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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주제발표>
생명·탈핵 실크로드의 문명사적 의의
박준규(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제1부에서 이원영 교수가 소개 한 바와 같이 생명·탈핵 실크로드는 한국에서 시작하여 아시아와 유럽을 횡단하며 약 26개 나라 사람들과 함께 걸으면서 지구촌의 탈핵과 생명존엄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전세계 445개 핵발전소의 감시와 탈핵과 생명존중을 추구하는 새로운 국제기구를 결성하려고 하는 노력의 시작인 21세기 새로운 실크로드이다.
역사적으로 실크로드는 근대 이전의 중국과 유럽 즉 동과 서를 연결하는 교역로를 말한다. 비단길이라는 뜻의 이름은 중국의 비단이 로마 제국으로 흘러가는 것을 의미하는 데서 유래했지만 실크로드는 역사를 통해서 더 다양한 교역품을 전달하는 육상과 해상 통로로 확대되었고, 더 나아가 문화가 교류되는 통로이기도 했다. 실크로드는 단순히 동서를 잇는 교역로로 생각되어 왔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남북의 여러 통로를 포함해서 동서남북으로 뻗어 나가는 하나의 거대한 교통망으로 보아야 하며, 이에 따라서 실크로드의 개념 또한 확대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생명·탈핵 실크로드 또한 기존 실크로드 개념에서 새롭게 확대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발표는 이 21세기 새로운 실크로드의 문명사적 의의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그러기에 앞서 먼저 상식적인 차원에서 생명·탈핵 실크로드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 자리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생명·탈핵 실크로드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먼저 연세도 있으신 분들이 과연 이 길고 힘든 여정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출발한 몇 명이 과연 몇 명을 모아 함께 걸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도 있을 수 있다. 실로 몇몇이 시작하여 큰 무리가 모여 순례를 해서 계획대로 달라이 라마와 프란치스코 교황이 탈핵과 생명을 지지를 해준다고 하여도 과연 핵마피아 세력과 화석원료 세력이 눈이나 깜빡할 것인지, 즉 세상이 얼마나 변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생명·탈핵 실크로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불가능한 일에 더 가깝다.
그러나 본 발표는 생명·탈핵 실크로드의 문명사적 의의를 확인함으로써 생명·탈핵 실크로드의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보려고 하고, 가능해야만 하는 어떤 필연성에 대해 역설하고자 한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 발표의 목적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하자면 기본적으로 발표자는 생명·탈핵 실크로드를 성공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문명 혹은 문화와 권력 혹은 구조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또한 문명사라고 해서 먼 과거로 갈 필요 없이(당연히 먼 과거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혹시 과거와 현재는 너무 다르지 않는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근래 역사에 집중하고자 한다) 2000년대부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세계 곳곳에서 나타난 전지구적 저항운동의 역사를 통해서 생명·탈핵 실크로드의 실현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2. 문명 혹은 문화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이해
문화인류학에서 문명(civilization)은 문화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문화(culture)는 흔히 사상, 의상, 언어, 종교, 의례, 법이나 도덕 등의 규범, 가치관과 같은 것들을 포괄하는 “사회 전반의 생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영어의 어원은 cultivate, 즉, 경작하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이며 이에 문화는 인류가 무리를 지어 한 곳에 정착하여 가축을 키우고 농업을 하기 시작한 농업사회에서 등장하여 학습되고 공유된 사회 전반의 생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Civilization의 경우 어원은 도시와 시민을 뜻하는 라틴어 civitas와 civis에서 유래하였으며 도시와 관련된 속성을 가지고 있는 복잡한 사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문화인류학은 문화를 핵심 개념으로 다루는 학문이다. 영국 문화인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드워드 타일러(Edward Tylor)는 “문화 혹은 문명이란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률, 관습 그리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이 학습한 여타 모든 능력과 습관들을 포함하는 복합적 총체라고 정의했다(Miller 2015).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문화가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행위나 믿음이라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 총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화는 부분의 총합 보다 더 큰 것이며 하나의 정의로 규정될 수 없다. 이에 문화인류학에서는 아직도 문화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관해 지속으로 논쟁하고 있다. 1950년대에는 문화에 대한 정의의 수가 164개나 되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인류학자들은 문화에 대해 어느 하나의 정의를 선택하기 보다는 문화의 속성을 조명하여 문화라는 복잡한 개념을 이해하고자 한다.
