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 이은 출애굽기를 시작하면서. . .
창세기를 마치고 출애굽기가 이어집니다.
중국 방문여행을 다녀오면서 자주 뵈었던 조선족 목사님을 통해 온라인 성경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셨고 이제 출애굽기도 온라인으로 몇 나라에서 주의 백성들이 함께 나누는 귀한 시간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귀한 하나님의 은혜에 저 자신은 한 글자 한 글자 두려움과 긴장함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혹이라도, 썩은 막대기보다 못한 자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 그리고 사랑과 은혜가 흐려 질까봐 때로는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입으로 하는 강해와 설교도 두렵지만 글은 더더욱 두렵고 떨리는 마음입니다.
성경만이 인생의 해답입니다.
사람은 내일 일을 모릅니다. 이 세상 인간 중에서 내일 일을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일 일을 알려고 많은 사람들은 점술가를 찾아 가서 귀신과 접속하려 합니다. 또한 내일 일을 몰라서 먼저 안전 보장을 위해 무당을 찾아가서 귀신을 쫓아내는 굿을 하거나 부적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시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왜냐면 그런 것들마저 확실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면서 유한하고 시공의 지배를 받는 인생은 내일 일을 모르다 보니 항상 두려움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들에게 성경은 내일에 대한 기쁜 소식과 완전한 복음을 증거합니다. 보장된 내일을 확실한 소망으로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성경은 창조자에 대해 전해 주고 그로부터 주어지는 구원과 하늘나라의 삶이 어떤지 상세히 가르쳐 줌으로 확실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도록 해줍니다. 내일 뿐만 아니라 죽음도 알 수 있고 그 이후까지 알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인간 자신의 정체성도 확인됩니다. 내가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나는 누구인지를 알려 줍니다. 죄인된 인간의 뿌리는 땅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뿌리는 하늘입니다. 그래서 거꾸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오늘 이렇게 여호와의 성호를 찬양한다는 것 자체가 저로서는 기적입니다. 원래의 제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의 본 모습은 사단의 종으로서 싸움쟁이였고 욕심쟁이였고 거짓말쟁이였습니다. 살아가는 삶 자체가 나 중심적이었으며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나고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 뜻보다 주의 뜻대로 되기를 사모합니다.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출애굽기 공부를 통해서 보다 더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빕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시요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저같이 악한 인생을 사용하셔서 성경일독학교와 창세기 온라인 강해, 창세기 젊은이 성경공부 그리고 출애굽기 온라인 강해까지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계속 요한계시록까지 허락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 책들이 저의 형제들과 후배들에게 거저 나눠지기를 언제나 소원합니다.
김재용 올림
서론 . . .
성경은, 유일하신 전능자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보여주신 계시서요 생명입니다. 성경을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성경을 통하여 자신을 열어서 보여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열어서 보여주시지 않으시면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자기 마음대로 신을 인식하고 또한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조각하여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모른 체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모습과 같습니다.
성경은 해석이 중요합니다. 1600여년 동안 40명의 기자들을 통하여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읽어만 가기에는 어려운 부분들이 많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무엇이며 하나님의 정말 존재하시는지, 존재하신다면 그의 속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성경속의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하나님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도 참 어렵습니다. 행전8장에서, 오순절을 지키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던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가 이사야를 읽고 있습니다. 빌립이 가서 깨닫는가를 물었을 때에 그는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 해석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른 해석입니다. 자신을 열어서 보여주신 내용이 성경인데 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성경을 타락한 인간이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성경은 ‘성경 안에서 성경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사람은 눈뜨면서부터 상황을 맞이합니다. 날마다 문제에 부딪히고 그 문제를 해결하다보면 또 하루가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같은 상황을 사람마다 해결하는 방식은 다르게 나타나고 지역마다 다르며 시대마다 다릅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5.18 사건은 발생한 현상입니다. 이것을 그 당시에는 폭거라고 해석을 했고 엄벌했으나 그런데 지금은 폭거가 아니라 의거였다고 재해석 되었습니다. 성경해석은 이럴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성경 안에서 성경대로 해석하는데 있어서의 핵심은, 바로 ‘계시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계시된 ‘성경 전체의 명제(하나님이 하셨다) 안에서 각 내용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셔서 자신을 알게 하시고자 하신 것이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은 오직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속성을 확인하고 확인된 그 내용 안에서 흘러가는 각 부분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의 계시적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은 타락자이기에 저자이신 하나님의 계시적 관점을 떠나면 정확한 해석이 될 수 없고 자기 해석이 되고 맙니다. 성경은 진리 안에서 거룩한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말씀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진리성과 영원성’입니다.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또한 숫자를 초월하고 인간의 눈에 보이는 형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구약의 메시야에 대한 언약과 신약의 성취된 메시야가 하나가 되어 해석되므로 구약의 해석은 그리스도께로 연결되고 신약의 해석은 구약을 근거로 율법의 성취됨과 완성됨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다보면 예화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 예화들이 성경의 진리의 거울에 비추어 볼 때에 잘못된 것들이 흔하게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시공의 제한을 받고 때가 되면 변해 버리는 상황이나 내용을 가지고서 진리 제시에 비유나 예화로 소개하는 지도자와 교사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의 신학계와 교계는 온통 〈변명과 핑계꺼리〉를 가지고 진리를 논하고 있습니다. 성경도 상황에 따라 변한다고 하여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진리 앞에서도 변명합니다. 예수님 시대와 사도 시대의 목숨 걸고 사수했었던 진리와 비진리와의 싸움은 없고 온통 눈에 보이는 교회 규모와 하는 일(사역)에 미쳐 버렸습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이 진리로서 성경은 자신의 이론에 끼어 맞추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아성취와 자신의 의를 드러냄〉입니다. 자신의 드러냄에 필요한 것이 결과다 보니 성과위주에 빠집니다. 변명과 함께 집요하게 파고들며 예수님의 진리를 막는 것이 바로 〈나열식이요 설득〉입니다.
성경해석을 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을 향한 ‘통일성과 경외성’입니다. 성경은 텍스트입니다. 이 텍스트를 해석하여 글로 표현하거나 말로서 강해 혹은 설교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어렵고 중요한 일들입니다. 이러한 사역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낱말들을 사용하여 한 구절을 만들고 한 문장을 다듬으며 전체적인 성경 내용과 하나가 되게 하여서, 창조주와 전능자로서 언약하신 성부하나님과, 그의 언약대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신 구속주 성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언약대로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기억나게 하시고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며 천로를 걷게 하시는 성령하나님을 정확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만약, 설교와 강해를 하는데 있어서 그 내용이 통일되게 흘러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세상의 교훈이나 도덕처럼 부러진 것이요 토막난 것에 불과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논리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거나 통일되고 하나되지 않는다면 위장된 것이거나 잘못된 내용입니다. 엡4장4절에,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종이요 사명자입니다. 각 지체의 사명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체는 지체로서의 소명의식이 중요합니다. 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할 수 있다고 해서 무엇이든 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라 해서 막말과 행위를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아직 미숙자입니다. 진정한 자유자는 십자가의 구속을 몸에 집니다. 입술에 재갈을 물리고 행함에 십자가의 절제 사슬을 몸에 두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고전8장9절에,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전9장19절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라고 하십니다.
성경 말씀을 해석하여 가르치는 교사나 목사 혹은 직분자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요 사명자로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절제함이 중요합니다. 또한 읽고 듣는 독자들에게도 신령한 눈이 열려져서 정확한 성경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말씀과 같은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