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효도합시다”
[잠언 23:22~25]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저는 오늘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글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면서 어버이 주일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조금 긴 내용입니다. 이해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일본의 어느 일류대 졸업생이 한 회사에 이력서를 냈다. 사장이 면접 자리에서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부모님을 목욕시켜드리거나 닦아드린 적이 있습니까?”, “한 번도 없습니다.” 청년은 정직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부모님의 등을 긁어드린 적은 있나요?” 청년은 잠시 생각했다.
정해진 면접시간이 끝나고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자 사장이 이렇게 말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세요.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부모님을 닦아드린 적이 없다고 했죠? 내일 여기 오기 전에 꼭 한 번 닦아드렸으면 좋겠네요. 할 수 있겠어요?” 청년은 꼭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반드시 취업을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품을 팔아 그의 학비를 댔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그는 도쿄의 명문대학에 합격했다. 학비가 어마어마했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이제 그가 돈을 벌어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차례였다. 청년이 집에 갔을 때 어머니는 일터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청년은 곰곰이 생각했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시니까. 틀림없이 발이 가장 더러울 거야. 그러니 발을 닦아 드리는 게 좋을 거야.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아들이 ‘발을 씻겨드리겠다’고 하자 의아하게 생각하셨다. “발은 왜 닦아준다는 거니?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닦으마!” 어머니는 한사코 발을 내밀지 않았다. 청년은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닦아드려야 하는 이유를 말씀드렸다. “어머니 오늘 입사 면접을 봤는데요. 사장님이 어머니를 씻겨드리고 다시 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꼭 발을 닦아드려야 해요.” 그러자 어머니의 태도가 금세 바뀌었다. 두말없이 문턱에 걸터앉아 세숫대야에 발을 담갔다. 청년은 오른손으로 조심스레 어머니의 발등을 잡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까이서 살펴보는 어머니의 발이었다.
“오늘 면접을 본 회사가 유명한 곳이거든요. 제가 취직이 되면 더 이상 고된 일은 하지 마시고 집에서 편히 쉬세요.” 손에 발바닥이 닿았다. 그 순간 청년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말문이 막혔다. 어머니의 발바닥은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도저히 사람의 피부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이 발바닥에 닿았는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발바닥의 굳은살 때문에 아무런 감각도 없었던 것이다. 청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고개를 더 숙였다. 그리고 울음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새어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고 또 삼켰다. 하지만 어깨가 들썩이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한쪽 어께에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청년은 어머니의 발을 끌어안고 목을 놓아 구슬피 울기 시작했다.
다음날 청년은 다시 만난 회사 사장에게 말했다. “어머니가 저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사장님은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해주셨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만약 사장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어머니의 발을 살펴보거나 만질 생각을 평생 하지 못했을 거에요. 저에게는 어머니 한 분밖에는 안 계십니다. 이제 정말 어머니를 잘 모실 겁니다.” 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말했다. “인사부로 가서 입사 수속을 밟도록 하게.”
이 글을 읽다 보니 제 눈에도 안개가 자욱하게 낀 느낌이듭니다. 저도 늙으신 어머니가 살아계십니다. 제 나이가 더할수록 불효자라는 자책감이 마음의 무게를 더하게 합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부모는 자식들의 짐을 지고, 자식은 부모에게 짐을 지운다고 합니다. 평생을 자식들의 짐을 지시면서도 그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랑의 짐을 지셨다고 느끼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태산이라도 그것이 자식이라면 짊어지고 가실 부모님! 늘 자식은 부모에게 짐스러운 짐일까요?
김소월의 시 ‘부모’ 중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니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노래로 많이 듣고, 알고 있는 시이지요. 저희 세대에 어머님들이 들려주시는 옛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자식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보릿고개 이야기, 짚신 신던 이야기, 소나무 껍질 벗겨 죽을 끌여주시던 이야기… 한이 없는 이야기들 속에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어머니는 늘 일만 하시는데도 하루 죽 한 그릇으로 어떻게 견디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또 왜 그리 ‘싫다’하시는 것도 많으셨을까? 자식들 앞에서는 자장면도 ‘싫다’하시며 “니들이나 많이 먹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가 되기 전 까지는 정말 우리 어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자장면을 싫어하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부모님은 굶으시면 서도 자식들만은 배불리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시면서 그저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시는 부모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알아야 합니다.
