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을 모르면 간화선이나 위파싸나를 알 수없다.
그게 불교의 보편적 현실이다. 그것은 사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공부의 가르침은
가장 기본적인 생각과 개념만 몸과 마음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면
논쟁이나 토론이 거론된다는 것 자체가 아주 어리석은 것이 됨을 알게 된다.
부처님 가르침의 공부는 가장 먼저 부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수행의 바른길 시리즈 다섯 편에 걸쳐서
줄곧 강조하고 있으며, 어떻게 무엇을 해야
부처님을 알고 수행할 수 있게 되는 지
이치를 통해 참뜻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반복 설명하고 있다.
본 저자가 기존 종교들의 경전에 대한 학문적 지식과 선입관이 있었다면
21세기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을 위한 수행의 바른길이란
시리즈를 엮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독자분들 모두 제각기 다양한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하여
나름대로 깨달아가도록 써 내려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경전을 통해 전해지는 부처님 말씀만이
참인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것도 굳이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부처님 말씀의 가르침은
의식의 변화와 혁신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부딪치는 대상을 통해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생각을 바꿔야 하고,
기존 나의 상식을 버려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사는 것에 있다.
그것은 21세기에 사는
현대인의 의식과 가치관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왜냐면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이며,
부딪치는 모든 대상들을
순간순간, 그때그때, 즉시즉시,
"있는 그대로 보고" 실천을 해야
올바른 길로 갈 수 있기때문이다.
깨달음에 대해,
나를 버려야 한다 혹은 없애야 한다는 등의 수많은 표현들을 하지만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면 된다.
실제로 부딪치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볼 수 있게 될 때,
나라는 에고는 자연스럽게 순간 사라져 없어지게 되기때문이다.
즉 내가 나를 없앤다 혹은 버린다해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그 말의 의미대로 따른다면 죽는 것말고는 없다.
무아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 단어 그 자체의 의미대로하겠다면 죽으면 된다.
무아나 깨달음이나
그 단어 자체의 의미를 이해하고 따르려고 한다면,
깨달음이나 무아라는 상황의 체험을 맛본다는 것은 불가능이다.
인간이란
일상생활을 통해 참되고 어질고 선하게,
항상 베푸는 마음을 가지고
지혜롭고 올바르게 헤쳐나갈 수 있게 될 때,
스스로 순간순간, 즉시즉시 깨닫게 되며,
그때그때, 무아의 의미와 경우를 체험해 볼 수 있게 된다.
오늘도 어느 절의 수행 중인 사진인지
많은 수행자가 두 줄로 길게 양 벽을 쳐다보며
허리를 곳곳하게 세우고 아주 근엄하게 명상을 하는 모양이다.
뭘 하고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본다.
거기에 부처님이 오실까 안오실까?!
아니, 계실까, 안계실까??!!
왜냐면 모든 수행은 부처님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기때문이다.
이끌어 주시는 실체가 부처님이시기때문이다.
부처님 말씀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냥 한 단어로도 가능하며,
그것은 공자님 예수님 말씀과 그 본질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니라면 아직 부처님을 모른다는 것이다.
부처님을 안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와 법, 진리를 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만물박사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부처님께서 직접 주신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이며,
그게 깨달음이며,
내가 만물을 다 깨우쳐 무엇이든지
술술 답을 할 수 있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깨달음의 실체를 알아차리는 것이며,
'자연의 이치' 그 자체가 곧 '부처님'이심을 알게 된다는 것이며,
그게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깨달음의 목표가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물론 부처라는 보통명사는 이해할 수 있지만,
여기서 문제는
내가 그렇게 되겠다는, 내가 주체가 되어, 그 목표를 가지게 되니
아무리 죽을 똥 살똥 해봐도 그건 불가능이다.
항상 '한 분이신 부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보통명사의 부처라는 단어 자체에 내 마음이 갇혀져 있으니
죽었다 깨어나도 그것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다.
그렇게 가르쳐왔으니 그게 한계라는 것도
지금 현대 불교에서 충분히 이해해볼 수도 있겠지만,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면
지금의 현대 불교는 부처님 가르침을 결코 올바르게 가르치고 배울 수 없으며,
현대인들이 가진 의식과 가치관의 수준을 결코 넘을 수 없기에 반드시 퇴행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진리다.
지금도 불교에서 왜, 간화선 혹은 화두라는 단어들을 가지고 어물쩡거리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부처님을 모르기 때문이며,
또한 위파싸나는 남방불교이고 간화선은 북방불교라는 등의 말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물며 그게 안되니,
아예 보따리 싸서 남방불교의 나라로 가는 사람도 종종 눈에 띈다.
알면 다 똑같은 부처님 가르침이다.
그 수행을 이끄는 실체를 모르기때문에 그렇다.
염화시중의 미소를 알면 그 답을 알게 될 수도 있다.
그 미소에 대한 수많은 글이 있지만,
미소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설명한 곳은 본 적이 없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전체 모인 사람들 마음 속에 들어갔지만
알아차린 사람은 가섭만이 알아챘다는 말이며,
그것은 가르침을 이끄는 실체가 부처님이시라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부처님 가르침의 실체는 똑같다.
모르니까,
아직도 수 백, 수 천년 전의 예식이나 경전을 따른다.
그냥 부처님만 알 수있다면,
일상생활을 통해 잘못되고 부족한 것을 잘 가리어(자아성찰 - 정)
스스로 화두를 만들고, 부처님께 다가가서 반성과 다짐의 약속을 한다.(화두기도, 화두선 - 혜)
그리고 다시 일상사로 돌아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올바른 실천 - 계)
이게 전부다.
누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내가 해야 된다.
그게 '믿음의 공부'다.
(참고 : *위파싸나도 '부처님과의 약속'이다.
즉 '사랑'을 말한다. *계의 본질은 '마음'이다. )
하지만 인간인 이상 또 잊어먹고 또 반복한다.
즉 깨달았다 한들, 돌아서면 잊어먹고
다시 깨닫기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게 인간의 본모습이고, 참모습이다.
그렇게 만들어져있다.
양심에 손을 얹고
(본래마음자리)
순간순간 내 모습을 부처님께 비추어 잘못을 바로 잡아가는 것
(자아성찰- 반성, 다짐, 감사),
그게 수행이다.
그것을 계정혜의 수행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냥 그렇게 하면 되는 데
부처님, 하느님 즉 이끄는 실체를 모르니
너무 어렵고 고차원적으로 심오하게 한다.
사는 동안 부처님 하느님을 알고 살아갈 수 있다면,
요즘 흔히 메스컴에 나타나는,
절이나 교회의 종교지도자로서
그같은 탐욕스런 추태나 파행된 행동은
스스로 용납이 안되며,
설사 그러한 불미스런 일들이 스쳐지나간다해도
바로 알아차리고
다시 원래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원동력(불심, 믿음)을 스스로 가진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야겠지만
전체를 이끌고 있는 것은 '불성'이고 '성령'이다.
그게 없으니 난리고,
모르니 욕심과 추태가 난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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