는다. 177. 예비 문서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과거 상황과는 반대로, 신앙 접근 방법들이 덜 표준화되어 각자의 개성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에 교회가 익숙해져야 한다”(「예비 문서」, 3장 4항). 그래서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앞으로 나아가는 각 구성원의 작은 발걸음을 감사히 여기고 모든 이에게 존재하는 은총의 씨앗이 싹트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모든 구성원을 존중하고 그들과 우정을 쌓고 그들을 동반해 주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커다란 한계 속에서 내딛는 작은 발걸음을,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겉보기에만 올바른 생활보다 더 기뻐하실 것이기”(「복음의 기쁨」, 44항; 「사랑의 기쁨」, 305항) 때문입니다. 유리된 삶을 경험하고 불확실한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젊은이들은 교회가 각자의 고유성을 간직한 다면체의 모습을 지니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복음의 기쁨」, 236항 참조). 교회의 가정 경험 178. 지난 수년에 걸쳐 이루어진 가정에 대한 쇄신된 사목적 관심의 가장 풍요로운 결실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가정 지향적 본성을 재발견하는 것이었다. 교회와 본당이 “가정들의 가정”(「사랑의 기쁨」, 87.202항 참조)이라는 표현은 매우 힘이 있고, 교회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교회의 모습은 관계의 방식을 의미하며, 가정은 교회 생활의 근간이 된다. 또한 교회의 모습은, 애정을 수반하고 유대를 이루고 회심을 가져오는 영성의 교육적인 형태, 젊은 세대와 가정을 동반하는 어렵지만 흥미진진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교육하는 길, 하느님께서 당신의 가정이 되라고 부르신 교회의 방식이 전례 안에서 표현되기 때문에 전례의 거행 양식과 관련된다. 많은 주교회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의미 있는 관계를 실천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이러한 방향에서 구체적인 사안을 제시해 달라고 요청한다. 한 주교회의는 “시끄럽고 혼란스런 삶 가운데, 많은 젊은이들은 교회가 영적인 집이 되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불확실함, 분열, 취약함으로 지속적인 위협을 받는 젊은이들의 삶을 통합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중요하다. 깨지기 쉽거나 깨진 가정에 살고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을 교회의 자녀로 “입양”할 수 있는 참된 가정으로서 교회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젊은 세대를 위한 사목 179. 많은 주교회의는 복음화와 교육의 긴밀한 관계를 확실히 알고 있다. 이 관계는 많은 남녀 봉헌 생활회에서 효과적으로 발전되어 왔으며,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이러한 이중의 목표를 달성해 왔고, 교육 여정에 주로 초점을 맞춘 청년 사목의 풍요로운 경험을 교회 전체에 제공해 왔다. 주교회의들이 보내온 많은 답변은 다양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많은 사목자들의 교육 감각이 부족함을 경고한다. 한 주교회의는 많은 경우 “젊은이들에 대해, 많은 주교, 신부, 수도자는 친밀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한 신자 공동체가 그들의 교육 과업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열정을 가지게 되면, 참된 ‘교육적 사랑’을 만들어 내는 영적, 물질적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교육적 사랑은 예기치 못한 힘과 열정으로 젊은 세대에게 헌신하게 해 준다. 180. 오라토리움회와 이와 비슷한 사목 활동은 특별히 언급할 만하다. 이를 통해, 교회는 적극적으로 어떤 경험을 제공한다. 곧 한 주교회의가 언급하듯, 교회는 다양한 상황에서 “젊은 세대를 위한 교회 공동체의 특별한 보살핌의 경험을 제공한다. 이러한 교회 공동체의 수단들은 매우 다양하다. 여기에는 봉사하는 법을 알고, 현실을 열린 눈으로 바라보며, 예언적 방식으로 활동하시는 성령께 의지하는 법을 알고 있는 교육 공동체의 창의성이 포함된다.” 오라토리움회가 있는 지역에서 젊은 세대는 잊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중심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몇몇 주교회의들은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이러한 체험을 새롭게 선보일 것을 기대하고 있다. 교육의 핵심 주체인 가정 181. 청년 사목과 가정의 연관성에 대하여, 더욱 큰 사목적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자녀 교육에 관한 「사랑의 기쁨」 제7장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 살펴보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 확실히, “가정은 인간적 가치관을 배우는 첫 학교로 우리는 여기에서 자유를 올바르게 행사하는 방법을 배운다”(「사랑의 기쁨」, 274항). 준비 모임 동안 젊은이들 스스로가 자신의 인격 성장에 도움을 주는 장소의 하나로 가정을 확실히 언급하였다(준비 모임 1항 참조). 다양한 주교회의는 좋은 가정을 이루고자 힘을 쏟는 것은 청년 사목에 소홀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젊은이들을 우선하고 그들에게 헌신하는 것은 확실히 가정 사목에 열려 있도록 요청받는 것이다. 182. 많은 주교회의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사목의 일꾼인 가정의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고찰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가정은 적극적으로 자녀들의 성소 동반하고 식별에 참여한다. 많은 다른 주교회의는 젊은이들이 결혼을 준비하는 약혼 기간 동안 그리고 혼인성사 이후 에도 그들을 동반하도록 도움을 청하고 있다. 주교회의들이 제공한 자료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주제와 관련된 가정의 역할에 대해 상반된 그림을 보여준다. 