1) 문화는 상호작용하고 변화한다
문화의 속성 중 하나가 문화는 상호작용하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문화는 오랜 역사 속에서 이주, 무역, 전쟁과 같은 수 많은 접촉을 통해 상호작용하고 서로를 변화시켜 왔다. 오늘날에는 교통과 정보 통신 기술의 발전을 통해 가속화 된 세계화가 문화 변동의 주요한 힘이다. 그러나 세계화는 고르게 확산되지 않는다. 지역문화와의 상호작용과 그에 미치는 영향은 긍정적인 변화에서 문화파괴까지 아주 상이하게 나타난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차이를 포착하여 문화적 상호작용의 네 가지 모델(문명충돌론, 맥도널드화, 크레올화, 지역화)을 제시하고 있다. 맥도널드화는 쉽게 말해서 신자유주의 경제에서 강조되는 경영 체계화와 효율화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말한다. 한편 크레올화는 상이한 문화 간의 접촉으로 인하여 혼합된 형태의 제3의 문화가 등장하는 것을 말한다. 지역화는 세계화 같은 문화적 상호작용에 의해 특정 지역의 문화가 재구성되고 강화되는 것을 말한다. 위 세 모델은 세계화로 촉진된 문화적 상호작용을 설명하거나 기술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문명사적 의의를 논하는 본 발표에서 자세하게 살펴보고 싶은 문명충돌론은 그렇지 않다.
문명충돌론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붐을 통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연결과 재화, 정보, 사람들의 이동으로 인하여 확산되는 자본주의와 서구 또는 미국 생활방식이 다른 문화 체계 사이에서 환멸과 소외, 분노를 초래했다는 주장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문명의 충돌”이다. 헌팅턴은 오늘날의 세계는 일곱 내지 여덟 개의 주요 문명으로 이뤘다고 주장한다. 주요 문명이란 중화(중국), 일본, 힌두교, 이슬람교, 정교, 서구,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이다. 여기서 헌팅턴은 아프리카를 문명으로 구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망설임을 가졌다. 아무튼 헌팅턴의 핵심 주장은 냉전 체제가 역사의 뒤로 사라지면서 탈냉전 세계에서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념이나 정치, 경제가 아니라 바로 문화라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헌팅턴의 매우 중요한 지적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문화적 동질성과 이질성이 국가의 이익, 대결, 협력 양상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헌팅턴이 말하는 문명과 문화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핵심 문제는 헌팅턴은 문화 간의 상호작용을 ‘충돌’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충돌은 크레올화처럼 새로운 문화 창조로 이어지는 만남과 변용이 아니라 하나의 힘 센 문명이 다른 문명을 파괴하거나 흡수해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이 문제다. 이는 문화적 상호작용이라기 보다는 일방적 대립과 충돌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이에 당연히 헌팅턴은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국가들은 판이한 문명들에서 유래하였으며 확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국지적 분쟁은 판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이나 국가 간의 충돌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사용하는 문명이라는 용어는 매우 자의적이며 혼란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이슬람교, 힌두교, 정교 같이 종교적 의미로 사용하다가 일본처럼 국민국가를 지칭하기도 하고 아프리카 또는 라틴아메리카처럼 지역적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헌팅턴은 내부적 다양성을 간과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 내에서 다양한 신앙과 교리와 실천이 존재하는 것과 같이 이슬람교 내에서도 다양한 신앙과 교리와 실천이 존재하며 역사는 물론 문화 또한 다양하다.
한 나라 안에서도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고 서로 상호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는 헌팅턴과 같은 관점에서 이런 다양한 문화는 충돌할 수 밖에 없다며 특정 문화가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지역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고 변화하는 문화에 대한 매우 잘못된 이해이다.
더 나아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서구 문명이나 국민국가의 문화는 홉스봄과 일련의 역사학자들이 폭로한 바와 같이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베네딕트 앤더슨은 국민국가를 상상의 공동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경계지어진 특정한 영토에 살고 있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한 나라의 국민으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오직 한 나라에만 속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실크로드가 아시아와 유럽을 또는 동과 서를 서로 연결했다고 하는 생각 또한 ‘만들어진 전통’의 일환인 것이다. 처음에는 동과 서라는 구분을 없었을 것이며 중국과 유럽 같이 국민국가에 대한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헌팅턴이 제시하는 문명은 화석화 되었으며 몰역사적인 개념이기에 특정한 정치적 관점에서는 필연적으로 문명은 충돌할 수 밖에 없다는 잘못된 생각이 가능해진 것이다.
