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多衆, multitude)’의 시대인 21세기에 아직도 영웅 중심의 정치적, 사회적 ‘메시아주의’라는 유령이 우리 사회에 출몰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의 정치는 메시아 찾기의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 알튀세르의 말대로 “이데올로기는 그 내부에 모순을 갖고 있지 않다.” 이데올로기의 모순은 그 바깥으로 나와야만 비로소 보인다. 이 정치적 메시아들의 바깥으로 나올 생각이 전혀 없으므로 숭배자들에게 이들은 절대적이고도 항속적인 진리의 담보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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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의 시대가 지속되고 있다. 사회적 대변혁의 시기는 ‘불안정성’을 특징으로 한다. 잠재되어 있던 다양한 목소리가 마구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자기 검열과 통제를 벗어난 목소리들은 징후로만 존재하던 어떤 ‘현실’을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최근 사회의 일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우리가 아직도 먼 봉건시대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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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이런 의미에서 철학의 목표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타락시킨다는 것은 “기존의 의견들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전적으로 거부할 가능성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도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神)들을 믿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여기에서 ‘국가의 여러 신들’이란 그리스 신전의 신들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당시 그리스 사회를 지배하던 공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 질문을 억압하는 사회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사회이며, 수많은 질문을 다 견뎌낸 명제야말로 우리가 유일하게 믿을 만한 것이다. 이렇듯 인문학은 값싼 치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 부재의 안온한 삶을 뒤흔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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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문학이나 철학은 세계의 이와 같은 배리성에 대한 탐구이다. 세계가 간단한 원리로 설명이 가능하고, 또 그런 원리에 의해 정확히 가동될 때, 세계는 더 이상 탐구나 질문의 대상이 아니다. 루카치의 표현처럼 “하늘의 빛나는 별들이 세상의 모든 길을 비추는” 시대는 얼마나 행복한가. 그는 서사시의 시대를 그렇게 정의하지만, 그리고 “행복한 시대는 아무런
철학도 갖지 않는다.”라는 그의 주장은 옳지만, (미안하게도) 그런 세계는 처음부터 없었다. (…)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시스템에 의해 벌어지는 수많은 배리들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견딤’이 아니라 강력한 ‘저항’이다. 존재론적 배리도 견디기 힘든 인간들에게 특정 집단에 의한 인위적이고 조직적인 모순·배리·폭력까지 견디라는 것은 인간의 품위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권면이다.
--- pp.220-221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모든 현재는 과거의 유토피아였다. 가령 노예제사회에서 볼 때 근대 시민사회는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랜 시간을 통해 성취되었다. 이런 점에서 유토피아는 앞으로 도래할 그 무엇이다. 그것은 다가오는 현재다. 그러나 현실이 된 유토피아는 다시 결핍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또 다른 유토피아가 결핍의 현실이 된 유토피아를 되비추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유토피아가 실현되어온 역사이고, 사라진 역사다. 유토피아는 항상 현실이 되고 현실 속에서 사라지며, 사라짐과 동시에 또 다른 유토피아를 만들어낸다.
--- p.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