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교회 중심의 신앙인가?”
(사도행전 20:28~31)
에베소 교회는 예전에 말씀 드린 대로 <요한계시록>에 언급되어 있는 일곱 교회 중 한 교회입니다(계 2:1~7). 또 오늘 읽은 말씀은 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 즉 교회의 지도자들을 청하여 특별 세미나를 하면서 해 주신 말씀입니다. <에베소서>는 옥중서신 가운데 한 권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자신의 전도 여행 중에 개척하거나 특별한 인연이 있는 교회를 향하여 꼭 기록하여 보내야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기록한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앞에 있는 사도행전 19장의 말씀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3절에서부터 에베소 시에 아데미 여신을 위해 은 감실을 만들어서 파는 이가 있었습니다. 은 감실은 아데미 여신의 사당 안에 신주를 모시는 함을 말하는데, 실제로는 아데미 여신상이 아닌가 합니다. 그는 장사가 아주 잘되어서 많은 직공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바울이 이곳에 들려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면서 우상을 섬기지 말 것을 전했습니다. 이 때 이 말을 들은 그는 에베소 시민들을 동원하여 바울 일행을 잡아다가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게 하고 갖은 모략으로 방해했던 일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바울은 여행을 계속하다가 밀레도라는 동네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오라 하여 그곳에서 특별히 이들에게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알아야 할 것들을 가르쳐주신 말씀이 오늘 특별 세미나를 한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필요한 사도 바울의 특별 세미나가 아닌가 합니다.
1) 에베소 교회가 위험한 형편에 놓인 것은 사람들의 생각대로 만든 우상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1, 2계명은 우상에 관한 계명입니다. 이 우상은 외면적으로 보이는 어떤 형상이기 이전에 먼저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생각대로 만들어 놓은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1계명에서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고, 2계명에서는 그 우상은 사람들의 생각에 유리한대로 만든 것들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어려운 고난 가운데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는 것은 이런 우상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며칠 전 미국의 어느 텔레비전에서 알코올 중독, 마약에 깊이 빠져들어 교도소에 자주 수감생활을 하다가 빛을 찾아 소생한 유명한 작가의 간증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흑인이었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하고 유식하다 해도 길거리에 나서면 노예의 후손인 흑인 이상의 아무 것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커다란 저택에서 살아 보았지만 시장에 나가면 그저 노예의 후손인 흑인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공부 많이 했지만 알아주지 않는 세상, 돈 많이 가지고 있지만 알아주지 않는 세상, 자신은 유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 싫었습니다. 잔뜩 취해보니 다 잊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깨어보면 다시 흑인이라는 사실, 시간이 흘러가니 술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마약에 손을 대어 보았습니다. 모든 괴로움 잊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점점 사회로부터 소외당하는 느낌을 가졌고 고독하게 지내다가 다행히도 가던 길을 되돌아서서 주님으로부터 소망을 발견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들 중에는 각 가정마다 밝힐 수 없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 가운데 자녀들에 관한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심하게는 마약에 빠져있는 아이들도 제법 있다고 합니다. 얼마 전, 간이 법정에 갔었던 일이 있습니다. 막 들어가니 한국 분들이 몇 분 있습디다. 내가 들어가자 모르는 척 얼굴을 돌리더군요. 사실 저는 그분들을 모릅니다만 그분들은 내가 누구인지 짐작하는 것 같더군요. 거의 모두가 자녀들 때문에 불려온 것 같았습니다. 그 많은 날 가운데 잠시 한 시간에 그렇게 많은 분들을 볼 수 있었다면 그 심각성을 어느 정도 짐작할 것 같았습니다.
이들은 그저 속박 받지 않는 것, 짜릿한 것, 흰둥이 노란둥이 깜둥이 구별하지 않는 세계, 돈만 있으면 실컷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세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간섭이 없는 세계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자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편하고, 파별이 없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세계가 마약의 세계라고 합니다. 본인을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고 즐깁니다만, 밖에서 보면 육체적으로 마르고, 비정상이고, 단체생활에서 낙오되는 모습일 뿐입니다. 어릴 때 그런 사람들을 동네에서 아편쟁이라 부르던 말이 생각납니다.
요사이 저는 좀 심각하게 우리 이민 교회의 상황과 미래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캐나다 교회들에서는 담임목사 그리고 교육목사 외에 Social Worker, Counsellor들을 part time으로 채용하여 교우들을 돌보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전문적인 훈련을 받고 일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교회들이 다원화 된 사회 속에서 온전하게 우상의 세계에 전염되지 않고 살기 위하여서는 있는 힘을 다하여서 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들의 형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원시 시대에 살고 있는 착각을 느낍니다. 담임목사 한사람이 만물박사처럼 활동해야 하고, 자녀들은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데, ‘기도만’이라는 표어를 내세우고 애타게 비비고 앉아있는 시간에 그 자녀들은 돌이키기 어려운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해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만’이라는 말이 좀 이상하게 생각되신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이 말씀은 기도하기 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와서 기도하라는 주님의 엄하신 깨우침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환경, 문화는 정말 에베소 교회처럼 사람들이 제멋대로 생각하기에 좋은 우상들을 만들어 섬기며 만족하고 있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을 일깨워 주시고 있는 줄 압니다.
2) 에베소 교회에 침투한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물리칠 수가 있는가 하는 방법을 한 가지 제시하여 주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바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다시 교회의 중요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하시기 위하여 부르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서 나오는 수많은 후손, 더 나가서 그로 인하여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하는 복의 근원으로 하시기 위하여 그를 부르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은 제사라는 길을 보여주셨지 않습니까?
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까지 이끌어 가실 때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장막을 중심으로 생활훈련을 시키기 시작하셨습니다. 한 번 생각 해 보십시다. 지금부터 3000년 전 약 2백만의 사람들이 40년 동안 어떻게 질서 있는 여행을 할 수 있었겠는가? 많은 역사가들이 인류 역사상 10대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워키토키도 없고, 호루라기도, 마이크 시설도 없는 그때였습니다. 한 가지 비밀이 벗겨질 수 있는 일은 12지파가 장막을 칠 때나 행진할 때 언제나 장막,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장막을 중심으로 행하였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대신 영원히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거하게 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신 오순절에 탄생한 교회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이거나 아니거나 이민의 길을 들어서면 누구나 찾아오는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이 교회를 중심으로 하늘나라의 일을 훈련하고 주신 작은 천국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선배들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까지 말하고 교회생활에 충실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마 16:18). 주님은 내 교회를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배 때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② 오늘 본문에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피로써 사신 것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만인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피를 흘리시지는 않으신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속죄함을 받은 무리들이 함께 모여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즉 교회를 이루기를 원하신 근본 목적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③ 바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성령이 임하시어 구체적으로 교회를 이루시었기 때문입니다.
④ 끝으로 신약성서의 거의 모든 말씀들이 교회를 향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