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못하는 신’에게서 ‘진리의 영’에게로!
사도 17,15-18,1; 요한 16,12-15 / 부활 제6주간 수요일; 2024.5.8.
예수님께서는 삼년 동안이나 직접 가르침을 듣고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이 오시면 깨닫게 되리라고 말씀하시고는 더 이상 가르침을 아끼셨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제2차 선교여행의 길에서 워낙 많은 신들을 신봉하면서 하다 못해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까지 예배하고 있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진리를 설파하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아마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진리의 영’을 받아서 그런 노력을 했던 모양입니다.
바오로의 아테네 선교 이후 무려 천6백여 년이 흐른 후에, 중국 땅에 들어가서 하느님을 모르던 중국인들에게 선교한 인물은 이태리 출신의 마테오 리치 신부입니다. 그는 중국에 파견되어 20년 이상이나 한문과 유학을 습득한 다음에,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등 원시 유학이 담긴 고전 문헌에서 ‘상제’(上帝)라는 개념이 인격신(人格神)의 뜻으로 사용된 용례를 발견하고는 이 개념을 유학과 그리스도교의 연결고리로 삼아서, 1603년에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저작을 저술하였습니다.
바오로처럼 마테오 리치의 이러한 시도 역시도 당대 중국 선비들에게는 반짝 주목을 받기만 했을 뿐이었지만, 보유론(補儒論)의 관점에서 쓰여진 이 책이 조선의 선비들에게 전해지면서는 복음의 불모지였던 조선에 교회가 자생적으로 뿌리내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선교의 기적이 일어난 이 배경에는, 다신교의 풍습에 따라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예배하던 고대 아테네 시민들과는 달리, 마테오 리치가 찾아낸 인격적 천(天)의 개념에 목말라 하던 조선 선비들의 구도전통(求道傳統)이 있음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서적을 통해서 당시 서양 종교로 여겨지던 천주교를 본격적인 종교요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였던 선비들은 당시 조선 사회의 모순을 꿰뚫어볼 수 있었던 남인파 선비들이었는데, 이들은 당시 조선이 성리학적 유학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 마치 유교처럼 숭상한 결과 사회의 공동선을 도탄에 빠뜨리고 만 부패한 권력에 실망하여 과거에 응시하기를 포기하고 새로운 사회로 개혁할 수 있는 참신한 사상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남인파 안에서도 녹암 권철신 문하의 선비들이 실학 공부를 공동으로 연구하기를 원하여 강학회를 열기까지 했는데, 이 녹암계 선비들의 실학 강학회 노력에 천주학과 천주교로의 불을 붙인 인물은 광암 이벽이었습니다. 특히 강학회의 막내였던 정약용은 강학회 중도에 합류한 이벽의 해박한 천주교 교리 지식을 조선 사회의 개혁을 위한 동력으로 삼고자 받아들여서 다른 남인파 녹암계 선비들과는 달리 과거에 응시하여 조정에 출사(出仕)하였습니다.
그러자 정약용을 시기한 노론파 다른 선비들이 엉뚱하게도 그를 천주교인이라 하여 고발하여 축출하려는 사태가 촉발되자 단연 돋보였던 그의 재주와 인품을 유난히 아끼던 정조 임금은 전라도 강진 땅으로 장기 유배를 보냈는데, 결과적으로는 유배형의 형식을 빌어서 보호를 해 준 격이었습니다. 강진은 정약용의 외가였던 해남이 그리 멀지않은 땅이었고, 그 덕분에 정약용은 그 오랜 세월 동안 반대자들의 모함을 받지 않고 외갓집에 소장되어 있던 장서들을 활용하여 천진암 강학회에서 습득한 천주교 교리를 바탕으로 하되 조선 사회의 개혁을 위한 저술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간이 1801년부터 1818년까지 무려 18년입니다. 그리하여 정치, 경제, 법률 등 여러 분야에서 독보적인 저작을 내놓았는데, 공허한 관념론에 빠졌던 주자학풍 전통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었던, 천주교 신앙의 세례를 받은 학풍에서라야 가능한 저작들이었습니다. 이 무렵에 저술된 정약용의 저서들에 영향을 받은 전봉준과 그 동조자들은 1894년에 동학혁명을 일으킬 때 정약용이 지은 ‘경세유표’(經世遺表)를 혁명의 경전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를 편찬한 이래 한국 사회에 일어난 섭리적 역사의 흐름을 간추리면 이러합니다. 공리공론(空理空論)을 일삼던 주자학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으로, 사물의 이치만을 궁리하던 실학에서 그 전제가 되는 인격신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한 천주학으로, 신을 알기만 하던 천주학에서 신을 믿는 천주교로, 믿기만 하려던 천주교 교리에서 사회개혁을 지향하는 다산 정약용의 저술로, 이 저술로부터 동학의 혁명적 시도로, 그리고 이 동학혁명의 실패로부터 비무장으로 독립을 외쳤던 삼일만세운동으로, 그리고 삼일운동의 정신을 초석으로 삼은 제헌헌법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문명은 진리의 영에 의한 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의 영에 의해서 이끌려온 한국의 문명은 한국의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교부 역할을 수행하여 증거했던 바로 그 실사구시의 방향에 따라서, 사회교리가 가르치는 최고선과 공동선의 진리를 증거함으로써 섭리적 역사를 완성하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구원경륜을 알려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아테네 선교 시도 노력이 초기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결국 서방 세계의 그리스도교화로 이어졌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올바른 하느님을 정통 실천으로 증거하려는 노력 역시 동방 세계에 사는 아시아인들에게 최고선과 공동선을 실천하는 이웃 사랑으로 올바른 하느님을 알게 함으로써 아시아 복음화 과업의 초석이 될 것입니다.
