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련원 탈출기 / 이원우
엄마는 선천적인 시각 장애인이셨다. 엄마가 시집가고 나서부터 한 번도 근친(覲親)을 못하셨다는 건 그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당신이 찾아갈 테니, 눈도 어두운데 친정 올 거 없다고 당부하셨다? 지난번 73년 만에 외할아버지 내외분 산소와 엄마 생가에 들러 내린 결론(?)이다. 어쨌든 난 만고의 불효를 저질렀다.
그 엄마의 아들인 내가 죽을병에 걸린 건 15년 전쯤이다. 백약이 무효요, 일흔 명 의사가 속수무책. 병원도 수십 군데 드나들었고, 물에 빠진 사람이 되어 오직 지푸라기를 찾으려고 발버둥 쳤다. 그날도 B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나서는 길이었다. 건널목에서 잠시 멈춰서 있는데, 얼마 안 떨어져 있는 건물에 간판이 하나 보이지 않는가. * * 수련원! 한걸음에 달려갔다. 입구에 보니, 눈에 쏙 들어오는 문구로 포장된 팸플릿이 한가득 세워져 있었다. 모든 마음과 육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단다. 망설이거나 두리번거릴 여유가 없었고말고.
강사인지 뭔지 하는 사람을 만났다. 단도직입적으로 내미는 내 투병 생활의 자초지종을 듣고 난 강사는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유가 넘쳤다. 그리고 누가 옆에 있었으면 나보다 더 아팠다고 오해할 만한 이야기를 수두룩하게 늘어놓는 게 아닌가? 그게 내 생살여탈권을 빼앗기는 단초가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나는 곱다랗게 강사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귀가하였다. 주머니를 톡톡 털 수밖에. 회원으로 등록했다는 말이다.
노릇도 못하면서 명색이 교장이라, 출근 사인만 하고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도시락을 싸 갖고. 그렇게 수련이 시작된 것이다. 정년이 2년도 안 남은 나를 교육청에서도 열외로 취급해 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 치자. 결코 04년 8월 말까지 버텨내지 못했으리라.
수련은 간단했다. 조그만 전구가 하나 켜진, 반 평도 안 되는 방에 들어간다. 그리고 별들만 무리지어 있는 공간 사진을 바라보면서 ‘죽는’ 걸 상상한다. 예 하나. 오늘 나는 네거리에서 지나가는 과속 자동차에 치어 산산조각이 난다. 혼이 몸에서 빠져나와 허공에서 내 사체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온갖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이다. 그러곤 태어나서 제일 먼저 겼었던 것부터 기억해선 블랙홀에 던져 넣는 일을 계속한다.
한데 놀랍게도 말이다. 내게 이 세상에서 처음 본 것은 외할머니와의 만남이었다. 엄마의 모습은 안 떠오르고 왜 외할머니실까? 아주 어릴 적, 내가 살던 고향 동네 어귀의 대나무 밭 옆에서 어떤 할머니가 걸어오시더니, 말도 않고 당신의 등을 내 앞에 내민 것이다. 그렇게 엄마와 똑 같이 생긴 사람을 만나다니…….나는 너무 무서워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외할매(외할머니)한테 업히라고 했으므로 눈물이 범벅이 된 채 시키시는 대로 했다.
다시 수련 당시 얘기. 정말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이제야 고백인데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는 바로 앉지를 못해, 모로 반쯤 누워서 오전 오후를 보냈다. 점심도 그런 자세로 먹었고. 그런데 어느 날 노인 학교 어떤 제자가 들어오더니, 뜬금없이 던지는 말이다. 자기가 천주교를 믿은 지 25년 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엄청나게 아팠지만, 치유가 안 되더라나? 하지만 수련원에 와서 완전히 나았단다. 성당에 나갈 생각 하지 말고, 수련원에 다니라며 윽박지른다. 마지막 말이 나를 낭떠러지 끝에 세운다. 수련원에 오다가 안 오면 더 아프다는 것!
그 순간의 두려움을 표현할 길이 없다. 천주교를 믿고 안 믿는 문제가 아니라, 오다가 안 오면 더 아프다는, 비수(匕首)를 제자가 품고 있을 줄이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중가요 가사 같은 운명의 장난을 뻔히 눈 뜨고 당해야 했으니 아찔했다. 일흔이 넘은 그 할머니는 내 제자요, 내 딸의 초등학교 담임이 할머니의 아들이다! 딸의 담임이 수련원 부산 지역 중요 직책을 맡고 있었으니, 그 얽히고설킴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어쨌든 몇 달을 처참하게 싸웠지만, 조금의 차도가 없었다. 극심한 현훈증(眩暈症)이 덮쳐 입원을 했는데, 강사는 약도 먹지 말라고 강권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수련을 하면서도 죽음 직전에 이른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수련 포기 압력을 넣어오던 딸이 어느 날 내게 찾아오더니, 무조건 집으로 가자고 했다. 표정이 단호했다. 인터넷을 열어 놓고 거기 수두룩하게 실린 수련원의 폐해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어느 구석에도 신부와 수녀, 목사, 스님의 그림자도 없었다. 허탈했고 늦었지만, 속았다는 걸 느끼고 발을 빼기로 한 것이다. 딸은 먼저 천주교로 개종해서 결혼 준비 중이었고, 우리 부부도 이윽고 세례를 받는다. 교리 교육 과정 자체도 수련만큼이나 힘들었다.
날 살린 것은 의사가 아니다. 주교좌 중앙성당에서의 ‘살아 계신 주’였다. 그걸 혼신의 힘을 쏟아 부른 이후로, 점점 건강이 회복되었다. 그래 걸핏하면 나는 ‘살아 계신 주’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시도 때도 없다. 오죽하면 반세기 만에 찾은 옛 부대 앞의 불무리 성당(군종 성당)에서도 그걸 내세웠을까? 우리 한국가톨릭문인회 송년회 때도 선보였다. 지금 내 건강은 60대 초반이다. 아니면 어떻게 혹한의 날씨에 3년 동안 10회(20시간), 군부대를 찾아가 단독 위문공연(?)을 할 수 있으랴.
한데 지난번 외할머니 산소 성묘 때 밀양역에 내렸더니, 그 수련원 선전 팸플릿을 여기저기 꽂아놓은 게 아닌가? 군부대로 가는 길목에서도 수월찮게 그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집요함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살아 계신 주’로 맞서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수련원에서 탈출하는 데 차동엽 신부가 한 몫 간접으로 거들었음을 밝히고 끝맺자.
*1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