한 주교회의가 언급하듯이,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가장 세속화된 사회에서, “대부분의 가톨릭 가정은 ‘적극적’ 또는 ‘의도적’으로 자녀의 성소 식별에 관여하지 않으며 일부는 적극적으로 그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신앙의 공동체적 측면이 더욱 활발하게 드러나는 사회에서는 가정이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주님 말씀을 듣고 주님과 대화하기 183. 많은 주교회의는, “최상의 실천”으로 피정, 영성 수련, 일상에서 떨어져 있는 시간, 전국 그리고 교구 순례, 함께 기도하는 경험을 통해 하느님 말씀의 경청과 하느님과의 대화를 강조하였다. 젊은이들을 환대하고 동반하는 일에 더욱 적극적인 성지, 영성 센터, 영신 수련원은 특히 세계 많은 곳에서 인기가 있다. 한 주교회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공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수단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혼돈의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오직 기도, 침묵, 관상만이 그들이 참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올바른 “초월의 지평”을 열어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젊은이들은 오직 하느님 앞에서만 진실된 모습으로 설 수 있다고 여기며 “침묵은 우리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를 위한 그분의 뜻을 식별할 수 있는 자리”(준비 모임 15항)라고 말한다. 184. 때때로 “영적 투쟁”(「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9-165항 참조)을 경험하는 기도 안에서, 성령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섬세하게 키우며 시대의 징표를 이해하는 능력을 배우며 복음이 다시 오늘날 구현되도록 실천할 힘을 끌어낼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의 영성 생활을 돌볼 때, 우리는 신앙을 예수님과의 기쁜 인격적 관계로서 그리고 그분께 감사드려야하는 선물로서 맛보게 된다. 젊은이들이 관상 생활을 우러러보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분명히, 영성적인 공동체 삶은 젊은이들을 신앙과 교회에 가까워지게 하며, 그들의 성소 식별을 동반하는 훌륭한 기회가 된다. 하느님 말씀의 학교 185. 많은 주교회의가 제시하는, 복음화와 교육에서 최상의 효과를 가져온 사목 경험의 핵심은 성소 식별과 관련하여 하느님 말씀의 힘을 접하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렉시오 디비나, 성경 학교, 성경 교리 교육, 성경에서 나오는 젊은이들의 삶에 대한 묵상,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쉽게 접하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젊은이들에게 성공적인 실천들이다. 많은 주교회의는 사목의 쇄신은 성경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이에 대한 성찰과 제안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요청하고 있다. 다른 교회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존재하는 지역에서, 다양한 주교회의는 중요한 의견 수렴과 공동 사목 계획으로 이끌 수 있는 성경의 교회 일치 가치를 강조한다. 186. 베네딕토 16세께서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결실 가운데 하나로, 교회 전체가 “다른 사목 형태들과 병립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사목 전체를 감도하게 하는 ‘성경 사목’”(「주님의 말씀」, 73항)을 증대할 것을 이미 권고하셨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18], 105)라고 말한 다음, 시편 저자는, “젊은이가 무엇으로 제 길을 깨끗이 보존하겠습니까?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시편 119[118], 9)라고 한다. 전례의 즐거움과 아름다움 187. 한 주교회의는 젊은이들은 “다른 곳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을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근본적인 종교적 경험을 얻고자 교회에 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많은 설문 답변들은 젊은이들이 전례의 내용에 민감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준비 모임은, 강력한 어조로, “그리스도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고백하지만 생기 없는 미사에 참례하거나 그러한 공동체에 소속된다.”라고 한다(준비 모임 7항). 강론의 언어와 내용에 관해, 한 주교회의는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교회와 맞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는 마치 우리가 젊은이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들의 요구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고 덧붙여 설명한다. 이러한 점에서, 「복음의 기쁨」 135-144항은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다. 188. “신앙이 성사의 구조를 지닌 것”(「신앙의 빛」, 40항)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며, 일부 주교회의는 청년 사목의 계획안에서 신앙, 성사, 전례 사이의 근원적 유대가 더욱 잘 드러나기를 요청한다. 이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교회 헌장 11항)이며 “복음화의 원천이며 정점”(사제 생활 교령 5항)인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시작된다. 전례와 거행 방식(ars celebrandi)이 잘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언제나 젊은이들의 활동과 참여가 의미 있게 이루어지고 있다. 젊은이들은 개념보다는 경험에, 관념보다는 관계에 더 민감하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일부 주교회의는 성찬례 거행과 -흔히 도착지로 간주되는- 다른 예식들이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복음 선포의 자리와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언급한다. 