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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어느 곳에서 은유쌤의 글을 함께 읽고 있는 학생입니다. 이 카페에 가입한 지는 몇 달 된거 같은데 오랜만에 다시 접속했네요. 처음 가입할 때는 이 카페에 나의 글을 자주 투고해야지 생각했었는데 잘 지키지 못했네요. 애초에 바빠서 글조차 자주 쓰지 못했습니다. 반성해야할 부분입니다.
제 글쓰기의 시작과 과정에 있어서 은유쌤의 글과 존재는 의미가 깊습니다. 우연하게 구매하게 된 「쓰기의 말들」 책을 읽으며 글쓰기의 새로운 측면을 알게 됐어요. 형식적으로도 은유쌤의 문체가 참 마음에 들어 글쓰기의 교본으로「쓰기의 말들」을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하루에 한 페이지씩 필사하면서요.
그렇게 공부하며 쓴 글로 이번에 상을 받았습니다. 제 마음속에 글쓰기 첫 스승인 은유쌤께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어지간해야지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지 못하여 이렇게 부끄럽게 제 글을 올립니다!ㅎㅎ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잘 해보자 생각하며 공부할 때는 마냥 은유쌤의 문체와 스타일을 쫒으려 했지만 지금은 저만의 문체와 스타일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너그럽게 읽어주세요
제목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게 된 경험이 있는가? 아니, 바닥에 달라붙은 더러운 흙을 업신여기는 눈빛으로 매일같이 바라보다가 어느 날, 그 자리에 찾아와 이번에는 깨끗이 씻은 두 손을 모아 소중하게 흙을 퍼 담고 눈높이까지 올린 후에 뭐라 말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진 거 같기도 하고 증오가 서린 시선 같으면서도 후회와 안심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듯한 눈으로 흙을 바라보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 사람에 관해 이야기 하고 싶다.
고등학교 시절, 성적을 많이 올리고 싶었던 나는 수험서 다독왕이었다. 수학 문제 좀 풀어보려고 학교 앞 문구점과 서점을 기웃거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만한 쎈, RPM, 개념 원리 등을 학기마다 샀다. 한번 끝 페이지를 찍은 책은 내일 다시 첫 페이지로 펼쳐졌다. 애초에 책의 원본 상태를 유지하려고 문제를 이면지에다 풀고 채점했다. 그렇게 한 책을 여섯 일곱 번 반복했다. 그쯤 되면 문제만 봐도 책 어디쯤 그 문제가 있었는지 눈 감고 페이지를 열어 재칠 수 있게 된다. 비단 수학뿐만이 아니다. 영어는 이비에스에서 출판된 문제집의 지문 전체를 달달 외웠다. 첫 문장만 보면 글의 내용이 모두 떠올랐다. 머리가 안 좋아서 그런지 그렇게 되기까지 한 자릿수의 회독으로는 어림없었다. 탐구 과목은 선생님이 칠판에 필기 해주시는 내용, 마찬가지로 교과서 반복 회독, 완자나 우공비 문제집 풀이의 삼위일체가 되어야 했다. 국어 과목도 비슷하다. 작품을 읽으면서 선생님이 밑줄 친 내용, 주석을 단 부분, 작품이 만들어진 내적 외적 배경 등을 달달 외우고 시중에 출판된 내신 문제집을 수학 문제집처럼 풀면 된다.
뭐라고? 내신은 알겠으니 수능 준비할 땐 어떻게 하냐고? 그걸 듣는다면 대한민국 학생들의 독서량이 OECD 평균에 현저히 못 미친다는 뉴스 기사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단번에 알게 될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선거를 앞둔 의원이 계시는가? 그럼 "독서는 교양인의 지름길! 아이들이 책 읽는 문화를 장려하겠습니다! 내년도 독서량 통계치로 확실히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공약을 세운 뒤 독서량 조사 항목에 문제집을 슬며시 넣어보라. 조사 결과가 나오면 세계가 깜짝 놀라고 미국은 한국의 교육 체제를 당장 본받아야 한다고 다시 한번 말할 것이다.
나의 24시간은 그렇게 돌아갔다. 매 순간이 목적 지향적이고 실체가 있어야 한다. 그 실체란 대개 "눈에 보이는 변화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틈새가 없는 시간 속에서 문제집이 아닌 책을 붙잡고 있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좋아는 했다. 세상에 호기심이 많고 다양한 것을 배우고 싶은 욕심이 컸던 터라 자주 도서관을 들렀고 읽고 싶은 책을 리스트화했다. 그 리스트 속에는 『경영학 콘서트』, 『17살 경제학 플러스』, 『성공하는 사람들의 99가지 화술』, 『정의란 무엇인가』, 『엘론 머스크의 대담한 도전』, 『풍력 발전의 원리』 같은 책들이 있었다.
