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술은, 가까이에 없는 듯하지만, 문득 내가 필요로 할 때면 언제 어디서건 어김없이, 기꺼이 나타나 슬며시 어깨를 걸어온다. 술은, 멀리 있어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가까이 거기 있으면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자주 어울리기도 하는 것이고.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 생각의 빈도로 알코올 중독을 가늠한다고 하는데, 이런 기준에서 보는 나 정도라면, 길게 따질 것 없이 적어도 알코올 의존 증후군(?) 쯤에는 족히 해당이 되리라 여기고 있다. 내게 일어나는 그 생각의 빈도로 보아서 충분하고도 남음이 적지 않으리라는 판단으로.
그런데 내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이걸 나는 어찌 할 수가 없다. 불현듯 내가 사람이 그리운데, 어쩌란 말이냐? 고 강변하면서, 그리고 그 불현듯이란 게 전혀 예고 없이 또 아무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다가오는 걸 막아낼 무슨 방도나 요령이 내게 있기나 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이성은 흐려지고 감성마저 무뎌져가고 있는 내게 그런 기대란 애당초 무리라고 푸념하면서.
나는 혼자 술을 마시지 못한다. 내가 혼자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은, 내 빈 잔을 채워줄 사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술시중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잔에다 술과 함께 제 마음을 따라 채워줄 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술과 함께 그 마음을 마실 수 있는 그런 이. 내 빈 잔에 술을 따르고, 술과 함께 제 마음을 따르고, 제 마음과 함께 제 몸까지 담아 내밀어 줄 그런 이.
내가 술이 마시고 싶어지는 것은 사람이 그리운 탓이다. 그래서 술을 마시려면, 내게는 빈 잔을 채워줄 사람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고, 결국 내가 마시는 것은 사람이다. 하여, 내가 술을 마시기 위해서는 함께 잔을 채워주고 함께 비워낼 친구가 필요한 것이다. 의기투합하여, 잔을 비워나가는 여정(旅程)을 함께 할 친구가.
술은, 마시기 위해서 친구를(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마시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안주는, 먹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기 위해서 먹는 것이다. 그러니 술의 종류나 안주의 모양에 너무 연연할 일이 아니다. 친구를 만나자며 무슨 술을 마실까를 먼저 생각하는 것도, 술을 마시자며 어떤 안주를 먹을까를 먼저 궁리하고 군침을 돋우는 것도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런 것들은 친구에 대한 예의, 술에 대한 예의에서도 한참을 벗어나는 생각들이다.
친구 없어 술을 마시지 못하는 수는 있어도, 술 없어 친구를 만나지 못하는 법이란 없고, 술 없어 안주를 먹지 못하는 경우는 있어도, 안주 없어 술을 마시지 못하는 법이란 없는 법(?)이다.
주도(酒道)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술이란 빈 잔을 서로 채워주는 친구와 더불어 즐기자는 말이다. 술을 곁에 두고서 세상 고민에 혼자 빠져들질랑 말자는 뜻이다.
주선(酒仙)도 시선(詩仙)도, 주성(酒聖)도 시성(詩聖)도 아닌 주제에, 달관(達觀) 근처에도 못 가본 우리로서는 강물 속의 달을 잡으러 뛰어들 일이야 없겠지만, 이취(泥醉)하지 않도록 경계를 게을리 하지는 말아야 한다. 술에 잔뜩 취해서 진흙처럼 흐느적거리며 무너져 내려서야, 슬며시 어깨 걸어와서 긴 시간동안을 함께 해준 술에 대한 모독이 될 터이니 하는 말이다.
송나라 소옹(邵雍)의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에 나오는 안락와중음(安樂窩中吟)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美酒飮敎微醉後
好花看到半開時
좋은 술 마시고 은근히 취해서
예쁜 꽃 보노라 반쯤 핀 것을
(이렇게도 새긴다 : 좋은 술은 취하도록 마시지 말고 / 예쁜 꽃은 반쯤 피었을 때 보라)
사물을 한껏 즐기려고만 하는 것을 경계하고, 여백을 남기라는 뜻이리라.
빈 잔은 채워야 한다. 그리고 잔은 차면 비워야 한다.
술이 마시고 싶어지는 건 결국 사람이 그립다는 뜻이다. 오늘, 지금, 이 시각, 나는 내 빈 잔을 채워줄 그 누군가가 몹사리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