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유혹이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끝은 어디일지. 호기심만으로 한가득 설렘을 안고 성큼 저만치 나서서는 문득 혼자임을 느끼게 하던. ‘외로움이란 이런 거야’라고 맨 처음 가르쳐주던 낯선 만남.
그것은 시작이었다.
보이지 않는 끝을 좇아, 홀로 걸으며 생각하고 추슬러야하는. 들어섰다는 것만으로 벌써 온갖 고민도 염려도 희망도 절망도 원망도 혼자 버텨내야하고, 기쁨도 슬픔도 혼자 견뎌내야 하는.
그것은 방랑이었다.
안간 데 없고 못간 데 없이, 쉼 없이 떠도는. 거센 바람에 격랑에 눈보라에 속절없이 흔들리고 흐트러지면서, 때로는 한줄기 환한 햇빛에 얼굴 들고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옷자락 여미기도 하던.
인생길. 그렇게 떠났었다. 아니, 그렇게 들어섰던 게지.
길은, 세상사는 사람 숫자 꼭 그만큼만 눈앞에 펼쳐져서 벋어나가 있었고, 저마다 제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갔다. 제각각의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길은 가고 오는 것이니까. 다만, 선택의 여지없는 이 길은 누구에게나 하나뿐인 길이었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는 그의 시 『가지 않은 길(The Roard Not Taken)』에서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 그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나는 한숨을 지으며 말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과연 그런 걸까?
시의 세계에서나 울리는 노랫소리로, 숲속에서 만난 그 길은 착시이거나 신기루처럼 아주 잠깐 두 갈래로 보였을 뿐이다. 그것은, 줄의 가운데를 접어잡고 두 끝을 내민 것과 같아서 어느 것을 잡아도 결국은 하나인 것. 가지 않은 길 가지 못한 길이란 있을 수 없으니, 미련이나 아쉬움, 후회 따위 무슨 소용?
묵묵히 길을 걷는다. 어떤 다른 길을 골라 걸었더라도 그 길이란 지금 걷고 있는 바로 이 길이라는 걸 마침내 깨닫기까지.
오솔길을 돌아 징검다리를 건너서 신작로로 들어서면 아스팔트길이 나오고, 인터체인지를 돌아 고속도로에 올라서면 길은 사통팔달이 된다.
길은 미래로 벋어있지만 과거로 거슬러 소통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길은 실존이니까. 나그네 길, 북망산천 가는 길이 나란히 가기도 한다. 마음의 길까지도 함께.
길을 가노라면 참 많은 것을 만난다. 꽃도 만나고 사람도 만나고 온갖 짐승도 만나면서, 짐승보다 못한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사람 보다 나은 짐승을 보게도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행여 짐승보다 못하다는 쪽으로 유유상종이란 눈치를 받지는 않도록 곱게 늙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살아왔어야 하는데. 나중까지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데 …
김구 선생은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디딘 발자국은 언젠가 뒷사람의 길이 된다.”고 강조하였다.
멀쩡한 보리밭에 길이 생기는 것도 그릇된 발자국 하나에서 비롯되니, 무슨 일에건 귀감이 되지 못하더라도 해악이 되게는 말아야 한다고,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하지를 말라”는 속담도 생겨났을 터이다.
하늘 길을 하루의 절반도 더 넘기며 날아서, 2주 전에 미국 뉴저지주 테나플라이의 딸네 집에 왔다. 조용히, 귀 좀 닫고 눈 좀 감고 가만히 있다가 브로드웨이에 나가 뮤지컬이나 한편 보고 내달쯤 돌아갈 계획이다.
가든 스테이트(Garden State) 라는 별칭을 가진 이곳 뉴저지는 동네가 그대로 숲이다. 날이 새면 먼저 나무 위에서는 온갖 새소리 들리고, 사람쯤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사슴가족이 대낮에도 골목길을 나와 어슬렁 걸음으로 찻길을 가로 지르는가 하면, 토끼가 마당의 잔디밭에 와서 제집 뜰인 양 하루 종일 귀를 쫑긋거리고, 다람쥐는 창턱에 올라앉아 방안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산책을 나가서 만나는 몇몇 이름 모를 녀석들은 낯설다고 외려 내게 눈을 멀뚱거린다. 이들과 더불어 숲길을 거닐다보면 하루해 넘기기가 잠깐이다.
생각에 잠기려면, 길 위에 나서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길은 호젓하면 더 좋다. 그저 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오래 걸을수록, 멀리 갈수록 생각은 두께를 더하고 깊이를 더해간다. 그 깊이를 따라 가라앉다보면 더러는, 길을 되짚어 돌아오기가 쉽지 않을 때도 있지만.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심오한 영감의 상태, 그 모든 것이 오랫동안 걷는 길 위에서 떠올랐다.”고(『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첫댓글 김구 선생은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디딘 발자국은 언젠가 뒷사람의 길이 된다.”고 강조하신 말씀을 저의 삶의 길로 지표로 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