일부 나라의 주교회의는 젊은이들이 전례의 정신을 맛볼 수 있는 “제대 봉사자(복사) 사목” 효과를 증언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젊은이를 위한 올바른 전례 교육 방법도 생각해야만 한다. 189. 대중 신심의 주제도 언급할 가치가 있다. 대중 신심은 다양한 상황에서 젊은이들에게 신앙에 접근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마련해 준다. 대중 신심은 지역 문화와 전통과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때때로 전례에는 부족한 몸짓과 감정 표현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교리 교육을 통한 신앙의 성숙 190.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주제에서 시작하여, 여러 주교회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자리 잡고 있는 교리 교육 여정들이 어떠한지 궁금해 했다. 교리 교육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언제나 좋은 평판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교리 교육은 많은 이들에게 “어린 시절 의무적이고 강제적인 길”(온라인 설문)을 상기시킨다. 청소년과 청년 사목은 필수적이며 마땅히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며, 일부 주교회의는 교리 교육의 전반적인 형태가 새로운 세대에게 유효한지를 검토하고 재고해 볼 것을 요청하고 있다. 191. 한 교황청 부서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교리 교육과 설명을 바탕으로 한 교리 교육을 다르게 여기는 것을 피하라고 요청한다. 또한 신앙의 경험은 이미 진리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열려 있는 마음이며 신앙의 내용을 내면화하는 여정은 그리스도와의 중요한 만남으로 이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상호 역동성 안에서, 교회 공동체는 중요한 중재 역할을 한다. 192. 일부 주교회의와 젊은이들은 교회의 커다란 예술적 문화적 유산과, 하느님의 피조물과 이루는 진실된 관계와, 교회 전례의 모든 형태와 예법이 지니는 호소력에 의지하며 교리 교육 안에서 “아름다움의 길”을 따르기를 권고한다.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교리 교육의 성공적인 체험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체험은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만남을 경험하는 여정이 된다. 이러한 만남은 복음의 진리와 우리 자신의 삶의 체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일치의 원천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선교의 참여로 이어지는 강력한 신앙의 성장을 위한 환경이 마련된다. 193. 일부 상황에서, 교리 교육은 학교에서 이루어지기에 종교 교육은 젊은이들의 성소 성장에 매우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은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 학교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관계를 교육적 협력의 관계로 생각하도록 한다. 자신을 거저 내어줄 수 있도록 젊은이들을 동반하기 194. 예비 문서 설문 답변의 마지막 부분에 많은 경험들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자선 봉사 활동을 통한 “실천하는 신앙”이라는 틀 안에서 젊은이들을 동반하는 실천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봉사하는 교회는 젊은이들을 끌어당기는 성숙한 교회이다.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2코린 8,9)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교회의 소명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많은 주교회의 답변에서, 사심 없는 봉사의 경험과 성소 식별의 연관성을 잘 이해하도록 다루고 있다. “운동과 자선으로 보낸 봉사의 시간은 젊은이들에게 선교의 경험과 식별의 공간을 준다고”(준비 모임 15) 그들 스스로가 말하고 있다. 온라인 설문은 봉사의 경험 덕분에 “봉사하는 교회”와 교류하면서 신앙생활을 되찾은 젊은이들의 많은 증언을 포함한다. 다른 한편으로 투명하고 공평무사한 방식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봉사하는 교회의 역동성을 쇄신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한 교황청 부서는 새로운 “거저 주는 문화”를 촉진하기를 요청한다. 195. 많은 젊은이들에게 ‘국제 자원봉사 활동’은 연대의 감각과 여행으로 다른 문화와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고자 하는 소망을 함께 이룰 수 있는 길이다. 또한 교회에서 멀어져 있거나 믿지 않는 젊은이들을 만나서 협력하는 기회가 된다. 많은 나라에서 여러 남녀 봉헌 생활회가 소중히 여기고 개발한 ‘선교 자원봉사 활동’은 교회가 모든 젊은이들에게 줄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이다. 선교 체험을 준비하고 동반하며 그것의 성소적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젊은이들의 성소 식별을 위한 완벽한 기회가 된다. 모두에게 열려 있고 환대하는 공동체 196. 젊은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 종파의 젊은이들과 심지어 신앙이 없는 젊은이들이 준비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는 젊은이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는 표지이다. 그들에게 환대하고 포용하는 교회의 얼굴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서 누구라도 풍요로운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의 제자들은 참된 신앙에서는 다른 이를 향한 오만한 태도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에서 발견되는 선의 모든 싹을 감사히 여기도록 부름받는다. 또한 겸손한 신앙은 신자 공동체가 다양한 지위와 문화의 사람들의 지도를 따르도록 도와준다. 