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거짓말 / 박영보
“우리 회사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신규 채용 계획이 없습니다. 보내주신 이력서는 잘 보관해 두었다가 해당분야에서 충원이 필요하게 되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사십여 년 전 미국에 첫발을 디디면서 구직을 위해 보낸 나의 편지와 이력서에 대하여 보내온 답신 내용이다. 구인광고나 취업 정보를 통해 보낸 것이 아니고 전화번호부에 수록돼있는 업체에서 임의로 선택한 주소로 보낸 나의 편지였다. 같은 내용의 편지를 수십 회사에 보냈지만 ‘와달라는 회사’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거의 빠짐없이 답장을 보내왔다. 정말 충원 계획이 없어서였는지 별 것 아닌 내 이력서의 내용을 보고 나서 결정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보다 품격 있는 거절의 방법일 수도 있었을 게다. 그곳에서 만 삼 년을 지내오는 동안 그들의 말대로 충원계획이 있으니 와보라는 연락을 보내온 회사가 없었다는 것만 봐도 알만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들을 신뢰하고 그 아름다운 거짓말을 사랑한다.
어찌 보면 충원계획도 없는 회사에서 이런 원치도 않는 편지 한 장을 쓰레기 통에 버리지 않았다는 것만도 고마워 할 일이다. 짧은 몇 마디의 말 중에는 형식적인 말일지라도 내가 찾고 있는 일자리를 마련해 주지 못한다는데 대한 미안함과 아직 희망을 버리지 말라며 의기소침해 있는 나를 다독여 주기라도 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런 원치도 않는 편지는 편지에 대한 답장까지 써야 하는 일 거리를 안겨줬으니 그들의 귀한 시간까지 축내게 해준 셈이다. IT 시대에 살고 있는 요즈음에도 이런 식으로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지는 모르겠다. 이런 사소한 일들 하나 하나를 이렇게 성의 있게 ‘대꾸’를 해주는 회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직업을 찾기 위해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이런 행위가 그들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냥 무시(Ignore)해버리고 지나쳐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지나쳐버리지는 않았다. 부정적인 내용의 답장일지언정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미안함과 위로의 마음, 희망과 새로운 도전을 부추겨 주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다 보면 지난 날들이나 현재의 내 주변을 돌아다 보게 된다.
대화의 나눔. 이에는 항상 대화의 상대, 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전하는 말이 있으면 오는 말이 있고 질문이 있으면 답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정도는 이야깃거리가 되지도 않는다. 이는 일상 생활에서뿐 만이 아니라 비즈니스에서도 마찬가지다.
거래처로부터 구매를 위한 자료와 견적 등을 문의해온 내용에 대한 답을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가며 자료를 준비하여 보낸다. 시간적 한계성 때문에 그쪽의 의견과 진행 계획을 묻는 이 메일을 수 차례 보내도 아무런 대꾸가 없다가 여러 날 후에 구매를 하겠다고 연락이 왔을 때는 이미 다른 경쟁회사에게 빼앗겨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미리 연락을 나누며 서로의 입장이나 상황 설명이 있었다면 당장 계약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기회를 놓치지 않을 충분한 대비를 할 수도 있는 일을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로 생기는 손실은 없었을 것이다.
개인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생활상 무언가 정보를 필요로 하는 이에게 그 동안 그를 위해 찾게 된 정보를 이 메일로 보내 줘도 아무런 대꾸가 없는 경우가 많다. 메일이 제대로 전달 됐는지 의심이 가서 두 번 세 번을 보내도 역시 무응답이다. 비즈니스에서나 개인 생활에서도 소통이 없어 낭패를 겪는 일이 너무 많다. 자기가 찾던 정보를 스스로 찾게 되었거나 비즈니스에서도 다른 소스를 통해서 미리 확보를 했더라도 상대방이 궁금해 할 것이라는 것쯤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와 배려의 차원에서도 한번쯤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취업을 위해 보낸 나의 편지에 대한 답을 보내주었던 사십여 년 전의 그 회사들. 지금까지도 건재하며 계속 성장해가고 있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그들이 어찌 성장 발전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