進士公派.
도동묘단비명(道洞墓壇碑銘).
귀태복(歸太僕)이 일찍이 말하기를 『예의(禮儀)의 정미(精微)함을 말하기란 실로 어려운 것이다. 죽어가는 것을 죽게 한다면 이는 불인(不仁)한 것이어서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요. 죽어가는 것을 살게 한다면 이 또한 지혜롭지 못한 일이어서 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하였다.
후세(後世) 사람들이 묘사(墓事)에 더욱 힘쓰고 잇다는 것 어찌 고례(古禮)가 변(變)하여서 인정(人情)에 접근(接近)한 일이 아니랴.
대개 예(禮)란 법(法)을 유수(遺守)하여 그것을 넘을 수 없는 일이 잇고 또한 인정(人情)으로 말미암아 의(義)로이 일으켜도 될 수 있는 것이 있다. 때문에 주(周)나라에는 봉토(封土)의 법도(法度)가 있고 진(秦)나라의 풍속(風俗)에는 상몽(上冡)의 의예(儀禮)가 있었으니 이것이 후세(後世)에 묘제(墓祭)의 람상(濫觴)이 되었다. 대저 인간(人間)의 행실(行實)에 효도(孝道)보다도 더 큰 것이 없고 효는 또 그 조상(祖上)을 추모(追慕)하고 그 본원(本源)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누세(累世) 동안 선대(先代)의 차서(次序)를 분간(分揀)할 수 없는 경우에 어떻게 하여야만 춘추상우(春秋霜雨)에 외로운 고혼(孤魂)을 위로할 것인가 묘소(墓所)를 바라보고 제단(祭壇)을 포설(布設)하고 열위(列位)를 함께 제사(祭祀)지냄은 실(實)로 고인(古人)의 뜻에 어긋나지 아니함에 우리나라 성현(聖賢)들이 그렇게 하여 온 바다.
옛 예절(禮節)이 변(變)하여 인정(人情)에 접근(接近)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군자(君子)의 도(道)란 오직 시의(時宜)에 맞아야 된다는 거와 같은 것을 말한 것이다.
하동(河東) 정씨(鄭氏)는 경주(慶州)로부터 갈리었는데 휘(諱) 도정(道正) 이후(以後)에 석숭(碩崇)이 일세조(一世祖)가 되어 오세(五世)를 전(傳)해 오다가 휘 (諱) 국교(國僑)에 이르러서는 고려(高麗) 충렬왕조(忠烈王朝)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육세(六世) 생원(生員) 휘(諱) 양손(良孫) 부자(父子)는 진주읍지(晉州邑誌)와 연안(蓮案)에 그 기록(記錄)이 보이며, 칠세(七世) 휘(諱) 윤종(允從)은 벼슬이 사랑(仕郞)이었다.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팔세(八世) 휘(諱) 효부(孝孚), 구세(九世) 이은(以誾)은 진사(進士)를 하였는데 휘(諱) 국교(國僑)로부터 휘(諱) 이은(以誾)에 이르기 까지 그들의 분묘(墳墓)가 다 진주(晉州)의 왼편 도동면(道洞面) 후동(後洞)에 있다. 위로 삼분(三墳)은 당시 국예(國禮)에 따라 치묘(治墓)한 까닭에 전석(磚石)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봉토(封土)가 헐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 고위(考位)인지 어느 것이 비위(妣位)인지 알지 못하고 있는 까닭에 제전시(祭奠時)에는 다만 삼헌무축(三獻無祝)으로 규정(規程)지어 시행(施行)하여 옴이 벌써 수백년(數百年)을 지내 왔다. 근세(近世)에 와서 후손(後孫) 필혁씨(弼赫氏)가 종중문노(宗中門老)와 의논(議論)하고 설단(設壇)하여 제향(祭享)할 것을 준비코자했으나 합의(合議)를 보지 못하였고 그 아들 재화(在華)가 모모(某某) 문노(門老)의 뜻을 받들어 이 설다(設壇)의 역사(役事)를 다시 시작(始作)하여 제단(祭壇)에 비석(碑石)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나에게 사실(事實)을 기록(記錄)한 글을 써 줄 것을 거듭 부탁하기에 이글을 쓰게 된다.
