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은 야곱이 유다에 대하여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움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8~12절)
위의 예언 가운데 ‘사자’는 ‘강한 통치자’를 비유하고, ‘규’와 ‘지팡이’는 ‘왕권’을 비유한 말입니다. 그리고 ‘실로’는 ‘평정한’이라는 뜻을 가진 말인데, 메시야의 특징을 나타내는 통칭입니다.
그리고 ‘나귀’나 ‘암나귀 새끼’를 포도나무에 맨다는 말은, ‘나귀’는 전쟁에 쓰이는 말과는 달리 일상 생활에 쓰이는 짐승인데, 평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잡목에 매지 않고 ‘포도나무’에 맬 만큼 포도나무가 흔할 정도로 많다는 표현입니다.
‘포도즙’에 복장을 빤다는 말 역시 그럴 만큼 포도주가 풍성하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에 대한 야곱의 예언 내용을 정리하면, 유다의 자손에게서 통치자가 나와서 모든 형제들로부터 찬송을 받고 그 위가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유다 자손이 아주 평화롭게 풍요를 누리며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 가운데 유다가 범한 죄는 어쩌면 가장 심하고 악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가 자기의 자부를 범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고 자기의 동생 요셉을 죽이려다가 애굽으로 팔아 넘기는 데에도 동참했던 자입니다.
이러한 그에게 더할 나위없는 축복을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그들의 범죄를 인하여 저주의 예언을 하였는데 말입니다.
분명히 유다는 자기의 행위에 의하여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같은 사실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게 하시고, 모든 행사가 여호와의 뜻과 주권에 있음을 알게 하려는 뜻입니다. 그 예언대로 유다 지파에서 다윗 왕이 나와서 그 왕위가 계속되다가,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기까지 보존되어 떠나지 아니합니다(마1:1).
다음 13절은 야곱의 열 번째 아들인 스불론에 대하여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스불론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그가 거주할 땅의 위치와 경계에 대한 것입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배가 정박하는 시돈까지 이르는 해변에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각 지파에 대한 축복을 선포할 때에 스불론 지파에 대하여는,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신33:18,19)라고 합니다.
위의 두 예언된 내용의 공통점은, 스불론 지파가 여호수아의 땅 분배시 내륙에 거하면서도 지중해를 통하여 해상 무역을 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으로 보입니다(신33:18 참조).
야곱이 스불론을 향한 예언해서 특이한 점은 거주지에 대해서만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스불론’이라는 이름은 ‘거하다’라는 뜻을 가진 ‘자발(זבל)’에서 유래되어 ‘거주’, ‘거주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의 거주 지역은 ‘해변에 거주’하는데,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고 하며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라고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원문에서 확인할 것은, ‘해변이라’(레호프 לתוף)입니다. 여기서 ‘레’는 ‘~을 향해’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해변으로 향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다음 14절과 15절은 야곱이 잇사갈에 대하여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잇사갈에 대하여,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라고 합니다. 나귀는 농사를 위해 필요한 짐승인데, ‘건장하다’는 것은 뼈대가 굵고 강한 체격을 지닌, 특히 짐을 운반하는 데 잘 적응된 몸입니다. 그러나 잇사갈 지파는 ‘나귀’라는 말이 암시하는 것처럼 공격적이며 진취적이기 보다는, 수동적이고 우직하기만 하여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지파가 됩니다.
그래서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 앉았다’는 것은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그의 형제들을 섬긴다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그의 후손들은 성실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지만 지배 계층을 형성하지 못하고 피지배 계층으로서 섬기는 자가 됩니다.
또 한 가지는,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에서 저들이 받은 땅의 위치를 말하는데, 이들은 이스르엘의 매력적이며 비옥한 고원을 포함한 갈릴리 저지대 평야를 기업으로 할당 받음으로 성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