이는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상호 혜택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197. 예컨대, 젊은이의 상황에 관한 국제 세미나에서 일부 전문가들은 대규모 이민이 문화 간 대화와 너무나 편협해질 수 있는 위험에 처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큰 쇄신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일부 성소수자(LGBT) 청년들은 주교대의원회의 사무처에 제출한 많은 의견을 통해 밝힌 대로 “더 큰 친밀함의 혜택”과 교회의 더 큰 보살핌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일부 주교회의는 “이성 대신에 동성인 짝을 선택하였지만 무엇보다 교회와 가까워지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제안할 수 있는지 자문한다. 일부 나라에서 젊은이들을 실질적으로 우선시하는 교회 일치와 종교간 대화는,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1베드 3,16) 참석한 공동체들의 상호 존중과 자연스레 열린 마음에서 시작되어 번성한다. 또한 비신앙인과 일반적인 세속 세상과의 대화는, 종종 자신의 신앙 때문에 차별을 당하는 느낌이 드는 어떤 상황에서, 특히 학계와 문화계에서 젊은이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비신앙인의 만남’(la Cattedra dei non credenti)이나 ‘이민족의 뜰’(the Courtyard of the Gentiles)처럼 비신앙인을 위한 강연들은 젊은 세대에게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강연들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신앙을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온전히 지킬 수 있게 도와주고 다른 견해들을 효과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열린 대화 방법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제4장 사목의 활성화와 조직 198. 젊은이들의 성소 식별에 동반하려면 유능한 사람만이 아니라 적절한 활성화 체계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체계들은, 효과적이고 유효할 뿐만 아니라 관계의 형식과 젊은이들이 만들어내는 형제애의 역동성 때문에 매력적이고 빛난다. 일부 주교회의는 “제도적 회개”의 필요성을 느낀다. 우리의 합당한 차이점을 존중하고 통합하는 반면, 우리는 친교를 선교를 위한 좋은 길로 인식한다. 친교 없이는 교육과 복음화 모두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젊은이들을 위해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 보여 주는 것은 더욱더 중요해지고 있다. 젊은 주인공 199. 온라인 설문에 대한 답변에서 한 젊은이가 많은 이를 대변하여 “우리는 참여하고 인정받고 이루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느끼고 싶다.”고 말하였다. 또한 젊은이들은 세례받은 이들로서 “선교 제자들”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고 그러한 방향으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복음의 기쁨」, 106항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사도직 활동」(Apostolicam Actuositatem)에 이어서,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는 젊은이들이 “단순히 교회의 사목적 관심의 한 대상으로만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젊은이들은 복음화의 주역으로서 그리고 사회 개혁의 참여자로서 교회를 대신하여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도록 격려를 받아야 한다(「평신도 그리스도인」, 46항).”고 말씀하셨다. “젊은이를 위한” 사목에서 “젊은이와 함께하는” 사목으로 용기 있게 이동하는 것은 많은 주교회의에서 청년 사목의 핵심이 된다.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자주 젊은이에게 선교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하셨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세대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첫 선교사들입니다!”(제28차 청소년 주일 담화, 2012.10.18.). “젊은이를 복음화하는 최상의 방법은 다른 젊은이를 통해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기” 때문이다(온라인 설문). 젊은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특별한 장소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일부 주교회의는 때때로 “성직주의”의 상황이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말한다. 한 주교회의는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는 단지 대표적으로 성품 직무자와 봉헌된 이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시각을 없애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취하는 명확한 입장에 힘입어 여전히 많은 주교회의가 이루려고 하는 목표가 된다. 지역 공동체 안의 교회 200. 하느님 백성 전체는 그리스도교 선교의 주체이다(「복음의 기쁨」, 210항 참조). 그리고 선교는 다양한 책임과 다양한 활성화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베드로의 후계자는 지속적으로 젊은이들을 향한 특별한 애정을 보여 주고, 젊은이들도 이를 알고 감사히 여긴다. 교회의 가시적 일치의 중심이며 전 세계 미디어에 영향력을 미치는 지도자 위치에 있는 베드로의 후계자는 젊은 세대를 위해 봉사하는 모든 은사와 단체의 기여를 인정하고 격려한다. 많은 주교회의가 청년 사목에 중점적으로 봉사하지만, 선호되는 주체는 여전히 개별 교회이다. 주교는 개별 교회를 다스리고 거기서 그의 협력자들과 활동하고 상승효과를 내며 젊은이의 선익을 위해 일하는 모든 이가 긍정적인 친교의 경험을 얻도록 북돋운다. 여러 주교회의는 이러한 사목 영역에서 수준 높은 봉사가 제공된다고 밝히고 있는 반면, 세계 일부 지역에서는 덜 조직화되고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지역 공동체의 입장에서, 본당, 곧 가정들 가운데 있는 교회는 사목을 위한 통상적인 자리이며 우리 시대에도 이곳은 확실히 중요하다(「복음의 기쁨」, 28항 참조). 