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바람 / 박욱근
평생을 멀쩡하게 잘 살다가 귀밑머리에 흰 서리 내린 뒤 다른 사람에게 정신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한 사람만 보고 평생을 보내기에 억울한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평생 마주하던 모습을 부정하고 다른 이에게 눈을 돌리는 그런 일은 가까운 곳에서도 종종 보게 된다. 슬쩍 갔다 슬그머니 돌아오면 모르거니와, 그리되면 평온할 수 있었던 인생이 십중팔구 파탄이 난다.
사실 사람의 인생은 예행연습도 없이 한 번 살다 가면 끝이라, 저 만치 지난 뒤에는 뒤를 돌아보아도 이미 지난 길은 돌아갈 수 없다. 더도 말고 두 번만 살 수 있다면 두 번째 인생은 첫 번째의 그것보다는 훨씬 멋진 것이 될 것 같은데 또한 그리 할 수 없는 것이 삶의 섭리가 아닌가 한다.
한참을 살아온 삶을 어떻게든 한 번 더 만들어 보겠다고 시도하는 것, 특히 그것이 이성(異性)의 문제일 때 우리는 ‘늦바람’이 났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삶 가운데 어떤 부분을 포기한다는 공통점을 가진 것으로 늦게나마 다른 인생을 살아보려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길은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자각으로 비롯되기에 얼핏 바람과도 비슷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평생을 염원했지만 기회나 용기의 부재로 시작하지 못했던 일을 늦게나마 시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여러 분야에서 그런 일이 있기는 하겠지만 대체로 늦은 나이에 예술세계에 뛰어드는 것이 많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는 음악계 특히 작곡가로 이름을 널리 알린 분들을 여럿 들 수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작곡가로 삶의 방향을 바꾼 인물가운데는 그 전직 혹은 전공이 법률과 의학같이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길이었던 사람들이 특별히 많다.
사관학교를 나오고 군대생활을 몇 년 하다가 작곡가의 길로 뛰어든 무소르크스키의 경우는 예외로 해도 슈만은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다 20세에 자신의 길은 음악밖에 없다고 통감하여 작곡가의 길로 들어섰고, ‘불새’ ‘봄의 제전’ 등 강렬한 색채의 음악들을 남긴 스트라빈스키는 페테르부르크대학에서 법률을 전공,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헬싱키대학에서 역시 법률을 공부하다 작곡가로 나섰다.
게다가 차이코프스키는 법대를 졸업하여 러시아의 법무성에서 일등서기관으로 재직하다 작곡을 위하여 공직을 사임한 경우이기도 하다. 난해하기로 소문난 환상 교향곡을 남긴 베를리오즈는 의학도였으며. 생애의 마지막까지 의대 교수로 재직하며 유기화학에 관한 많은 업적을 남긴 보로딘은 우리에게는 오히려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같은 관현악곡으로 더욱 친숙한 이름이다.
물론 여기에 거명된 사람들 대부분이 어린 시절부터 음악교육을 받은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길을 바꿀 수 있었겠지만 만약 그들이 법률가 혹은 의사와 같은 직업에 안주했더라면 우리 같은 후세의 사람들에게 그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분들과는 비교하기 어렵겠지만 나의 주위에도 음악공부를 위하여 과감하게 자신이 걷던 길을 돌린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몇몇이 있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나 남는 한 사람이 있는데 필자가 뒤늦게 입학한 대학의 학교 앞 하숙집에서 함께 기거하던 친구이다. 정외과(政外科) 복학생이었던 그는 전공을 바꾸어 음악대학에 다시 입학한 필자를 마치 자기 인생의 사표라도 된 양 내내 부러워하더니 학교를 졸업하고 서른이 다 된 나이에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호칭은 형수님이었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적었던 필자의 아내에게 깍듯이 선생님 대접을 하며 열심히, 정말 열심히 피아노를 배우던 그를 잊을 수가 없다. 다시 살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 하지만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위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는 일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일만큼 흥분되는 일이다. 어쩌면 그것이 잠시 지나고 돌아가는 바람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진정으로 원하는 목표를 향해 용맹 정진하는 그 기쁨과 짜릿한 쾌감을 어찌 아내나 남편을 두고 다른 이에게 눈 돌리는 ‘바람의 그것’에 비하랴.
음악에의 길을 그리워만 하다가 뒤늦게 시작하는 사람을 우리는 늦바람이 났다고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고는 한다. 하지만 그 늦바람은 인생의 숭고한 가치를 되찾기 위한 뜨겁고도 큰 도전에 다름 아니다.
<새로 쓴 글은 아니고 여러 해 전 시드니 지역신문에 칼럼으로 연재했던 글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작이 아니라 문제가 되면 거두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