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약 자손의 번창 (창37:~출18:) | 시내산 언약수립 (출19: ~ 레위기) | |||||||||||
자손의 생육과 도전 (출1:-10:) | 자손의 해방과 승리 (출11:-18:) | 첫 번째 언약 (19:-33:) | 두 번째 언약 (34:--40:) | |||||||||
자손 생육과 시련 (출1:-2:) | 애굽의 도전준비 (3:-4:) | 애굽을 향한 도전 (5:-10:) | 애굽에서의 해방 (11:-13:) | 홍해에서의 승리 (14:-15:21) | 신 광야에서의 승리 (15:22-18:) | 수립 준비 (19:) | 계명 수여 (20:) | 율례 수여 (21:-23:) | 규례 수여 (24:-31:) | 증거판 파괴 (32:-33:) | 증거판 수여 (34:) | 성막의 규레 (35:-40) |
34장부터는 첫 번째 수여하신 증거판을 모세가 깨트리므로 두 번째 언약을 하시는 내용입니다. 그 중에서 34장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두 번째 증거판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수여하시는 섭리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범죄로 인하여 파괴된 첫 번째 증거판 대신에 두 번째 증거판을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에게 수여하시는 섭리를 하십니다. 1절부터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두 돌판을 직접 만들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직접 만들라고 명하심의 의미는 무엇 때문일까요? 32장6절에서의 첫 번째 돌판은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것이요 글자 또한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돌판은 모세에게 직접 만들어서 가져오라고 명하시는데 그 이유는, 깨트린 모세에게 회복하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깨트린 돌판에 처음 판과 같은 말씀을 쓰는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절부터의 내용은 여호와가 가나안 원주민 족속을 쫓아낼 것에 대하여 언약하시는 말씀입니다. 본문 4절에는, 성경에서 족장이나 지도자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나아갈 때마다 사용되는 표현 하나를 사용하는데 그것은“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입니다. 창세기22장3절의 아브라함이 이삭이라는 제물을 가지고서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때에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라고 합니다. 여호수아3장1절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자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라고 말씀합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서 여호와를 알게 되고 믿게 된 자들의 행위적 표현으로서, 이제는 자신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존재와 그의 전능하심(창17장1절)의 속성을 알게 되고 믿게 된 아브라함은,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주저함이 전혀 없이 아들을 데리고 제단의 장소인 모리아 산으로 향하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3장의 표현도 그렇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정탐군의 보고를 듣고서 요단강 도하를 위하여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본문에서의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으로 향합니다.
이들 모두는 몸과 마음이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믿고서 행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이러한 행위에는 주저함이 없습니다. 벧세메스로 향하는 암소들처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앞만 보고 갑니다. 사도 바울처럼 달려갈 길을 마치기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처럼 말입니다(딤후4장7절). 천로를 걷는 백성들의 자세를 말씀합니다. 세상의 여러 유혹과 도전과 욕정들을 거부하고, 오직 성도가 싸워야 하는 것들을 대적하며 하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하나님 믿어짐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5절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깎아 만든 두 돌판을 가지고 시내산에 오를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오신 것입니다. 모세 곁에 오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그래서 6절에 “여호와라 여호와라”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름의 뜻은 ‘언약대로 이루시는 자’입니다. 언약을 하시고 그 언약을 그대로 이루시는 전능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시내산까지의 모든 과정을 당신의 이름대로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광야 여정과 가나안 땅까지도 언약대로 이행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대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는데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당신의 속성을 말씀하십니다. 6절입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애굽 땅에서 400년간 종살이를 하던 백성을 언약가운데 해방시켜 시내산까지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를 베푸셨고, 이들에게 노하기를 더디하셨고, 인자와 진실로 이끄셨으므로 지금까지 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신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이름대로⟩ ⟨언약⟩ 때문입니다.
이 언약 때문에, 지금까지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배역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숭배하여도 진멸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 때문에,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보라 네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리니”(11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가나안 땅에 자리잡고 대대손손 살아오고 있는 이들 족속들을 쫓아내고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12절부터는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주시는 가나안 땅에서 준수해야할 사항들을 명하십니다. 원주민 족속들과 언약을 맺지 말고 우상을 제하라고 하십니다. 원주민과 타협은 결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명령들을 지켜야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언약대로 조건없이 주시기 때문에 들어가서 지켜야할 것들을 말씀하십니다.
당시 가나안 땅의 족속들은 이미 세상의 모든 악행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족속들마다 각기 다른 우상들을 섬기며 음란하며 신들과의 온갖 추잡한 일들이 성행되고 있었습니다. 현재 이 세상의 모습과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고대 사회나 현대 사회나 죄짓는 모습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면, 위의 내용에 대하여 현재의 교회(성도)와의 관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이것을 중생이라고 하는데 이때부터 성령께서 내주하시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도가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육체의 소욕은 가득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몸에는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공존한다고 로마서7장에서 바울은 증거합니다. 그리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 전쟁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원주민들과 싸우는 것이 성도의 영적 전쟁에 대한 모형이요 그림자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언약대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원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명하시는 것일까요? 첫째는 올무가 되기 때문입니다(12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들 주민들과 약속을 하게 되면 그것이 범죄의 유혹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9장에서, 가나안 땅의 기브온 주민들이 꾀를 내어 찾아와 조약을 맺자는 제안에 여호수아는 조약을 맺게 되었는데 그것이 올무가 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원주민들의 제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으라고 하십니다(13절). 여호와외에 다른 신에게 절을 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질투를 하게 하신다고 하십니다(14절).
둘째는 신들의 희생 제물을 먹게 되기 때문입니다(15절). 가나안 땅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이익과 편안 그리고 욕심을 위하여 언약을 맺게 되어 점점 가까이 하다보면 그것이 그들이 섬기는 신들의 희생 제물을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타협은 무너지는 전조입니다.
셋째는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16절). 당시의 신들을 대표하는 신은 바알과 아세라입니다. 이 우상들은 풍요와 다산입니다. 그러다보니 세워놓은 신들과 음란한 행위는 자연스럽고 또한 제사장들과도 성행되었습니다. 풍요와 다산은 세상의 흐름이요 세상의 추구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상들을 제작한 것이 인간입니다.【풍요와 다산을 위하여 지금 교회도 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