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우스 7세가 성직매매를 고집스럽게 밝혀냈다면 성직자의 독신에 대한 요구는 더욱 혁명적이었다. 당시에는 결혼한 사제들이 드물지 않았다. 11세기에 도이치-네덜란드 농부들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우니보스(Unibos)』라는 작품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마을 사제가 결혼을 해서 에버스베르크 마을에 ‘신부 사모님’의 자리를 만들었으며 사제가 죽은 다음 그녀는 자선활동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11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투르의 신도명부에는 150명 정도의 이름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주교의 딸들과 두 성직자의 아내들이 대단히 소중한 신도라고 적혀 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황에 즉위하자마자 결혼한 사제들에게 적극적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하급 성직자들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그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새로운 법에 저항했다. 콘스탄츠 주교구에서만 해도 주교회의에서 3600명의 성직자들이 무리를 지어 이 결정에 반발했다. 그러자 사제들의 명예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문서들이 나돌았다. 그레고리우스 7세가 속인들에게 결혼한 성직자들의 미사를 피하라고 요구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한 요구는 교회 신도들에게 종교지도자들에 맞서라고 부추기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개혁은 관철되었다. 바로 이 개혁이 평신도 사이에서 강력한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할까 걱정하여 일부는 폭력적인 수단을 써서 사제들의 엄격한 생활을 관철시키려고 했다. 결혼한 사제들의 ‘첩(아내)’들은 쫓겨나고 죄를 지은 성직자들은 린치를 당했다. 결혼하지 않은 성직자만이 은총의 일에서 안전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시도루스(Isidorus)의 알레고리 해석에 의존했다. “카엘렙스(caelebs, 결혼하지 않은)"란 “카엘로 베아투스(caelo beatus, 하늘의 복을 받은)"였다. 사제의 독신을 방해한 사람들은 법적으로 제재를 받았다. 사제의 처들은 첩으로 여겨졌고 사제의 자식들은 부자유스러운 노예로서 교회재산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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