2) 문화는 자연과 다르다
이처럼 문명에 대한 오해는 헌팅턴처럼 문화의 상호작용과 변동이란 속성을 무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오해는 문명을 왜곡된 생물진화 이론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문화인류학에서도 진화 이론이 지배했던 초기에는 문명은 문화의 진화 과정에서 서구사회를 일컫는 가장 최근 단계로서 가장 진보한 진화과정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문화는 저차원에서 고차원으로, 단순에서 복잡으로,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원시 또는 야만(savage)에서 미개(barbarism)로 그리고 문명(civilization)으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언급된 미국 문화인류학자 루이스 모건은 이같은 진보 단계는 발명과 발견, 정부에 관한 관념, 가족 조직, 사유재산에 대한 개념과 같은 4 가지의 문화적 성취를 기준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같은 문화진화론은 20세기 후반에 서구중심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사회과학에서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사회 법칙을 찾으려는 것에 대한 한계와 개인과 사회에 대한 이분법에 대한 비판에 의해 재고된다. 여기서 중요한 논쟁 중 하나는 문화는 자연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인가 아니면 양육인가(nature or nurture?) 또는 선천적인가 아니면 후천적인가 하는 논쟁과도 관련이 있다.
흔히 사람들은 인간은 동물이며 자연에 속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회진화론 또는 문화진화론을 근거로 동물 세계와 자연에서 발견되는 현상들을 종종 인간 세계, 즉 문화에 적용하여 해석하려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다윈의 생물진화론 중 약육강식 또는 적자생존의 원칙을 사회현상에 적용하여 인종주의적 정치 또는 행동을 합리화 하려는 것이다.
좀 더 학술적인 차원에서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먹고, 마시고, 잠자고, 배설하는 것 같이 모든 사람들이 생존하기 위해 수행해야만 하는 인류의 보편적 기능은 모든 곳의 사람들에 의해 비슷한 방식으로 수행될 것이라는 논리가 상식처럼 존재한다. 이같은 논리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의 예로 맛에 대한 인식은 극적으로 다르다. 서구에서는 보편적인 맛의 범주로 단맛, 신맛, 쓴맛, 짠맛 4종류가 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문화인류학적 연구는 이들 4종류의 맛이 보편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인도네시아의 한 민족 집단은 4종류의 맛이 아니라 7가지 범주로 맛을 규정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화는 자연과 다르며 문화와 자연과의 관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는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고 또 한편으로는 자연을 규정하지만 문화 또한 자연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 결과 문화인류학에서는 생물학적 결정론과 문화구성주의 간에 이론적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생물학적 결정론은 유전자와 호르몬 같은 생물학적 요인들에 의거해서 사람들이 왜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고 사고하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하나의 예로 생물학적 결정론자들은 왜 남성이 여성보다 현저하게 ‘더 좋은’ 공간지각능력, 예를 들어 운전능력을 가지고 있는가에 관한 설명을 제공해왔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는 진화적 선택의 결과로서 ‘더 좋은’ 공간지각능력을 가진 남성들이 식량과 배우자를 확보하는 데 이점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문화구성주의는 인간의 행위와 관념이 문화적으로 규정된 학습의 결과라는 입장이다. 단순하게 모든 인간은 문화적으로 백지 상태에서 태어나서 부모와 주변 사람과 사회로부터 행위와 관념을 배워 나간다. 그래서 남성들이 ‘더 좋은’ 공간지각능력을 보여준다는 주장과 관련해서 문화구성주의자들은 그러한 지각능력이 유전자가 아니라 학습을 통해 문화적으로 전승된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그들은 부모와 교사들이 공간지각능력 면에서 남자와 여자 아이를 다르게 사회화시키고, 남자아이들에게 운전능력과 같은 특정한 종류의 공간지각능력을 더 장려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인적 차원에서 본다면 남자아이 중 누구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빨리 능력을 습득하거나 ‘더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남자와 여자 아이를 다르게 사회화시켜도 어떤 여자아이는 일반 남자아이 보다 ‘더 좋은’ 공간지각능력을 습득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처럼 생물진화론을 단순화 시켜 문화에 적용시켜 강한 문명이 필연적으로 약한 문명을 파괴할 것이라는 주장이나 다른 문명들이 동물처럼 생존본능에 의해 서로 충돌할 것이라는 논리 또한 잘못 된 것이다. 오늘날 문화인류학자들은 생물학적 결정론과 문화구성주의 간의 논쟁 보다는 생물학과 문화를 연결시켜 자연과 문화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려고 한다.
