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경북 북부의 어느 오지 학교에 강의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희 집에서 200킬로미터 정도 되는 먼 곳인데, 예전과 달리 그 지역에 4차선 국도가 잘 닦여 있어서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습니다. 도로망이 개선돼서 지역민들의 삶이 좋아졌겠다 싶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강원도 정선으로 향하는 직통 도로가 뚫린 뒤로 주민들이 농사지어 번 돈을 카지노 도박으로 탕진하면서 가정이 무너지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는 겁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학교교육도 심대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법이죠. 그날 들은 이 충격적인 이야기가 한동안 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책 여러 곳에서 카지노 이야기를 언급할 겁니다. 이 글에서도 이 에피소드로부터 설을 풀어보겠습니다.
사람이냐 구조냐?
교육적 이슈든 사회적 이슈든 인간 세상에서 빚어지는 문제들은 대부분 이 물음으로 환원됩니다. 그래서 이에 관한 철학적 관점을 정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위의 사례에서 우울한 결과가 빚어진 원인을 분별없이 도박장을 들락거린 개인의 자질 문제로 볼 수도 있고 카지노 설립을 허가해준 행정 제도의 문제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냐 구조냐?’에서 사람이 문제라는 시각이 ‘보수’이고 사회구조가 문제라는 시각이 ‘진보’에 해당한다고 보면 대체로 맞아 떨어집니다. 여기서 어느 관점이 옳은가 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과 구조 가운데 어느 한쪽의 중요성을 절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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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교육사상가 파울루 프레이리는 ‘사람이냐 구조냐?’에서 사람에 해당하는 부분을 주관성(주관적 요인subjectivity), 구조에 해당하는 부분을 객관성(객관적 요인objectivity)으로 일컬었습니다. 주관적 요인은 개인의 자질로서 역량, 의지, 태도, 열정 따위를 말하고, 객관적 요인은 개인을 둘러싼 환경, 제도, 여건 등을 뜻합니다. 주관적 요인을 중시하는 관점이 주관주의subjectivism, 객관적 요인을 중시하는 관점이 객관주의objectivism인데, 프레이리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실천 주체들은 이 둘 가운데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흥미 있는 교육영화 [프리덤 라이터스Freedom Writers]에서 주인공 여교사는 불굴의 의지와 실천력으로 불량 학생들을 감화시켜 독서와 글쓰기를 즐기는 문학도의 길로 인도합니다. 히스패닉 빈민가에 위치한 이 학교의 아이들은 학교 안팎에서 폭력에 노출되어 언제 총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 거친 삶을 살아갑니다. 이 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모두 1주일을 못 버티고 떠나지만 그루웰 선생은 혼신의 노력으로 아이들의 망가진 영혼에 빛을 씌워줍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그루웰의 가정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루웰의 선한 남편이 어느 날 밤 이혼할 결심으로 짐을 싼 뒤 “가정과 학교, 자신과 학생들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고 요청하자 그루웰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남편을 붙잡지는 않습니다.
영화가 막을 내리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우리의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특히 교사들에게 그 감동은 각별히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잠시 뒤엔 그 감동을 뒤로 하고 허탈감이 밀려옵니다. ‘나도 교사인데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사람은 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듭니다. 도대체 지구상에 저런 슈퍼맨, 슈퍼우먼 같은 교사가 몇이나 될까요? 참교육을 하려면 가족을 내팽개치고 온 힘을 다해 학교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단 말인가요?
열악한 교육환경(객관성)에 던져진 참교사가 초인적인 열정과 헌신(주관성)을 발휘해 마침내 참교육을 성사시킨다는 설정, 이것이 교육 영화들의 일관된 플롯입니다. 감동적인 스토리가 현실의 교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고취하고 교육적 영감을 자극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어떠한 여건하에서도 선생 하기 나름이다.’는 메시지를 설파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사고가 프레이리가 말하는 주관주의적 오류에 해당합니다.