아 옛날 기송(杞宋)의 무징(無徵)함을 성인(聖人)도 한탄한 바 있기는 하지만 비록 말 잘하고 유능(有能)한 선비일지라도 갑자기는 어찌 할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비재멸학(菲才滅學)한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여기에 참여(叅與)하여 성문(聲聞)하게할 것이랴,
생각하여 보면 항재(恒齋)유운(柳雲)이 찬(撰)한 진사공(進士公) 묘갈문(墓碣文)에 『비봉산(飛鳳山) 동쪽 하늘에 진선(眞仙)이 학(鶴)을 타고 있으니 어떤 사람이 공(公)인지를 자세히 알 수 없도다.』 고 하였으니 노인(老人)들로부터 전해온 말씀이 없고 또 증거(證據)될 문헌(文獻)도 없으니 다만 의문을 전할 뿐이로되 향화(香火)를 그치게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단(壇)을 조상(祖上)에게 제향(祭享)함은 진실로 본원(本源)을 찾는 인정에게 하는 일이니 대저 의심하여 무엇 하랴 이에 명(銘)을 지어 붙이노니,
하동(河東)은 정씨(鄭氏)의 고향
여기 대(代)를 이어 번창 하노라
청주(菁州)의 저 언덕은
그들의 조영(祖靈)이 잠들고 있는 곳
잇단 병화(兵火)로 하여
실전(失傳)의 괴로움이 있구나,
후손(後孫)들은 추원(追遠)의 뜻 깊어
이에 한 제단(祭壇)을 마련하였다네,
제단(祭壇)은 높아 우뚝하고
감혈(坎穴)은 깊어 은덕(隱德) 있어라
높은 제단(祭壇) 깊은 감혈(坎穴)
모다 음양(陰陽)의 조화(造化) 깃들었네,
밖으로 법도(法度)에 따르고
안으로 정성(精誠)을 다하도다.
비록 예서(禮書)에는 없다 하여도
인정(人情)은 그렇게 만들게 했네,
조영(祖靈)은 즐거운 듯 여기 머무니
세상(世上)이 다 명천(明薦)한일
영원(永遠)하리라.
계유(癸酉) 십일월(十一月) 상한(上澣) 영가(永嘉) 권도용(權道溶)은 삼가 쓰다.
도봉사기(道峯舍記).
정씨(鄭氏)가 저동(猪洞)에 살 때에 모신 것이다. 정씨(鄭氏)는 일두(一蠹) 문헌공(文獻公)에게 문친(門親)이 되며 또 할아버지 및 손자가 잇달아 진사(進士)로 뽑혀서 인격(人格)과 학문(學文)의 명예를 올려 세운지 매우 오래되었다.
그러나 정씨(鄭氏)가 저동(猪洞)을 떠 난지 이미 백년이 지났으니 세간(世間)의 성쇠(盛衰)와 인간(人間)의 모임과 흐트러짐의 까닭이 슬퍼할만 하구나, 정씨(鄭氏)가 민국(民國) 정미년(丁未年) 겨울에 선묘에서 제사 드리며 서로 걱정하기를 『선묘(先墓)가 고허(故墟)로 허물어지지 않은 것은 하늘의 보살핌이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집 한 칸을 마련하여 제물을 깨끗하게 하고 조상의 신명(神明)을 받들고 회합(會合)이 쉽고 의(義)가 두텁고 화목하게 하여 후손의 본지를 결속함이 마땅하다.』 고 했다. 그리하여 약간의 돈을 걷어 재상(재상) 영현군(榮鉉君)에게 맡겨서 처리하게 하였다. 이듬해 봄에 영현군(榮鉉君)은 그것으로써 선산(先山)아래에 삼간집을 지어 『도봉사(道峯舍)』라 하였다.
이는 도(道) 자(字)가 저(猪)자 뜻의 머리 음(音)으로 동네 사람들이 동명(洞名)을 고쳐 부르고 있음으로 인해서 취해진 것이다. 이미 역사를 끝내고 재상(在相) 영현군(榮鉉君)이 부노(父老)의 명(命)을 받고 나에게 와서 기문을 청하니 나는 이것이 정시(鄭氏)의 쇠(衰)함을 일으켜 세우고 흩어짐을 규합해 모음을 꾀하는 기틀이 됨을 기쁘게 여겨 그 청(請)을 받아들였다. 이는 정씨(鄭氏)의 감분분려(感憤奮勵)하는 마음과 여러 어려움 속에서 집을 마련한 공로를 후세에 알리고 치하하는 바이요. 그 집의 크고 작음이나 외형에 대해서는 논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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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戊申) 사월(四月) 일(日) 재령인(載寧人) 이일해(李一海) 기(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