리스트에 있는 책들을 모두 읽지는 못했지만 읽으려고 노력했다.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목차화 되어 있고 거짓말이 아닌 사실만이 적시되어 있다는 점이 좋았다. 책 속의 한 줄을 읽으면 내가 세상에서 아는 것이 한 줄 만큼 많아지는 기분이 좋았다. 나는 책을 생각하면 마음이 부푸는 게 있었다. 인류 문명의 발전이 끊어지지 않도록 연결해주는 보이지 않는 체인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나는 가슴이 벅찼다. 고대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불이 나 서적이 전소하여 인류 발전이 수 백 년이나 늦어졌다는 걸 알았을 때는, 아쉬워서 그날 잠을 설쳤다. 책을 쌓아둔 책장은 선대 학자들이 부단히 쌓아 올린 지적 탐구 물을 손쉽게 훔칠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사실 전달이 깔끔하고 주장과 근거가 잘 뒷받침된 그 책들은 내게 이성과 논리를 연습시켰다. 나에겐 책을 읽는 이유가 명확했고, 그렇지 않은 책은, 나에게 책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문학을 혐오했다.
"나는 소설책을 왜 읽는지 모르겠더라" 실제로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친구가 소설을 읽고 있는 와중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이 말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라 그럴 것이다. 사실이 아닌 지어낸 이야기를 무슨 소용으로 읽는 것일까. 그거 다 픽션이잖아. 우리말로는 거짓말. "읽어서 어따 쓸려고?" 그 당시 나는 소설을 무시한 것뿐만 아니라 소설을 읽는 그 친구도, 솔직히 말하자면, 무시했다. 뭐가 유용한 것인지 판별하지 못하는 그의 메타인지 능력을 의심했다.
나도 물론 소설책을 읽어본 적이 있다. 고등학생 시절 국어 수업에서 배우는 작품 말고 내가 주체적으로 손을 뻗어 읽어본 소설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1』이었다. 무슨 계기로 읽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베르베르 책을 좋아하는 친구의 강한 추천에 읽게 되었던 것 같다. 어땠냐고? 무지 재밌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미카엘 팽송과 함께 신들의 투닥임을 실컷 구경하고 돌아온 나의 현실은 바뀐 게 없었다. 게임을 지나치게 오래 한 후 몰려드는 자괴감과 비슷했다. 나는 책을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 『신-1』을 다 읽는데 일주일 넘게 걸렸던 거로 기억한다. 나는 시간 낭비에 반성했고 『신-2』는 절대 들춰보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 어머니가 홈쇼핑으로 국내, 국외 고전문학 전집을 사놓은 신 적이 있었다. 책 읽는 걸 좋아하는 내게 어머니가 홈쇼핑에서 문학 전집을 파는 걸 보시곤,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충동적으로 구매하신 것 같다. 부족한 살림에 20만 원치 책을 한 번에 구입하는 건 이성적인 사고로는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며칠 후 책이 무거운 박스로 가득 담겨 도착했다. 호기심을 갖고 책을 펼쳐본 나는 그다지 읽어보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고전 속 이야기들은, 다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당최 이해하기 힘들었다. 『신-1』은 신기한 게 투성이인 판타지 세계로 날 데려가기라도 했는데 고전은 마냥 지루한 이야기만 떠들어대는 듯했다. 책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할지 대중잡지 못했다. 흐뭇해하시는 어머니께 차마 아쉬운 소리를 할 수는 없어 나는 간신히 말했다. "책이 많으니 천천히 읽어볼게요.“
언젠가 나는 『노인과 바다』 책을 책장에서 꺼내 들었다. 인터넷에서 『노인과 바다』가 명작이라는 말을 듣고 홧김에 그랬다. 지금은 고전이 좀 잘 읽힐까 싶어서 오랜만에 읽어보려고 했지만 나는 그대로였다. 바다에 낚싯배를 타고 나간 노인이 청새치를 어렵게 잡고 복귀하다가 상어에게 청새치를 빼앗겨 허탈한 이야기. 내겐 그뿐이었다. 그래서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말이 뭔지, 교훈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낚시는 역시 템 빨"이라는 교훈을 그나마 배워볼 수 있을까? 비문학이라면 내게 확실하게 말해줄 텐데. 이런 게 뭐가 명작이라고.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책들은 점점 먼지만이 반겼다.