주관주의의 반대편에 있는 객관주의의 오류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학교가 학생이 처한 환경이나 여건의 중요성을 절대시하고서, 사회구조적 모순의 해결 없이는 교사가 아무리 노력한들 교육을 통한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사고가 객관주의적 오류에 해당합니다. 놀이터에 놀 아이들이 없어 친구 사귀기 위해서라도 학원을 다녀야 하는 아이들을 볼 때, 릴케에 심취하고 브람스에 빠져들어야 할 청소년들이 밤늦도록 야간자습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나 한 번쯤 다음과 같은 생각을 품게 됩니다. ‘질곡의 입시 제도를 혁파하지 않으면 참교육은 불가능하다!’고 말이죠.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하지만 ‘거대 악(惡)을 해결하기 전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점에서 이는 올바른 생각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냐 구조냐?’에서 구조가 더 중요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몇 해 전에 북유럽 교육탐방을 할 때 그런 확신이 들었습니다. 덴마크, 스웨덴 따위의 사회에서는 공사판의 인부들도 얼굴 표정이 밝고 품위가 있어 보였습니다. 사회에 나가 무슨 일을 해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니 학창 시절에 억지로 열공 할 일도 없습니다. 공부하기 싫으면 중학교를 중퇴하고 사회 생활하다가 다시 공부하고 싶을 때 늦깎이 학생이 되어 열심히 공부합니다. 때문에 우리처럼 수업 시작하자마자 엎드려 자는 학생도 없고, ‘그 학생을 깨울까 말까? 깨우려다 봉변을 당하면 어쩌나?’ 고민하는 교사도 없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이 우리보다 선천적으로 품위 있고 선량해서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구조가 선한 사람을 만든 결과일 뿐입니다.
그런데! 선한 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일까요? 선한 구조도 결국 선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사람이냐 구조냐?’에서 구조가 중요하다 해놓고선 또 사람이 중요하다 하니 도대체 뭐가 답이란 말이냐고 불만을 제기할 분이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런 불만은 이분법적인 오류일 뿐입니다. 진리는 ‘이거냐 저거냐?’의 이분법적 형태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진리는 이것인 동시에 저것일 수도 있습니다. 선한 교육구조가 선한 교사와 학생을 길러내기에 사람을 바꾸는 일보다 구조를 바꾸는 일이 훨씬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의 중요성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화두가 그런 뜻입니다.
‘사람이냐 구조냐?’에서 주관적 요인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각이 ‘보수’이고 객관적 요인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각이 ‘진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철학사에서 진보적 입장을 좇는 사상가들은 개인의 자질보다 그를 둘러싼 환경의 문제를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유물론적 입장을 취합니다. 철학적 유물론에서 첫째가는 사상가로 마르크스 외의 인물을 생각할 수 없죠. 놀랍게도 마르크스는, 사람의 변화와 구조의 변화 가운데 후자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친 당대의 유력한 유물론자인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를 둘러싼 환경과 교육을 바꿔야 한다는 유물론적 신조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이며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주)
우리 모두는 학교가 교사와 학생이 신명나게 가르치고 배우는 희망의 교육공동체이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 우리 교사들이 사회구조의 변화나 교육제도의 개선 문제에 관심을 갖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막막한 교육현실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도 교실에는 우리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성으로는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곱사등이라는 신체장애를 딛고 평생을 혁명 운동에 투신하다 투옥된 뒤 <옥중수고>라는 탁월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서를 남기고 간 그람시의 멋진 경구를 기억합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치적으로 미력한 존재일지언정 한 사람의 교사가 더 나은 교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많답니다.
(주)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 나오는 문장인데 읽기 쉽도록 제가 조금 고쳐서 옮겼습니다.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 materialist doctrine concerning the changing of circumstances and upbringing forgets that circumstances are changed by men and that it is essential to educate the educator himse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