한 젊은이는 온라인 설문에서 “사제가 재정적 조직적 의무에서 자유로운 곳이라야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사목과 성사 활동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부 주교회의는 본당의 활력을 언급하지만, 다른 주교회의는 본당이 젊은이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장소로 보인다고 믿는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유동성, 생활공간, 영적 추구에 더욱 맞갖은 여러 다른 교회 경험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봉헌 생활의 기여 201. 많은 주교회의는 자신의 지역에 있는 많은 헌신적인 봉헌 생활자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현한다. 그들은 여러 형태와 다양한 방식으로 “복음화로 교육하며 교육으로 복음화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오늘날 봉헌 생활자는 도전의 국면에 있다. 일부 나라, 특히 남반구에서, 미래를 위한 좋은 조짐을 보이는 증가와 활력이 있다. 더욱 세속화된 곳에서는 그 수가 눈에 띠게 감소하고 또한 정체성의 위기도 있다. 현대 사회에 더 이상 봉헌 생활자가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일부 주교회의는 봉헌 생활은 “고유의 여성성”을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자리임을 언급한다. 때로는 교회가 오늘날 매우 필요한 이 고유의 창조력을 인식하지 못하고 격려하지 못하며 이를 발휘할 여지를 주지 않고 다양한 은사의 도구를 활용하기를 꺼린다. 교회 자체도 과감한 “문화적 회개”가 필요하다. 202. 젊은이들이 교회 역동성을 “다시 젊어지게 하는” 진정한 원천임을 믿으며 수도회 총원장 연합회는 “우리가 진실로 젊은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그들의 요구와 기대를 이해하고 있는가? 그들이 의미 있는 경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와 젊은이 세계 간의 거리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가?”를 자문한다.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방식으로 경청과 환대와 증언이 젊은이들에게 주어진다면 풍요로운 관계와 우정이 발전할 것이다. 수도회 총원장 연합회는 보편 교회 차원에서 젊은이들에 관한 “상임 대표(Permanent Observer)”가 배정되기를 바란다. 단체와 운동 203. 많은 젊은이들은 운동과 단체에 확고하고 적극적인 회원으로 활동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고 재발견한다. 이러한 운동과 단체는 그들에게 강렬한 형제적 삶, 도전적인 영적 여정, 봉사의 경험, 동반을 위한 적절한 자리, 식별을 돕는 유능한 인재를 제공한다. 이러한 까닭에 운동들과 단체들의 존재는 늘 소중하다. 교회가 가시적이고 의미 있는 현존을 지속하기 어려울 때에 운동들은 생생한 활력을 유지하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운동들은 다른 곳에도 긍정적 모습, 곧 그들의 공동체 양식과 기도 정신, 하느님 말씀의 흠숭,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 기쁨이 넘치는 회원 활동, 육체와 정서 영역의 재평가, 적극적 참여, 주인 의식을 향한 독려 등을 보여 준다.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흥미로운 요소들로서, 운동들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거둔 큰 성공을 설명한다. 일부 주교회의는 이 모든 풍요로움을 인정하는 한편, 그것에 대한 의견과 일부 운동과 단체가 자기중심적인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 지침을 제공해 줄 것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단체가 교회의 전반적인 사목 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할 필요가 있기”(「복음의 기쁨」, 105항)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활기찬 교회」 18항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더욱 발전시키는 것은 적절할 것이다. 시민, 사회, 종교 관계망과 협력 204. 교회는 시민과 사회 영역에서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책임을 맡은 모든 이들과 확고하게 긴밀한 교류를 하도록 부름받는다. 교회와 시민 사회 모두는 함께 오늘날 ‘교육의 위기’에 대해 고심하고 있으며, 교육의 위기는 어른들과의 협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공동의 노력을 요구한다. ‘관계망’은 제삼천년기에 증진해야 할 필요가 있는 주요 활동 가운데 하나이다. 이 세상에서 교회는 자신이 사회의 유일한 주체가 아니며 ‘기여할 수 있는 소수’라는 사실을 더욱더 깨닫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관계를 증진하는 능력과 함께 협력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일부 주교회의는 다양한 사회와 시민 단체와 대화하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이와 함께 힘을 모아 쇄신의 길을 계획하는 능력은 교회가 참으로 “밖으로 나아가는” 역동성을 가지도록 도와준다고 주장한다. 205. 시민과 사회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일치와 종교간 영역에서도, 일부 주교회의는 -예컨대, 인권, 환경 보호, 온갖 폭력과 아동 학대에 대한 반대, 종교 자유의 존중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공통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은 개인들이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알게 되고 소중히 여기고 함께 일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목 계획 206. 국가를 막론하고 많은 주교회의들은 체계의 부재, 즉흥성, 반복에 대해 불평한다. 준비 모임 동안 참가자들은 “때때로 교회에서 ‘언제나 이러한 방식으로 해왔다’라는 논리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말한다(준비 모임, 1항). 때때로, 준비되지 않은 일부 사목자들이 부각된다. 