3) 개인의 주체적 행위와 구조주의 간의 상관관계
마지막으로 복잡한 문화 개념에 관한 이해를 위해서는 개인의 주체적 행위와 구조주의 간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서구의 철학적 사고는 주체적 행위, 즉 선택하고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에 방점을 둔다. 이와는 반대로 구조주의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경제, 사회, 정치조직 그리고 이데올로기 체계 같은 보다 커다란 힘들이 선택을 구조화하기 때문이다. 세계화를 연구하는 문화인류학자 바바라 밀러(Barbara Miller)는 가난에 관한 연구를 예로 제시하고 있다. 주체적 행위를 강조하는 이들은 개인이 극도로 가난한 상황에서도 가능한 한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어떻게 주체로서 행동하는지를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반대로 구조주의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거대하고 강력한 힘에 속박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구조주의자들은 정치경제와 여타 힘들이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주체적 행위를 어떻게, 또 얼마나 제한하는가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문화인류학자들은 개인과 사회의 상호관계를 주목하며 주체적 행위에 주목하는 관점과 구조주의적 관점의 접목을 시도한다. 사회는 개개인이 모여 구성한 것이다. 개인 없이는 사회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문화와 문명의 등장과 함께 사회는 위계질서와 권력이 생기면서 특정한 생산 양식으로 변화되었다. 다시 말해 현실은 힘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이 구성한 구조 속에서 다양한 개개인들이 순응하거나 타협하거나 저항하며 구조를 변화시켜 나아간다는 것이다.
3.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전 지구적 행동이 보여주는 생명·탈핵 실크로드의 필연성
끝으로 발표자는 1999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 전 지구적 행동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근거로 생명·탈핵 실크로드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역설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대표적으로 1999년 미국 시애틀에서 일어난 세계무역기구 장관급 회의 반대 시위, 2003년 2월 15일 국제반전행동의 날, 그리고 2000년대 전반기에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개최된 세계사회포럼이 있다.
1) 거북이와 팀스터즈 연합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인한 냉전의 종식은 지구의 반쪽이라고 할 수 있는 서방 세계와 그 부속 세계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진정으로 글로벌하게 만들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동유럽을 포함한 구소련 지역으로 침투하였으며 서방 세계와 그 부속 세계에서의 세계화는 가속화되고 유럽연합권과 북미권, 동아시아권 등의 영역을 중심으로 파편화 또는 다중심화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한편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던 소련을 일종의 사회주의 국가로 보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의 가능성을 기대했던 일부에게 있어서 소련의 붕괴는 큰 충격이었으며 ‘신자유주의 외에 대안은 없다’라는 슬로건은 이제 전세계에서 기정사실화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거의 8년이 지난 1999년 11월, 미국 시애틀에서 WTO(세계무역기구) 장관급 회담을 반대하는 대규모 투쟁이 일어났다. 당시 신자유주의의 상징 중 하나인 WTO의 장관급 회담을 반대하기 위한 도로 점거 시위가 수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 그리고 노조 활동가들이 합류하면서 대규모 시위로 커짐으로써 많은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세계는 두 가지 차원에서 놀랐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소위 ‘짐승의 심장(the heart of the beast)’인 미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7만 명 정도의 너무나 다양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여 ‘회의 저지’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달성 했다는 것이다. 종종 이 시위는 ‘거북이와 팀스터즈(북미 운송노조의 별명)’의 역사적 연대라고 묘사된다. 그 이유는 환경주의자(거북이), 학생, 시민, 남녀노소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미국의 거대 노동조합과 함께 이 시위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의 당연한 결과인 것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서로의 생각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토론하고 이해하려고 하고 단결해 나아가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 같은 모습은 세계 곳곳에서 모인 독립영상 활동가 또는 인디미디어 활동가들에 의해 영상으로 담겨졌고 그 영상들은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한 참가자에 의하면, ‘시애틀 투쟁’은 앞으로 다가올 거대하고 놀라운 그 무엇을 예견할 수 밖에 없는 승리의 투쟁이었다. 다시 말해 ‘시애틀 투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반대하고 더 나아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저항 운동의 전초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과거에도 그랬고 지난 11월 12일 서울 광화문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인류의 문명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한 목소리를 내는 경험과 기억이 있다. 생명·탈핵 실크로드의 통해 사람이 모이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는 문화 속의 다양성과 개인의 주체적 행위를 존중하며 불의의 구조에 맞서기 위해서 대안적 구조를 건설하려는 의지가 공유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2) 국제반전행동의 날과 이를 가능케 했던 세계사회포럼
2003년 2월 15일 서울 도심에서는 국제반전행동의 날의 일환으로 반전행진이 있었다. 이날 서울에서만 한국 반전평화 운동으로서 가장 많았던 5천여명이 모였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인터넷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국제반전행동에 대한 소식을 전하면서 전 세계 6백여 도시에서 2천만 명이 반전 시위에 참여했다고 발표했다. 영국 런던의 경우에는 2백만명이 넘는 시위대가 하이드파크 공원에 출현했다. 이같은 현상을 보고 뉴욕타임스는 미국 외에 또 하나의 수퍼파워가 등장 했다고 보도하였다. 또한 기사를 쓴 기자는 이 수퍼파워는 한 국가가 아니라 미국의 패권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전 세계에 있는 개개인들과 단체들의 공동행동 즉 글로벌한 시민사회라고 지적했다.
