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업을 가진 사람들”
(사도행전 18:1~3)
우리는 지난 주일에 예루살렘에 세워졌던 세 가지 성전을 살펴보았습니다. 약속을 물려받은 솔로몬 성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 받아 고향에 돌아와 재건했던 스룹바벨 성전, 마지막으로 남방 유다를 통치하였던 헤롯에 의하여 세워진 헤롯 성전, 이렇게 세 가지 성전은 같은 장소에 세워졌다가 부서지고 또 다시 재건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함께 걸어왔던 성전입니다.
이 성전의 역사를 통해서 약속을 물려받은 오늘의 교회, 해방 받은 자들의 교회, 그런가하면 예수를 죽이는 교회 등등의 모습들을 비추어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앞에서 살펴본 세 가지 성전과 또 다른 두 개의 성전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는 애굽을 떠나 40여 년 동안 광야를 여행할 때, 그들과 함께 있었던 ‘광야의 성전’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성전은 지난 시간에 함께 살펴보았던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본 ‘환상의 성전, 꿈의 성전, 비전의 성전’이 있습니다. 이 두 성전의 특징은 앞의 세 가지 성전처럼 외부의 공격을 받아 허물어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성전의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광야의 성전은 이 땅 위에 세워져 있고, <에스겔> 40장부터 46장까지 기록된 에스겔의 성전은 이 땅 위에 세워진 적이 없는 성전입니다.
사도 바울이 2차전도 여행 때 아덴에 들려서 복음을 전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는 별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실망 가운데 고린도로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아굴라 내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읽는 <고린도전ㆍ후서>를 받았던 고린도 교회가 시작되는 첫 장면입니다.
2절에 나오는 글라우디오는 로마의 네 번째 황제로 로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게 박해를 일삼고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아굴라는 이로 인하여 고린도까지 피난 왔던 나그네였습니다. 만일 이때 바울과 아굴라 내외를 만나지 않았었다고 한다면 고린도 교회가 설립되었을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만남은 3절에 장막, 다른 말로 천막을 짓는 업이 서로 같았음으로 그 일터에서 만났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업이 같음으로 바울은 안정된 업을 가지고 1년 6개월이나 고린도에 머무르며 복음을 전했고,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장막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정착할 때까지 40년 이상 장막 속에서 살았고, 하나님께서는 이 기간 동안 두 가지를 주셨는데 하나는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5장부터 40장까지 출애굽기의 절반 이상을 할애하여 하나님이 거하실 장막에 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두 가지, 십계명과 장막을 가지고 40년 동안 씨름하면서 훈련을 쌓았습니다. 매일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십계명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경험했고, 장막을 치고 걷으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훈련을 쌓았던 것입니다.
얼마 전, 봉사회 관계로 유대인 커뮤니티 센터를 방문했던 일이 있습니다. 정말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이 엄청난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들의 땅덩어리는 고작해야 우리나라의 강원도만한 면적일 뿐인데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세계 정세의 핵심이 되게 했을까 하는 점이이었습니다. 결론은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투자했던 훈련의 결과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장막은 공동체의 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여 년 동안 애굽에서 얻은 문화라고 하는 것은 주인 눈치를 보면서 한 끼 잘 먹고 편히 잠자면 된다는 노예 문화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노예 문화는 미래를 설계하고, 현재를 절약하고, 서로 협동하는 생각은 가질 수 없는 문화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에게 꿈은 있을 수 없습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분열과 배신, 속임, 자기의 유익만 위하여 혈안이 시퍼런 삶의 문화일 뿐입니다. 십계명의 5계명부터 10계명까지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정신이 바로 공동체 훈련의 윤리입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자식이 부모를 죽였다고 하여 사회를 들끓게 했던 사실이 있는데, 통계를 보면 일 년에 약 30여명의 부모가 자식에게 맞아 죽는다고 합니다. 심각한 공동체 윤리의 공백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하는 것을 실감합니다.
하나님의 광야에서 주신 장막을 치고, 거두고, 헤어진 데를 수리하고, 간수하는 훈련 속에서 부모가 무엇이고, 가족이 무엇이고, 협조가 무엇인지를 40년 동안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질서를 배우고 윤리를 배우고 실천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여 모든 이스라엘 민족은 40년 동안 훈련을 쌓았고, 장막을 치는데 선수들이 되었을 줄로 압니다. 아굴라 부부와 바울이 서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장막을 짓는 업이 같았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장막을 중심으로 12지파가 진을 치도록 하셨습니다.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삶을 훈련했습니다. 그냥 위치만 중심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침마다 문을 열면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하나님의 장막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만일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높이 오르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들은 서둘러서 장막을 거두고 정해진 순서대로 행진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또 앞서 가던 구름기둥, 불기둥이 멈추게 되면 그곳에 정한 위치대로 서둘러서 장막을 치고 기약 없는 날 동안 장막의 구름기둥, 불기둥을 매일같이 확인해야 했습니다.
이러기를 40여 년 동안을 했으니 그들은 자연히 하나님 중심의 삶을 훈련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 흥미 있는 내용을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첫 부분은 희망찬 내용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만물을 다스려라,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가져라’ 등의 축복에 싸여있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50장 끝 부분에 가서는 해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찬란한 축복이 결국에는 해골을 생산해 내는 역사를 만들었다는 암시인 것 같습니다. 그런가하면 출애굽기를 펼치면 공기를 가르는 채찍 소리, 아픔을 견디지 못해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 무거운 짐에 짖는 한숨 소리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출애굽기 마지막 부분인 40장을 보면 장막 위에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을 감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서부영화를 참 좋아했습니다. 모든 장면 가운데 끝 장면이 늘 마음에 남았습니다. 요사이 한국인들 가운데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 하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우연이 아닌 줄로 압니다. 우리가 사랑하던 고전들을 살펴보면 거의가 이러한 생활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춘향전, 심청전 등등 온갖 고생을 하고 결국에는 혼자 잘 먹고 잘사는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서부 영화를 보면 온갖 고생을 하는 장면까지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마지막 부분에서는 해지는 서산에 마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다른 곳, 미래를 향하여 떠나는 장면들입니다. 그 뒤에는 평화를 다시 찾은 마을이 남습니다. 대표적인 영화가 ‘세인’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린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영원한 사랑의 교훈(고린도전ㆍ후서)을 남긴 고린도 교회를 세운 것은 바울과 아굴라 부부가 공동체의 훈련을 쌓았던 장막, 하나님을 중심으로 했던 장막, 참다운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는 장막을 짓는 업이 같았기 때문에 이루어 졌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은 바울과 아굴라 부부처럼 광야에 세워졌던 장막을 짓는 같은 업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든든히 세워 가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