그들은 우리 시대의 복잡한 도전에 맞설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교회론과 전례와 문화에 대한 낡은 견해로 퇴보하는 위험에 처한다. 한 주교회의는 “종종 진로를 계획할 마음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이러한 부분에서 교구를 동반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유용할 수 있다. 한 주교회의가 주장하듯이, 오늘날은 “청년 성소 사목과 관련하여 더 많은 협력, 대화, 계획, 그리고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주교회의는 운용 계획과 영적 식별 사이의 갈등에 관해 언급한다. 실제로 좋은 사목 계획은 모두를 더욱 깊은 곳으로 이끄는 성령 안에서 참된 식별 여정의 성숙한 결실이어야 한다. 공동체의 각 구성원은 자신의 경청 능력을 키우고 모든 구성원을 위한 변화의 과정이 될 수 있는 계획에 함께 힘쓰도록 부름받는다. 특별한 행사와 매일의 삶의 관계 207. 여러 주교회의는 -무엇보다 먼저, 세계청년대회와 국제, 대륙, 국가, 교구 청년 모임과 같은- 청년 사목의 특정 ‘주요 행사들’ 그리고 젊은이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상 신앙 생활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나누었다. 세계청년대회는 매우 중요하다. 한 주교회의가 말하듯, “세계청년대회는 순례, 문화 교류, 지역과 국제 환경에서 우정을 다지는 훌륭한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많은 주교회의는 세계청년대회를 다시 검토하고 계획할 것을 요청한다. 일부 주교회의들은 세계청년대회가 지나치게 소수의 특권적 경험이라 생각하고, 일부 주교회의들은 좀 더 잘 소통하고 열려 있으며 대화에 바탕을 두는 세계청년대회를 바란다고 말한다. 208. 준비 기간 동안, 젊은이들은 “대규모 교회 행사와 교구 행사의 간극을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자문하였다(준비 모임 14항). 주요 행사가 많은 젊은이에게 의미 있는 작용을 하지만, 때로는 그러한 행사에 참석하여 얻은 열정이 일상생활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어렵다. 이는 일상의 신앙 생활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방편이 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한 주교회의는 “이러한 국제 행사들의 상호 연계성이 좀 더 명확해지고 그 기본적인 주제들을 개인과 공동체의 일상 생활 안에서 성찰하고 실천한다면, 국제 행사는 단지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통상적인 청년 사목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많은 주교회의는 특별한 행사들이 젊은이들의 신앙과 그리스도인 삶의 여정에 해결책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대해 경고한다. 이러한 점에서, 좋은 과정과 교육적 방법과 신앙 여정에 대한 관심이 매우 필요하다. 한 주교회의가 표현하듯이 “우리 시대에 복음을 선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매일 단순하고 슬기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며 복음이 매일의 소금과 빛과 누룩이 됨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합 사목을 향하여 209. 한 주교회의는 많은 다른 주교회의들과 함께 청년과 성소 사목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분야에서 뜻깊은 경험들이 있어 왔더라도, 청년과 성소 사목에 구체적인 체계를 세우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더 나아가 모든 세례받은 사람들을 위한 개인 맞춤식의 삶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 우리는 가정, 교육, 문화, 사회 사목과 함께 협력하여야 한다.” 젊은이들을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에페 4,13) 돕는 목표를 공유하는 여러 다른 사목 영역들 사이에 더 큰 협력과 상승효과와 통합을 추구하려는 참된 연구가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직무들’의 증가는 계획과 실행에 분열을 일으켜 각자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다양한 관계의 수준을 조율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이러한 직무들이 증가하는 추세에 직면하여 일부 주교회의들은 사목 수혜자를 중심으로 하는 ‘통합 사목’ 개념이 우리가 확인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여긴다. 210. 많은 이들에게 사목의 이러한 통합된 일치를 이루는 핵심은 삶의 성소적 지평에 있다. “청년 사목의 성소적 차원은 모든 과정의 끝에서만 제안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특정 성소의 부르심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집단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청소년과 청년들의 신앙에 대한 복음화와 교육의 전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제안되어야만 한다”(프란치스코, “성소 사목과 봉헌 생활: 지평과 희망”의 주제로 열린 국제회의 참가자에게 하신 말씀, 2017년 11월 25일). 신학교와 양성소 211. 성품 직무와 봉헌 생활에 대한 젊은 지원자들은 다른 젊은이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대륙과 나라에 따라 그들의 또래와 같은 자원들을 공유하고 같은 취약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지역 상황에 맞는 적절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성소 식별과 관련하여, 일부 주교회의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발견한다. 하나는 개인이 자신의 요구만을 걱정하는 자기도취의 성향이고, 또 하나는 자기 성취를 위해 성소를 바라보는 경향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공통된 뿌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잠정적으로 병적인 자기중심적 태도이다. 또한 양성의 길에 영향을 주는 두 가지 위험은 개인주의와 자기폐쇄이다. 개인주의는 자율적인 개인을 중심으로 삼고 하느님 활동에 대한 인식과 감사와 협력을 외면하는 것이다. 