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테크닉 inhibition(자제심)> 연습 'NO'하기
inhibition(자제심) 연습을 위해
평소의 움직임뿐만이 아니라 주변 대상에 대한 모든 내적 반응들에 대해서도 'NO'하는 연습을 했다.
신체적 움직임과 내적 반응이라는 이분화된 표현 자체가 알렉산더테크닉에서는 모순일 수도 있겠으나
수련과정의 의미로 쓰고자 한다.
처음에 드는 생각들을 다 'NO'하라고 했을 때 마음의 거부감이 먼저 들었다.
삶의 모든 것을 YES하라고 배워왔는데 이제는 NO를 하라니
삶을 부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삶을 거부하고 내 속으로 숨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연습해보라고 했으니 해야지란 생각으로 해보았다.
우선,
생각은 연결되어 있고 그 에너지를 서로가 공유한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우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입으로 말해도 몸이 진실을 말해준다.
나아가서 그 사람의 생각은 주변에 영향을 미친다.
내가 이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파장을 형성하고 나와 주위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가 하는 생각이 나와 주변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NO'를 하면 내 생각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우리는 알수 없다.
오직 'NO'라고 함으로써 대상을 판단하고 대상에 대해서 에너지를 쓰는 것을 막아준다.
따라서 대상을 대상 그대로 두게 하고 나를 나 그대로 존재하게 할 수 있다.
타인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려면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나 애씀보다는 내가 나로서 존재하고 비어있는 것이 중요하다.
선과 악이 있다면 공으로 존재하는 것이 선일것이다.
좋은 일과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비어있는 존재로 있는게 선일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NO"라는 것은 세상에서 선을 행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보여질 수도 있다.
내가 대상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 'NO'하고 잠시 기다렸을 때 나에게 공간을 주고 타인에게도 공간을 준다는 생각을 했다.
달라이 라마는 '행복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잠시 머뭄에 대해서 만족하는 것'이라고 했다.
'NO'는 나와 잠시 머물게 해주는 일종의 장치라는 생각이 든다.
'NO'는 실타래를 칼로 베는 것과 같다.
우리의 여러 가지 심리적, 육체적 혹은 영적인 경험과 기억에 의해서 반응패턴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각종 테라피에서 이를 자각하기 위한 과정으로 반응을 다루고 자극을 다룬다.
이어서 과거의 기억을 찾아가고 이미지를 통해 나를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자각의 과정이 훌륭하지만 계속해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을 자주 본다.
내가 내 패턴의 원인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극이 들어올 때 그에 따른 반응을 자제할 수 없다.
똑같은 반응을 하면서 내가 이래서 이런것이라고 더 자세히 이야기한다.
여기서 'NO"는 그 모든 과정을 SKIP해준다.
심리적인 자각과정은 중요하지만 자칫하면 MIND GAME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과정인지 보기 이전에 'NO"를 외치고 몸으로 돌아와 시간을 줌으로써
몸이 본디 가지고 있는 회복력을 통해서 자신를 찾아간다.
얽힌 실타래를 하나하나 찾아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극에 대한 반응을 'NO'함으로써 우리는 알렉산더가 그랬듯이 매듭을 잘라버릴 수 있지 않을까?
'NO'는 나의 일과 너의 일을 구별하게 해준다.
사랑을 하면서 혹은 친구를 만나면서 혹은 가족관계 속에서
우린 너와 나의 일을 구별하는 것이 힘들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수련하고 노력하지만 아직도 힘든 것이 나의 현상태다.
그래서 특히 'NO"는 큰 힘이 되었다.
습관적인 이끌림에 대해서 혹은 습관적인 휘둘림에 대해서 이를 바라보고 기다릴 수 있게 해준다.
바라만 보면 된다고 배웠다.
그런데 'NO'는 바라보는 자각이후에 들어가는 방편이다.
자각이 없다면 'NO'를 할 수 없다.
바라보고 알아차림이 있어야 그것에 대해서 'NO'를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라보기만 하고 동일시되지 않으려고 하지만 이미 내가 반응을 한 경우가 있었다.
'NO'는 구체적인 방편을 제시해준다.
'NO'를 생각하는 타이밍의 중요성을 생각해보았다.
이미 반응한 것에 대해선 'NO'할 수 없다.
그것은 흘러가야하고 우리는 알아차리고 동일시되기 전의 과정에서만 'NO'를 할 수 있다.
알아차림이 깊어질수록 'NO'를 더 빨리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그 알아차림이 빨리 일어날수록 우리는 반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NO'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준다.
여기서 우리는 동일시라는 습관을 피할 수 있다.
'NO'가 반응에서 멀어지고 자극에 대한 알아차림에 더 가까워지면 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의식의 공간을 가지게 되고
습관적인 반응으로부터 더 많이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얼마나 많은 판단을 하고 살았는지 'NO'가 알게 해주었다.
수 많은 판단을 하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살았는데
장난같이 시작한 무조건적인 'NO'는 내가 주변 대상에 대해 얼마나 많은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나무는 나무, 여자는 여자 그 안에 많은 고정된 관념이 있다.
실제로 고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무도 변하고 돌도 변하고 여자도 변한다.
오랜 친구도 그때의 친구가 아니고 오늘의 친구다.
무조건적인 'NO'경험은 이런 고정된 사고에 대해 바라볼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주었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
마음은 늘 과거와 미래에 머물지만 몸은 현재에 속한다.
에고는 살아남기 위해 몸을 미래와 과거로 끌고 간다.
마음 홀로 살아남을 수가 없기에 몸을 유혹해서 끌고 간다.
어떤 목적지에 가서 뭔가 하려고 하면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이미 그곳에 가서 성취하고 있다.
이때 'NO'를 외친다.
'NO'는 마음의 관성을 끊고 몸으로 돌아오게 한다.
몸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지금 이 순간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은 고정된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현재 진행형이다.
모든 것이 현재 진행형이라면 우리는 판단을 할 수 없다.
판단이라는 것은 고정된 것에 대한 것이고,
흘러가는 것에 대한 판단은 할 수 없기때문이다.
판단이 없을 때 현재에 있을 수 있고
현재에 있을 때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있다.
판단할 수 없는 현재 진행형 속에서 'NON-DOING'이 나오는 것 같다.
진행형이란 흐름 그 판단할 수 없는 현재 속에 나를 맡길 때 non-doing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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