과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게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비슷한 행동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같은 생각과 행동, 즉 프락시스(praxis)를 대항문화 또는 저항문화라고 할 수 있을까?
여러 분석과 해석이 있지만 발표자에게 가장 설득력이 있는 분석은 모순적이게도 세계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분석은 세계화는 정체된 개념이 아니라 동적이며 여러가지 측면과 형태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즉 세계화는 경제, 정치, 문화, 사회, 정보, 기술 등등 다양한 영역에서 진행되는 과정이며 위에서부터 진행되는 것과 아래로부터 변화를 지향하며 진행되는 형태도 있다.
구체적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라고 불리는 위로부터의 세계화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지배계층과 다국적 기업들이 자신들의 부와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신자유주의 정책을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문화, 정보, 기술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이동 또는 이주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지구의 공간과 시간이 압축되고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게 되었으며 이들의 생활영역이 상호연결된 지구촌이 형성된 것이다. 비슷한 문화, 즉 전 지구적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 곳곳의 일반 사람들이 이에 맞서 자동적으로 하나로 뭉쳐 갑자기 저항에 나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일상에서 사람들은 큰 틀을 바라보기 보다 각각의 지역, 국가를 대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에 나서는 경향이 크다. 그래서 이런 움직임들이 하루 아침에 글로벌하게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또 하나의 수퍼파워로 등장한 국제반전행동 역시 우연히 사람들이 모인 것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정치적, 군사적인 폭력성에 반대하는 운동, 즉 이윤보다 생명을 우선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폭력이 글로벌하게 진행되는 속에서 저항도 글로벌하게 진행될 수 있다는 글로벌 시민사회의 가능성을 보여준 2월 15일 국제반전행동의 날은 하루 아침에 조직되고 실행된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움직임의 배경에는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이라는 ‘반세계화’ 운동의 국제회의와 축제가 존재한다. 세계사회포럼은 ‘반세계화’ 혹은 저항의 세계화를 기치로 전 세계의 활동가들이 2001년부터 매년 1월에 모여 진행하는 일종의 국제회의이자 활동가들의 축제이다. 이 행사는 ‘운동들의 운동’이라고도 불리며 획일적이며 수직적으로 진행되는 기존의 형식과 방식과는 다른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대항문화 또는 대안문화를 모색하는 모임과 축제라고 평가되면서 21세기적 운동의 지향성과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공식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회의 장소 마다 저항과 대안적 상상을 표현하는 예술들과 행위가 자유롭게 진행되고 상호 이해와 연대가 교류되는 만남의 장이었다.
이 글로벌한 아래로부터의 저항문화는 아이러니하게 위로부터의 지배로 인해 생겨난 것이기도 하다. 이 포럼의 일정은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최된, 신자유주의의 주요한 상징으로서 진행된 세계경제포럼에 대한 항의로서 같은 기간에 진행된다. 일종의 ‘당신들이 모이면 우리도 모인다’는 맥락일 수도 있다.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소수의 엘리트들이 수많은 민중들의 삶을 좌지우지한다며 북반구의 소위 제1세계 주요 도시에서 세계경제포럼을 한다고 모인다면, 더 많은, 더 다양한 아래로부터의 사람들도 이에 대항하며 남반구의 소위 제3세계에 모여서 목소리를 내고 힘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세계사회포럼은 첫 회에 남반구인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레에서 개최되었다. 처음에는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의 활동가 중심으로 1만2천명이 모였고 2002년에는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라는 기치 하 세계 123개국 6만명 이상이 참가하여 명실공히 대중들의 저항의 목소리를 담은 국제회의와 축제가 되었다.