자기폐쇄는, 다른 이와 공동체와 교류할 필요성을 배제한 채 가상세계와 거짓 내면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예비 문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35-62항 참조). 우리는 양성의 길들을 개발해야 한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이 양성을 통해 너그럽게 자신을 내어주고 젊은이들 마음속에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는 것에 대한 깊은 인식을 길러 줄 수 있어야 한다. 현대 젊은이들의 실질적 요구와 그들의 영성과 강렬한 종교 체험의 요구를 접할 수 있는 좋은 양성 팀이 확보되어야만 한다. 양성소들에서 시간과 공간과 활동을 마련할 때에는 공동체와 형제적 삶의 참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결론 성덕에 대한 보편적 성소 212.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적이고 일치되는 특징은 성덕이다. “완덕의 천상 스승이시며 모범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친히 거룩한 생활의 창시자요 완성자로서 당신의 모든 제자에게 어떠한 신분이든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생활의 성화를 가르치셨다”(교회 헌장 40항). 질적이고 국제적인 관점에서 성화는 신앙인의 삶과 교회 일치의 모든 차원을 포괄하여 이는 각 개인의 은사와 가능성에 따른 완성을 이룬다. 이러한 이유로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는 제삼천년기 시작에 성덕을 “숭고한 보통의 그리스도인의 삶”(「새 천년기」, 31항)으로 지정하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성덕의 주제에 관한 설명은 우리 현대 세상에 성덕에 대한 이해를 제시하고 주 예수님의 뜻은 “우리가 그러저러한 평범한 존재로 안주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항). 물론 모든 것은 매일의 삶의 실천으로 이루어진다. “성인들의 힘 있는 증언은 참행복을 실천하고 최후의 심판을 위한 기준을 따르는 데에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몇 마디의 단순한 말씀을 주셨지만 이는 모든 이에게 실제적이고 유효하다. 그리스도교는 무엇보다도 실천에 옮기기 위한 것이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09항). 젊음, 성덕을 위한 시기 213. “성덕은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9항)임을 우리가 믿고 이것을 젊은이에게 제시하기 전에, 우리는 그것을 증언으로 경험하도록 부름받았고 그래서 사도행전이 여러 기회에 보여 주듯이 “동정어린”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93항 참조). 그와 같은 한결같은 태도를 유지할 때에만, 성화의 길로 젊은이들을 동반하는 것이 가능하다. 암브리시오 성인께서는 “모든 나이는 성덕이 무르익은 시기다.”(「동정성에 관하여」[De Virginitate], 40항)라고 말씀하셨기에 성덕은 물론 젊은이에게도 해당된다! 많은 젊은이들의 성덕에서, 교회는 각 개인의 역사에 앞서고 그들을 동반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는다. 또한 교회는 성체성사와 고해성사의 교육적 가치, 신앙과 사랑으로 함께하는 길의 풍요로움, 그리고 종종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복음의 선교사들이 그들의 피로 날인하여 확인시켜 준 ‘승리’의 예언적 힘을 깨닫는다. 준비 모임동안 많은 젊은이들이 말했듯이, 참된 증언은 가장 필요한 언어이며, 젊은 성인들의 삶은 교회의 참된 말씀이고 거룩한 삶을 받아들이라는 초대는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부르심이다. 참된 영적 역동성과 성덕의 풍요로운 가르침은, 예컨대 생명, 사랑, 성장, 기쁨, 자유, 미래에 대한 요구 그리고 자비와 화해에 대한 열망처럼, 젊은이들의 가장 깊은 소망을 좌절시키지 않는다. 성덕을 모든 젊은이들에게 가능하고 일상에서 실현될 수 있는 의미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것은, 여전히 많은 주교회의들에게 커다란 과제로 남아 있다. 젊은 성인들과 성인들의 젊음 214.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인간적 이득이나 혜택을 기대하지 않고 온 생애를 내어놓도록 모든 제자를 초대하신다. 성인들은 이러한 어려운 요구를 환대하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르기 시작한다. 교회는 성덕의 하늘 나라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부터 오늘날까지 어린이, 청소년, 청년 성인들과 복자들이 이루는 점점 더 크고 밝게 빛나는 별들을 바라본다. 수호성인인 그분들에게 간구하는 가운데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그들 삶의 준거로 이 성인들과 복자들을 제시한다. 다양한 주교회의가 교육적 목적으로 청년 성화의 가치를 강조해 달라고 요청하며 젊은이 스스로도 그들은 “추상적인 신학적 담론보다는 ‘삶의 이야기’가 더 수용하기 쉽다는” 것을 인정한다(준비 모임 제2부, 서론). 젊은이들은 “성인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와 관련이 있다.”(준비 모임 15항)고 말하기에 그들의 나이와 상황에 적합한 방식으로 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하는 아들의 첫 번째 제자로 살아가셨으며 모든 신앙인에게 거룩함의 모범이신 주님의 어머님께서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신다. 하느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마음속에 간직하신(루카 2,19-51 참조) 성모님께서는 교회 전체의 어머니이시며 식별의 스승이시다. “젊은 성인들”과 함께 “성인들의 젊음”을 젊은이들에게 소개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모든 성인들은 젊은 시절을 지냈고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성인들이 그들 삶의 젊은 시절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은 유용하다. 이렇게 하여,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많은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언제나 현존하시고 신비롭게 활동하심을 설명할 수 있다. 