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은 요셉이 형들의 염려를 듣고 너그럽게 위로하여 주는 내용입니다.
애굽으로 다시 돌아온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15절)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합니다.
본문에서, ‘다 갚지나 아니할까’라고 하는 표현을 다른 번역본에는 ‘반드시’가 들어가서 ‘우리가 그에게 한 모든 악을 반드시 우리에게 갚지나 않을까’(바른 성경),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반드시 갚으리라’(킹제임스 흠정역)고 되어 있습니다. 즉 형들의 마음에는 요셉이 과거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반드시 보복할 것이다고 생각하며 불안해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찾아가 아버지 야곱이 살아생전 남긴 유언이라 핑계를 대며 말을 전달하는데, “당신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습니다(16,17절).
그리고 곧 이어서 요셉의 형들이 직접 와서 요셉 앞에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라고 말을 합니다(18절).
형들은 지난날 요셉을 미워하여 죽이려다가 애굽에 팔았던 잘못이 못내 마음에 걸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비가 죽은 후라서 동생 요셉의 보복이 두렵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범죄로 인한 두려움을 아버지를 핑계 삼아서라도 면하고 싶은 것입니다.
범죄는 처벌받기 전까지는 마음의 고통을 일으키는 법입니다. 그래서 형들은 동생 요셉에게 용서를 빌게 되고 요셉은 형들의 말을 듣고 울었으며 그리고 형들을 위로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19~21절)
사실 요셉은 일찍이 용서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들의 핑계에 울며 그들을 도리어 위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므로 요셉의 형들의 악행도 선으로 바꾸시는 전능자이십니다.
이 세상 모든 만사도 부분적으로나 지엽적으로 살펴보면 참으로 악한 것도 있고 불행한 일도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전체적으로 보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과 부분에 지나지 아니하는 것들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위로하는 내용을 펼쳐 상세히 정리해 보면, 첫 번째는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하는 이 요셉의 대답에는,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어찌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대신 형들을 심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표면적 현상적으로는 형들이 자신이 죽이려고 하고서 결국에는 상인에게 팔아넘겼지만, 실제 원인자요 인도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보호하시고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는 섭리 과정에서 요셉 자신을 그와 같은 길로 이끄셨다는 것으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형님들이 나를 해하려 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꾸셨다고 위로합니다. 여기서 ‘선’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제아무리 꾸미며 술수를 부리면서 자기들의 계획을 세울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하나님의 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선’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뜻을 ‘하나님의 선’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 8장 28절에서 교훈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본문에서 ‘선으로’는 원어로 ‘레토바’(לטבה)입니다. 여기서 ‘ה’는 어떤 ‘방향’이나 ‘장소’를 향한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레토바’는 ‘선한 방향으로’란 의미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역사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시간과 공간을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약속하시면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서 뜻대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선’으로 형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선’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장차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모든 선을 이루실 것에 대한 언약입니다. 요셉은 언약대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위로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깨닫고 되새기고서 넘어가야 할 것은, 인간의 계획과 행위는 ‘그 뿐이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가는 ‘길’을 몰라서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나의 걸음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내일을 몰라서 불안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자로서 나의 모든 것을 이미 계획하셨습니다(잠16장9절). 하나님께서 하셨고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성도들에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14:6).
‘길’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우리 인생이 살아가는 현재부터 미래의 모든 시간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그 길을 모르고 갑니다. 깜깜한 가운데 걸어갑니다. 보이지 않으므로 인간은 두려워하고 놀라고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길’이시다는 것은 그분 자체가 밝음이요 빛이요 보임이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보게 되면 내 인생이 갈 길을 몰라 서성대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며 내일을 향하여 마음 놓고 편하게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과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 나의 ‘길’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진리’라고 하십니다. ‘진리’는 세월이 가고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초월한 하나의 이치입니다. 인간은 진리를 찾고자 종교를 가지고자 하고 살아갑니다. 오직 ‘참 이치’는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생명’이라 하십니다. ‘생명’은 인간의 궁극적인 소원이요 몸부림이요 절규인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에 해답이 바로 당신 자신인 ‘예수’라고 증거하십니다. |
따라서 언약자손인 성도들과 교회는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좌절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택한 백성 곧 언약 자손은 겁날 것이 없습니다. 어느 누가 해하려 하여도 그 해로운 것을 하나님께서 선한 것으로 바꾸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백성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가치 기준인 진(眞),선(善),미(美)를 초월하신 거룩한 자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