앞에서(부활 제5주간 토요일 강론, ‘복음화 제3천년기를 이끄시는 성령’) 아시아 대륙의 여러 종교문화권에 복음을 전했던 선구자들의 노력을 이슬람 문화권(샤를르 드 푸꼬), 힌두 문화권(마더 데레사), 유교 문화권(뱅상 레브) 등으로 살펴본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앙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이슬람 문화권에 속하기는 하지만 지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인 우랄 산맥 남쪽에 위치하여 동서양에서 이주한130여 부족 출신들이 서로 어울려 살아온 까닭에 문화적으로 개방적인 편이어서 종교적 경직성이 비교적 강한 서남 아시아에 비해서는 종교적 보수성이 약한 편이고, 더욱이 자신들의 시조로 단군을 공경하는 전통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들 나라에는 1930년대에 연해주에서 강제로 이주당한 고려인들이 보전해 온 한국 문화의 영향력이 미친 효과도 있어 보입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자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스탄’계 나라들은 과거 고구려와 동맹을 맺었던 돌궐족 국가들이고 그곳 주민들의 주류도 고구려 유민 계통입니다. 또한 바이칼 호수 남쪽에 자리잡은 몽골, 브리야트 공화국, 사하 공화국 등 동북 아시아 북쪽에 사는 민족들도 과거 고조선, 고구려, 발해 시대에는 한민족과 연합하여 살던 먼 친척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도 단군을 조상으로 공경하는 전통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데다가, 최근에는 한류 현상의 영향을 받아서 한글과 한국어 학습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진리의 영’이 영향력을 발휘할 종교문화적 가능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만주 동북3성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말할 것도 없고 만주족도 과거에 여진족으로 불리던 사람들로서 한민족과는 혈통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친화력이 작용하는 아시아인들입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파스카 과업에 있어서 향후의 전망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역사적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한민족에게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졌던 무렵 일어난 교우촌 현상입니다. 우리 민족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18세기 말에 천진암 강학회에 모여 들였던 선비들 중에 정약종은 뒤늦게 합류했으나 가장 철저하게 신앙을 증거한 인물입니다. 주문모 신부의 지도 아래 명도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교리를 가르쳐서 불과 수년 만에 만여 명에 이르는 입교자를 배출했는가 하면, 더 많은 이들에게 교리를 전하고자 ‘주교요지’를 한글로 저술하기도 했으며 조상제사금지령으로 인한 혼란(특히 구베아 북경 주교와 교황청에 대한 실망)과 조정의 배교 협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켜 치명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천주교에 뒤늦게 합류해야 했던 이유는 당시 조선의 사상적 조류인 ‘유불선(儒佛仙)’ 가운데 선도(仙道)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약전, 약용 형제와 달리 배교하지 않고 치명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선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깊이 있게 신앙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 ‘선도’가 바로 고조선 시대 단군으로부터 유래된 민족 고유의 정신전통, 즉 ‘홍익인간’의 가치관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했기에 그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나서는 ‘천주실의’를 참조하여 ‘주교요지’를 저술할 때에 한민족 고유의 하느님 신앙을 그리스도 신앙에 입각하여 정통적인 해설을 할 수 있었으며 무속화된 미신행사를 식별해 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백 년 박해 동안 교우촌 신자들이 암송하다시피 생활화할 수 있어서 박해에 대항하는 사상적 무장을 시켜 줄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점이 중앙 아시아와 동북 아시아에 살면서 단군 공경의 전통이 남아 있는 고조선과 고구려 유민의 후예들에게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 정통적인 신앙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으리라는 선교 가능성의 역사적 근거가 됩니다.
요컨대, 단군을 공경하는 정신 전통이 살아있다는 것은 고조선 시대에 단군이 펼쳤던 홍익인간의 문명과 가치관이 공유될 수 있다는 선교적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그밖에도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옛 한민족이 세웠던 나라들의 유민 혹은 후예들이 살고 있는 동북 아시아 및 중앙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의 사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아시아 교회의 새로운 존재양식’인 종교, 문화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의 대화 선교 활동이 한류 현상과 더불어 이루어지게 된다면, 이야말로 한류가 복음화될 수 있는 길로서 ‘진리의 영’이 이끄실 선교적 가능성은 훨씬 더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저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니라 막연하게나마 하느님을 흠숭하며 홍익인간적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던 아시아인들에게 사회적 공동선 실천으로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영’을 전하는 그날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무릇 진리에는 양(洋)의 동서(東西)라든가 시대(時代)의 고금(古今)도 없는 법입니다. 2천 년 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예배하던 무신론자들을 진리에로 이끄셨던 성령께서는 오늘날 그래도 막연한 하느님 개념을 지니고 홍익인간적 가치관을 수용하고 있는 아시아인들을 진리에로 이끌지 못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