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제 25차 세계총회가 태국 파타야에서 열렸고 2016년 11월말에 끝났습니다. 수도회원들에게 보내는 총회 메시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상처에 손을 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주님이요 하느님이라고
선포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총회 피정을 도와주셨던 필리핀 마닐라 대교구의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추기경님의 강의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이 총회 메시지는 모두 8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각 부분마다 그 제목이 있습니다. 영성센터에서는 이 8가지를 ONE BODY 의 각 주제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 중 첫째 주제는 '세상의 상처에 주목하기'입니다.
상처받은 세상과의 연대
오늘날의 세상을 자세히 바라보았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세상은 엄청나게 발전했고 기술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했는데도, 이 세상은 여전히 고통과 아픔을 지니고 있다.' 세상의 상처는 여러 영역에서 드러납니다. 정치, 가정, 독신자들의 삶, 환경보호, 그리고 교회도 이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선교사인 우리들은 상처받은 세상과 연대하여 그의 울부짖음에 응답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말이지만, 그와 동시에 매우 도전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고통받는 세상과 연대하기 위하여, 우리는 비현실적이고 감성적인 결론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종류의 한가로운 상상들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위대한 생각들이 많이 있었지만 아무런 영감도 주지 못한 채 결국 환상으로 끝나 버려 우리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까? 연대야말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입니다.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 또는 불만족과 가난으로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사람, 형제, 평신도 협력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상처들은 어떻게 치유받을 수 있겠습니까? 치유가 가능할까요?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요한 복음 20장에 보면 토마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매우 힘들고 드라마틱한 치료법을 통해서 그는 치유를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당신이 수난과 십자가
죽음으로 얻은 상처에 손을 대게 하십니다. 이것은 분명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일은 성경에서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고백을 이끌어 냈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스가 주님의 상처에 손을 대지 않았다면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잘 알지는 못하겠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상처에 손을 댔기 때문에 그가 그분을 믿게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주님은 상처받은 모든 곳과 상처 받은 모든 사람들 안에 현존하십니다. 거기에서 주님을 만날 때에만 우리는
그 신비의 깊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고통 받고 있는 이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상처를 만집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처도
치유받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1베드 2,24).”
상처받은 세상을 위해 “준비된 해답(ready
solutions)”은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서 우리만의 방식이나 수단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상대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경청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우리의 제일 첫째 임무입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그분이시고 상처를 치유하시는 분도 그분이십니다. 어쩌면 그분은 치유가 필요한 이들을
위하여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들을 치유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다 해도 여전히 치유하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그분은 치유가 필요한 사람과 치유행위를 하는 사람 둘 모두의 마음에 대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여행을 함께 하고 있는 우리 동료들인 공동체 형제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은
의지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자주 우리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고 상처 받은 사람들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가장 소외된 사람들, 특별히 우리가 파견되는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들이 던지는 도전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에게 치유받읍시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서 그들을
도와주고 편하게 해줍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바꾸어 줄 수 없지만,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그들을 치유할 수 있는 어떤 곳으로
데려갈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곳은 그들의 존엄성입니다(회헌 43조 참조, 열린 공동체)
오늘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우리 선교사들이나 그 밖의 교회사람들에게서 자주 듣습니다. 우리 선배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우리 성인들과 복자들(이번 달에는 요한 노이먼 성인과 피터 돈더르 복자)의 삶에 대해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그 때도 쉽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상처받은 사람들이 빛과 그늘 속에서 이 땅위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오늘날 세속화된 세상을 싫어하고 비난하면서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분명히 외견상으로 이 “나쁜 세상” 안에서 도전을 받아들이고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언제나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게 한다면 세상은 변하기 시작할 것입니다(회헌 51 참조).
우리의 모든 신학적 성찰, 특별히 윤리신학과 연관된 것들을 우리와 이웃들이 함께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는데 적용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많은 윤리 도덕적인 문제들에 대해 즉각적인 해답을 얻는 것은 쉽지 않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이런 것들일 겁니다. 가야할 길의 방향을 알려주고, 격려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단지 설교로만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직접 관여하면서 그들을 돕는 것입니다(회헌 19; 총회칙 023-024).
하느님의 말씀
우리가 선택한 요한 복음 20,24-29 절로 다시 돌아갑시다.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의심에서 믿음으로 돌아서는 토마스를 보여줍니다. 그가 당신의 상처에 손을 대게 함으로써 토마스를 변하게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으로
끝을 맺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개인과 공동체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까? 혹시 구속주회원인 우리도 토마스가
예수님의 진짜 상처에 손을 댔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될까요?
우리의 우물에서 마시기
1월에 우리는 두 명의 우리 선배 형제들을
기억했습니다. 요한 노이먼 성인과 피터 돈더스 복자입니다. 그분들은 그들의 삶으로 이웃들 안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상처와 하나가 됐는지 증언했습니다. 그들은 동시대 사람이었는데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완전히 다른 문화 속에서 증언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두 분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조용하게 그리고 평범한
방식으로 그들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를 원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성공적으로” 세상의 상처에 주목할 수 있는 비밀인가 봅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일하시게 했고, 주님이 지닌 연민의 도구가 되도록
했습니다. 그들의 삶과 영성에 대해 잠시 들어봅시다.
베네딕도 15세께서 말씀하신 요한 노이먼 성인의 덕행들에 대한 교령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활동적인 한 사람의 공덕은 그가 행한
일들의 숫자보다는 그것들의 완전함과 견고함으로 평가된다. 왜냐하면 진정한 활동은 단지 소음이 되지 않는데, 그것은 하루만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에 그것 자체를 펼치는 것이고, 과거의 열매이며 미래를 위한 좋은
씨앗이다. 가경자 노이먼이 행한 것들을 특징짓는 것들이 바로 그것들이 아니겠는가?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한다면 아무도
공경하올 우리 하느님의 종이 행한 그 일들의 단순성이 그가 활동의 놀라운 모범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음은 베드로 던더스 복자에 관한 것인데, 파브리치아노 페레로 신부, C.Ss.R. 가 그에 관해 쓴 짧은 전기입니다. “우리 복되신 베드로는 화려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영웅적인 덕행과 인간적인 약점을
지닌 조용하고 단순한 선교사로서 라틴 아메리카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건설하러 갔다. 그의 역할은 오늘날 깊은 인상을 남길만큼 독특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가톨리시즘의 변방에 하느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온 삶을 봉헌한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을 진정으로 대표하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그의 전기는 역사를 쓰는데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려는 이들에게는 고통이다. 왜냐하면 그의 삶과 그가 행한 하찮은
일들에서 매우 특별한 어떤 것을 찾는 것이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그는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교회의 시각에서 후진 국가에서 매일 단순히 복음에 충실하게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건설하는 다른 이들 안에 묻혀 있었다. 돈더스 같은 사람은 세상의 주목을 거의 받지 않는다. 그것들 안에 매우 특별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평범한 생활을 완전하고 영웅적으로 해내는 것이고, 모든 것을 완전하게 잘 하는 것이다.”
우리 선배 형제들의 “조용한” 증언을 생각하며,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선교사 성소를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님께 맡겨 드립시다. 그분은 조용히 사셨지만, 거기에 그분의 삶을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곰곰히 생각하고 묵상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게 당신의 아드님께 청했습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