인내로 이루어지고 시간 안에서 성장하는 성덕을 향한 굽이치는 길을 통해, 많은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은총이 활동하심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여 예외 없이 모든 젊은이가 언제나 이룰 수 있는 성덕의 희망을 소중히 여기도록 도와준다. --------------------------------------------------------------------------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를 위한 교황 성하의 기도 주 예수님,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향한 여정에서, 주님의 교회는 세계의 모든 젊은이에게 관심을 기울이나이다. 젊은이들이 담대히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삶의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것을 지향하며 언제나 자유로운 마음을 간직하게 해 주소서. 현명하고 너그러운 안내자의 동행으로, 젊은이들 각자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들이 삶의 올바른 계획을 실현하고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그들 마음을 열어 주시어 원대한 꿈을 꾸게 하시고 다른 이의 선익을 배려하도록 도와주소서.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처럼, 젊은이들이 십자가 아래에 서서 당신 어머니를 당신의 선물로서 받아들이게 하소서. 그들이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고 당신께서 곁에 계심을 깨달아 당신을 주님으로 기쁘게 선포하게 하소서. 아멘. 프란치스코 참고 문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글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8(제3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 「사제품」(Presbyterorum Ordinis),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 2018.3.1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8(제1판). 프란치스코, 교황령 「진리의 기쁨」(Veritatis Gaudium), 2017.12.8..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 2016.3.1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6(제1판). 프란치스코,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2015.5.2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5(제1판).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014.11.2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제2판). 프란치스코, 회칙 「신앙의 빛」(Lumen Fidei), 2013.6.29., 50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3(제1판). 베네딕토 16세,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 2010.9.30.,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1(제1판). 베네딕토 16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 2005.12.25.,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6(제1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 2001.1.6.,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제1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Christifideles Laici), 1998.12.30.,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6(제4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봉헌 생활」(Vita Consecrata), 1996.3.25., 2008(제2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현대의 사제 양성」(Pastores Dabo Vobis), 1992.3.25.,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제1판). 바오로 6세, 교황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1975.12.8.,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7(제3판). 바오로 6세,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3.16.,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교회와 사회』, 2003(제1판), 401면. 신앙교리성, 서한 「활기찬 교회」(Iuvenescit Ecclesia), 2016.5.15.,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54호(2016), 53면. 신앙교리성, 서한 「하느님 마음에 드시는」(Placuit Deo), 2018.2.16.. 성직자성, 사제 양성의 기본 지침 「사제성소의 선물」(Ratio Fundamentalis Institutionis Sacerdotalis Il Dono della Vocazione Presbiterale), 2016.12.8.,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8(제1판). 주교대의원회의 사무처,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예비 문서, 2017.1.13.,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56호(2017), 223면. 주교대의원회의 사무처,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준비 모임 최종 문서, 2018.3.19.-24.. <원문 XV Ordinary General Assembly of the Synod of Bishops, Instrumentum Laboris: Young People, the Faith and Vocational Discernment, Vatican City, 2018.10.3.-28.,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도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