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용균이다’ 하루 단식에 다녀와서
2월 4일 월요일은 공휴일이라 병원에 안가는 날이었는데 본원에서 설 음식을
준비하는 날이라 수녀님들께 다소 미안한 마음으로, 허락을 받아 광화문 광장에 있던 ‘나는 김용균이다’
단식천막에서 하루 단식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를 애도하며 그 열악한 상황이 개선되고 진상이 규명 되길
바라며 여섯 분들의 시민이 14일간의 단식을 이어 오셨고 수녀 둘을 포함 일곱 분의 시민이 하루 단식으로
연대를 했습니다. ‘김용균’은 공공기관인 한국서부발전소의 하청 노동자로 매일 주야간을 번갈아가며 12시간씩 일하는 24세 청년이었는데, 하청 노동자이기에 원청에서 나오는 봉급은 중간에 반이나 깎여 받았고 어려운 일들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부담시켰기에
노동자들이 죽어나갈 수밖에 없는 열악한 현장이었습니다.
전력생산은 시민들의 생명, 안전과 직결된 중요한 일이었으나 그가 일하던 발전소에서 정규직을 향한 희망은 그 대상자에 단 한명도 고려되지
않을 정도로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발전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6천여
명이 위험한 일을 떠맡아서 해왔고, 발전소 안전사고의 97%, 산재사망의 92%가 그들의 몫이었다고 합니다. 5km를 오가며 석탄 이동 벨트를
점검하던 김용균은 12월 11일 새벽 3시경 석탄 이동 벨트에 끼여 처참하게 죽어갔습니다. 머리와 몸이
분리되서 발견되었다고 하며, 시신을 찾던 사람들도 지나가다 헝겊조각이 있는 줄 알았다고 하니 외로이
혼자 일하다 죽어간 그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을 지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재해가 일어났어도
진상규명은 시작도 못했고, 책임자는 단 한 명도 처벌받지 않았고, 발전소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계속 돌아가고 있어서, 부모로서는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물네 살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함께 단식하며, 이러한 상황을 개선해 달라는 요청에 문재인 정부가 답하라고 우리의 의지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사고의 재발방지를 위해서는 그가 “왜,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밝혀야 하고 작업장에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에 노출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의 위치가 정규직으로 전환되어야만 그러한
위험에 대한 대처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고가 난 12월 11일 새벽 3시경, 그 이후로 태안에 안치 되었던 그의 시신이 1월 말 무렵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겨 왔다고 하기에 매일 장례식장에 들렸습니다. 장례식장에 가서 들어보니, 그가 일하는 5km 구간에서 어렵게 시신을 찾아낸 그의 선배 노동자가
천주교 신자이어서, 김용균과 그의 가족들이 신자는 아니지만, 천주교
원목실 수녀로서 그를 위해 노래로 연도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동료들은 그 주검을
발견한 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자신들이
일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동료가 석탄을 이송하는 기계에 몸이 끼여 헝겊조각처럼 죽어간 그 비참하고 처참한 현장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안전 문제로 죽어가는 우리의 젊은이들과 그 가족들이 눈물짓는 일이 없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며 그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고 그가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길 빕니다. 용균이의
죽음이 씨앗이 되어, 차별받으며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힘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청합니다.
“용균아,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화력 발전소 돌리느라 수고했다. 하늘 나라에서
편히 쉬거라.”
이번 사건을 지내면서 이래저래 연대의 현장에 다녀오는 것은 종교인의
자리가 아니라서 참여하는 것조차, 때로 뻘쭘하고 다녀와서도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 늘 버겁고 힘겨웠습니다. 사실 서울대병원 환우들의 처지에 대해서도, 건강하게 지내온 저로서는
마주하기 어렵고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환우들 앞에서 차마 울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견뎌내야 하는 아픈
장면에서 그들의 어려운 상황을 보고 그들의 소리를 듣고 놀라며 그러나 태연히 삭히며 기도해주어야 하는 내 소임 현장도 녹록치 않은데, 바깥 세상에선 24살 어린 청년이 비참하게 죽어갔다고 하는 소식에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탈출기 3장 7절)”
모든 그리스도인과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진보를 위한 하느님의
도구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 187항)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 37) 이는 우리가 부딪히는 구체적인 곤경에 대처하는 연대성의
작은 일상적 행위도 의미합니다. (복음의 기쁨 188항)
기도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이 어떤 곤경에 처해있는지 우리가 보고, 그들이 무어라고 울부짖는지 그들 세상의 소리를 들어야 그들의 고통을 제대로 알게 될 것이며, 그들을 위해서 제대로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곤경에
처한 그들의 소리가 들리는 현장을 방문하면 아픈 이들의 어려움이 눈으로 보이고 들리니 모세가 소명을 받듯 우리도 그들을 곤경에서 이끌어내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의 기운이 우리를 움직이겠지요. 그래서 나의 약함과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빈약하게 느껴지는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고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당신 선으로 이끌어 가시리라
믿습니다. 몸과 마음으로 각자의 처지에 맞게 함께 하는 것이 연대요 응답이며 진정한 기도 생활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