정리하자면 인류는 이미 변화를 위하여 아래로부터 전세계적으로 동원하고 조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생명·탈핵 실크로드는 이같은 경험과 기억을 되살리고 공유하는 대화의 교역로가 되기를 바란다.
4. 맺음말
세계사회포럼은 1999년 WTO에 반대하는 시애틀 투쟁에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시애틀 투쟁은 사전의 어느 사건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일까? 그 사건은 또 그 전 어느 사건으로부터 힘을 얻은 것인가? 혹자는 이런 식으로 질문을 계속해 가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서 가장 처음 모든 것을 시작한 첫 저항은 스파르타쿠스의 저항이었다고 말한다. 한 개인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곧 무리가 되고 이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게 된다.
흔히 문화는 집단의 기억이며 교육 수단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도 세계화처럼 두 가지 종류의 문화가 있을 수 있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려는 문화와 이에 저항하고자 다수를 해방시키려고 하는 문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세상에 폭력과 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하는 한 이에 대한 저항 또한 존재할 것이고 하나의 저항은 대항문화 속에서 기억되고 교육되어 더 큰 저항을 가능하게 한다.
생명·탈핵 실크로드는 세계사회포럼이 보여주었던 아래로부터의 전 지구적 저항문화의 가능성을 다시 실현하고자 하는 시도라는 것을 분명이 할 필요가 있다. 이 저항문화는 충돌이 아니라 교류와 상호작용을 통해 더 나은 미래로의 변화를 추구한다. 이 변화 과정은 행위주체자로서 개인과 구조로서 사회가 같이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세계사회포럼의 힘과 주체가 사라진 이유는 강력한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 힘이 작동해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세계사회포럼이 개인의 주체적 행위와 구조주의적 현실을 이분법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생명·탈핵 실크로드는 행위주체자인 개개인을 모으고 만나 같이 걸어가며 공통된 가치를 공유하는데 노력하는 한편 동시에 지구 생명을 파괴하고 있는 핵과 화석원료를 기반으로 이윤을 최대화하려는 이익집단과 이들의 통제 하에 있는 정부과 국제기구, 즉 구조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건설하는 작업에도 노력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원영 교수의 발표에 의하면 생명·탈핵 실크로드가 바로 이 두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고자 한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많은 분들의 동참을 바랍니다.
참고문헌
Miller, Barbara. 2015 글로벌시대의 문화인류학. 홍석준 외 옮김. 시그마프레스.
<Abstract>
Significance of "New Silk Road for Life and No-Nuke" from a Perspective of the History of Civilizations
BAK Joon-gyu (Hanyang University Dept. of Cultural Anthropology)
This paper aims to highlight some characteristics of culture namely that cultures interact and change and that culture is not the same as nature in order to discuss the significance of the New Silk Road for Life and No-Nuke. The New Silk Road for Life and No-Nuke proposed today is a bold initiative from a religious community for life and no-nuke in South Korea to expand the traditional concept of the Silk Road from a trade route between the East and the West to an exchange road between different cultures to construct a global movement for Life and No-Nuke.
A common sense response to the idea of the New Silk Road would be negative, if not considered as a farfetched dream. However, just by looking back at the last decade, the first half of the 2000s, from a perspective of the history of civilization, it is clear that the people on this Earth is more than capable of uniting and acting together for justice, life and no-nuke. Examples are the 1999 Seattle Protest against the WTO, the Stop the War Global Day of Action on February 15, 2003, and the series of The World Social Forum.
Nevertheless, in order to realize the New Silk Road for Life and No-Nuke which not only seeks to bring people from 26 countries to walk together calling for the establishment of an international organization to monitor and decommission nuclear power plants worldwide but to establish such an international organization, the participants need to have anthropological understandings about culture. The understanding that cultures interact and change allows us to guard against the idea that the world divided into different cultures heading toward clashes. Cultural interactions do not bring clashes but changes for the better. In addition, the understanding that culture is not the same as nature criticizes the thinking that cultural differences are similar to biological differences.
Lastly, it is critical to understand that individuals as an agent of change make up a society which is controlled by a certain structure of power. It is the society or structure that shapes or mold individuals into different nations but it is individuals who break the mold of nation to build an international movement for change. Therefore, the New Silk Road for Life and No-Nuke must empower ordinary individuals for changing the structures of power by sharing the common experiences of resistance and mobilization against injust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