21살, 대학을 타지로 가게 되면서 나는 자취를 시작했다. 서울을 동경하던 나는 그 지역 주변으로 간다는 것에 들떴다. 대구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버스에 내 몸을 실었다. 버스의 시동 음이 터졌다. "트르릉". 그것은 내 서울 생활 2년의 첫 시작을 알리는 출발 신호였다. 새로운 환경의 변화가 내게로 다가왔고,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만남에 내 몸을 던졌다. 2017년 1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수많은 연과 일과 돈과 말과 술과 숨이 내 몸을 통과했다. 어떤 것은 내 몸에 잡아둘 수 있었고 어떤 것은 내 몸에서 배출해냈다. 마찬가지로 어떤 것은 곁에 두고 싶어도 멀어져만 갔고, 어떤 것은 제발 꺼지라고 빌어도 기어코 내 머리에 단단히 자리 잡았다. 그 왜, 정수기 필터도 시간이 지나 제 용량에서 역할을 다 하면 교체해주지 않나. 그거랑 비슷한 느낌일까. 꽉 막힌 필터처럼 내 몸의 순환 작용이 버거워질 때,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나는 줄곧 '타자를 위한' 글을 썼다. 학창 시절에는 독후감 쓰기, 수시 자기소개서, 반성문 등을 써댔다. 서울을 올라오고 나서는 리포트, 이력서 자기소개서, 사업 계획서, PPT 발표 대본, 기획서 등을 써댔다. 하지만 2018년 10월 즈음부터 나는 나를 위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생존의 글쓰기'. 사무치게 휘모는 세상과 사람들 속에서 나의 존재가 흩어지지 않도록 동여매기 위해 글을 썼다. 이런 일이 있었고 저런 감정을 느꼈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둥 밖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를 종이에다가 했다. 아직 나는 글쓰기가 내 심리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그 인과관계를 알지 못한다. 참 모르게도,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다. 누가 내 글을 보고 나를 위로해주길 바라는 게 아니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마주한 대상을 직면하며 한 문장 한 문장 글로 빚어 나감에 안식감을 느낄 뿐이다. 글을 쓰면서 그 대상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에 감흥을 느끼는 것일까? 모르겠다. 그리 거창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이 일기다. 그러다 하나의 생각을 길게 글로 쓰며 밀고 나가면, 이번엔 잡생각 글이구나 싶다. 그러곤 내 비공개 블로그에 쌓아둔다. 하루가 지나고 내일이 오고, 어느 순간 블로그에 많은 글이 퇴적되어 있음을 보면 지나온 시절이 만져지는 무언가로 체감된다. 그러나 그 당시까지도 나는 이게 문학과 닿아있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내 삶을 쓰는 일이라 해도, 글 쓰는 건 쉽지 않았다. 머릿속에 안개처럼 뿌옇게 흐린 감정의 형체를 밝혀내지 못하면 글의 첫 문장이 안 써진다. 머릿속에 레고 블록처럼 이리저리 산재해있는 생각의 파편들을 적절한 조합으로 배열하지 못하면 글을 꾸준히 밀고 나가지 못한다. 솔직한 마음을 드러낸 문장은 독자를 속이려는 약은 마음을 내려놓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상임을 그제야 알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풍부한 어휘를 손아귀에 쥐고 아름다운 글과 운율이 느껴지는 글을 빚어내는 건, 지금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진작에 인정했다. 백 번 보고 듣는 것이 한번 직접 해보는 것보다 확실히 못 하구나.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어서면 느끼게 되는 압도할만한 양의 그 수많은 책이 그냥 써진 게 아님을 깨달았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자기 삶 고증의 연대. 거기에 참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좋은 글과
문장을 써낼 수 있는 방법론을 소개해주는 책을 찾아보고 구매했다. 방법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지 선별하여 인터넷으로 여러 책을 주문했다. 정확한 표적지를 겨눌 수 있는 방법론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다시금 비문학으로의 회귀인가? 아니었다. 내 손에 들린 책은 지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지만, 글자를 읽는 내 눈은 그 글자를 쓰는 작가의 손에 패인 주름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머릿속 지식을 백지에 한 줄 추가하는 건 그 지식이 경험으로 깊숙하게 배여야만 가능하단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무언가 흔적을 남기려는 사람이 겪는 고단함을 알기 때문에 책 속 글자 한 줄 한 줄을 무겁게 무겁게 읽었다.
그 사람의 말을 정답으로 받들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의 세계를 인정하는 건 다른 누군가의 세계도 인정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글쓰기라고 해서 다를까. 내 색깔대로 문장을 구성 짓고 내 의도대로 띄어쓰 기. 숨 쉬는 내 몸에서 우러나오는데 누가 틀렸다고 할 수 있겠어. 이제 알겠다. 이런 게 문학인가보다. 내가 문학이라 부르면 그건 문학이 된다.
문학을 혐오하던 청년은 요즘 군대에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소설도 쓰고 초등학생 수준의 시도 쓴다. 전역하면 그림도 배워볼까 싶다. 1년 전만 해도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것들이었는데 언제 다 나에게로 왔나. 이름을 부른다는 건 참 커다란 사건임을 새삼 깨닫는다.
첫댓글 와. 축하드립니다. 상을 받은 것도 축하할 일이지만 글쓰기와 친구가 되신 걸 더 축하드립니다. 조금씩 찬찬히 써간다면 더 나은 삶이 되리라 생각해요. 응원합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