본문 22절을 보니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부모님의 소리는 잔소리, 이어폰에서 나오는 소리는 행복한 소리로 여기십니까? 우리에게 부모의 존재는 그렇게도 대수롭지 않은 것일까요?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어머니의 자장가 소리는 꿈나라를 여행하는 천사의 소리와 같았을 것입니다. 아비에게 청종하고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를 훈계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28~32절에서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요소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 부모를 거역하는 자도 해당이 됩니다. 한 마디로 부모를 거역한다는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부모님께 순종하는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에베소서 6장 1절을 읽겠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옳다는 것, 즉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롬 8:28). 선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신명기 5장 16절에도,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의 복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자녀가 부모에게 하는 대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또 본문 23절에서는,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를 생명같이 여기며 지혜와 훈계도 명철도 같은 뜻으로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물려주신 생명은 소중하며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에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의 결정체요, 희망인 것입니다. 부모는 일생의 꿈이 자녀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녀는 그래서 부모의 자랑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자랑할 때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의 소망, 자랑, 행복과 희망은 자녀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24절은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의인이요, 지혜로운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부모를 즐겁게 하며 기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옛날에 금화 6천개 값에 해당하는 큰 다이아몬드를 갖고 있는 어떤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집에 궁궐에서 사람이 찾아왔는데 궁궐 장식으로 쓰기 위해 금화 6천개를 가지고 다이아몬드를 사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의 아버지가 다이아몬드를 넣어 둔 금고의 열쇠를 베개 밑에 넣고 낮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은 궁궐에서 오신 분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를 깨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다이아몬드는 못 팔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궁궐에서 온 사람은 큰 돈벌이가 있는데도 잠자는 아버지를 깨우지 않는 그 대단한 효성에 감탄하여 그는 궁궐로 돌아가 임금에게 사나이의 효도를 보고했습니다. 임금도 역시 크게 감탄하여 그에게 많은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자녀는 가문을 빛낼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허송세월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그 사실을 말입니다. 혹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을지라도 나를 통해 믿음의 가정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성경 속 인물 중에 부모를 잘 모셨던 효의 자녀들은 그 길이 형통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 때까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특히 <룻기>를 보면 모압 여인으로 유대인의 가정에 시집을 온 룻이라는 여인은 시어머니를 잘 모시고 살다가 베들레헴의 족장 보아스의 아내가 되는 복을 받습니다. 그 후손으로 다윗 왕이 그 혈통에서 나오는데 이것이 다 룻이 시어머니에게 행한대로 하나님은 룻을 통해 가문의 영광을 주신 것입니다.
요즘은 고부간의 갈등이 사회 문제로 이슈화 되어 있습니다. 사회구성의 기본은 가족입니다. 가족의 변화는 곧 사회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그만큼 가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족이라는 틀 속에서 말입니다. 기존에는 가족의 형태가 대가족과 핵가족으로 나누었으나, 지금은 한부모가족, 다문화가족, 이주가족 및 복합가족도 등장하고 조손가족도 많이 생겨나는 추세입니다. 한마디로 가족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가족 울타리의 근본은 가족 구성원의 희생을 동반한 책임과 의무이며 그 결과물은 사랑과 행복입니다. 그러나 책임과 희생이 한 쪽으로 기울고 있어 가족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그 모든 것을 강요하고 떠넘기려고 하니 새로운 가족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자식 시집 장가보내면 부모 노릇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지금 자녀들은 시집 장가가서 자식 낳아 놓고 부모에게 키우라 합니다. 말세입니다. 언제까지 자녀들이 부모의 행복권을 뺏으려고 합니까? 부모도 노후를 아름답게,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효도합시다.
그리고 부모의 즐거움과 기쁨은 자식이 부모를 그리워하며 품으로 돌아 올 때입니다(눅 15:31~32). 부모의 즐거움은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는 것이며, 자식들과 자주 만나서 대화하고 한 상에 둘러 앉아 식사하며, 또 많은 후손을 보는 것입니다. 또 부모의 기쁨은 부모의 감정을 풍부하게 해 드리는 것이며, 자식들이 나가서 잘 살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복 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부모의 즐거움을 빼앗는 것이고, 부모의 감정을 상하게 하면 부모의 기쁨을 빼앗는 것입니다.
이제 일어나 부모님을 찾아뵙시다. 부모님의 존재를 크게 느낍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자식으로 태어나서 부모가 물려주신 그 이름! 그 이름 값 한 번 제대로 하고 삽시다.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부모 잘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멋지게 고백했습니다. 끝으로 나를 낳으시고, 잘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하면서 편지 한 통 써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
오세종 목사 설교집, [거룩한 강단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