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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에서 11장까지의 의미분석 | ||
언약자손의 보호 | ||
3장 아담 심판과 보호 | 4-5장 심판과 보호 | 6-11장 인류 심판과 언약 |
1-7 아담의 범죄 8-19 하나님의 심판 20-24 하나님의 보호 | 4:1-8 가인의 범죄 4:9-12 하나님의 심판 4:13-5: 하나님의 보호 •4:13~24/가인에게 베푸신 긍휼 •25~5:32/아벨에게 베푸신 긍휼 | 6:1-12 인류의 죄악 6:13-8:12 하나님의 물심판 8:13-9:17 하나님의 언약 9:18-11: 언약의 성취 |
4장과 5장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범죄한 가인을 저주하며 심판하시고 그리고 은혜로 보호하여 주시는 섭리 내용인데, 이 중 1절에서 8절까지는 가인의 범죄에 관한 내용입니다.
당시에는 이미 아담과 하와에게 다른 자녀들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아벨을 죽인 후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을 14절에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의 이름만을 성경에서 소개하실까요? 또 한 가지는, 성경에는 왜 유대 민족을 사용하셨고 또한 역사의 시간도 때로는 수백 년을 뛰어 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시간마다 이어지는 행적들을 자세히 기록하셨을까요?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말씀입니다. 계시된 성경의 중심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속성들을 나타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구별된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가르치는 생명의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도들이 구원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는 지혜서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일을 다 기록하셨다면 엄청난 양과 부피가 되겠지요.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자기 백성의 구원에 필요하여, 시간과 형상도 때로는 일일이 구체적으로 기록하시고 어떤 때는 몇백 년을 그냥 지나가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담의 여러 자녀들 가운데서도 가인과 아벨 두 사람만 사용하셨고 그리고 모형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
4장 내용은 잘 아시는 것처럼,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에게서 태어난 가인과 아벨의 하나님께 제사 드림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태어난 두 아들은 각각 다른 일을 합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1,2절)
하와가 아담으로부터 임신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복을 주시며 아담으로 번성하고 생육하도록 언약하셨습니다(창1:28).
범죄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한 아담은 하나님께로부터 범죄에 대한 저주는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언약에 따라서 아담으로 아내와 동침하여 가인과 아벨을 출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동생 아벨은 양을 치며 살게 되고, 형 가인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세월이 지난 후에 각자에게 주어진 일들의 수확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3~5절상),
본문에서 확인되는 것은 제물과 제물을 바치는 자는 동일선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레위기에서 ‘안수’를 통해 확인됩니다. 그런데 제사를 받으시는 여호와께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고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셨습니다. 제사 열납의 조건을 무엇으로 결정하셨는지는 본문에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제사의 종류만 구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성경을 중심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셨고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셨을까요?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습니다(창3:24). 그리고 그들에게 언약대로 자녀들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들 자녀들은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죄로 인해 사영체가 된 인류의 조상) 말미암아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제사를 드려야 하고 피조물이기에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장성하여 창조주시며 그들에게 결과물을 얻게 하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받으시는 주권자 하나님께서 가인과 가인의 것은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과 아벨의 것은 열납하셨습니다(4~5절). 창세기 4장에서 드러난 이 사건의 실상은 제사 제물의 차이만을 말씀하고 있는데 ‘땅의 소산’과 ‘양의 첫 새끼’였습니다. 이와 같은 두 제물의 차이에서 열납의 가부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결과의 의미와 성경은 성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기 위함인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이것을 진리가운데 깨달아야만 이어지는 모든 내용들도 흔들리지 않고 은혜가운데 머물게 됩니다.
가인은 자신이 종사하는 일 곧 농사짓는 일을 통하여 거둔 땅의 소산인 곡식으로 드렸습니다(3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벨 역시 자신이 종사하는 일 곧 양치는 자로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받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벨의 제사를 ‘믿음의 제사’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4절)
아벨은 믿음으로 아벨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의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앞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합니다. 즉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의 주체는 누구이며 이 ‘믿음’의 성격 등에 대해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정의합니다. 이 말의 뜻은,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이, 후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아들로 태어나 제물이 되어 택한 백성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실 것을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을 아벨은 아직 보지 못하였으나 그것에 대한 증거가 양의 첫 새끼를 잡아 피흘려 제사를 드린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양의 첫 새끼를 잡아 하나님께 드린 아벨의 제사가 믿음으로 드린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의 본문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말하거나 설명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실체가 예수님이며 ‘믿음’의 증거도 능력도 그리고 본질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이 자신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린 제사의 본질은 예수십니다. 본문의 제사는 제사의 첫 출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의 샘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시다는 것을 계시하심입니다.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크고 웅장하며 대단한 정성으로 드린다 하여도 열납하지 않으십니다. 본문의 제사의 출발에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성경적 믿음은 구원과 직결되며 생명이요 천로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저들의 생각과 마음대로 제사를 행하며 주도합니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받지 않으시며 인간의 어떤 것도 열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본문 첫 제사를 통해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는 예수님입니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모형적으로 보여주시는데 첫 출발이 ‘가죽옷’이었으며 그리고 ‘양의 첫 새끼’입니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입니다. 이러한 동물에 대해 레위기에서 지정하여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전의 인간은 자신을 믿거나 힘센 자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육체를 지니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죄와 함께 신은 부정하고 오직 이 세상만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또한 육체의 사람들은 진리가 없고 그리고 해답이 없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살아갑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없으므로 모두가 옳다고 서로 여기면서 공존하며 살아갑니다. 편리에 자신을 모두 맞춰 버리고 정통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타성에 젖어 살아갑니다. 여기에 연약한 기독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대체로 육체적 삶을 부요하게 하는 현실적이며 맹신적 믿음으로 살아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진리는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
인간은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옷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자 하는 제사를 드리지 않고서는 구원이 결코 없습니다. 이 옷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킵니다(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 옷을 입음으로 죄인이 의인이 됩니다. 죄인의 구원은 알멩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도 자신의 모습으로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받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팔에 입혀진 털로 말미암음입니다. 나의 모습 자체만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죄인의 구원은 옷으로 인해 얻게 됩니다. 옷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이 옷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갈3:26~27). 예수님에 의해 천국 가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부분이 확실하게 정리되지 않으면 인간은 끝까지 자신의 행위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고집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들의 의가 전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 행위의 결과로 얻어져야만 긍정합니다. 자기 행위가 개입되어야만 결과를 받아들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자는 결코 은혜를 입을 수가 없습니다. 생명과 평강을 누릴 수가 없고 하늘로부터 내려지는 위로를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내가 죄인임’을 소유한 자만이 이 풍성한 위로와 평강과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
아벨은 양을 제물로 하여 피와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의 제사를 왜 받으셨는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알려주셔서 우리에게 기쁨과 찬양과 영광을 돌리도록 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도 아벨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으신다는 것을 본문에서 계시하심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 모두 같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엡2:8). 하나님께서 주셔서 믿게 하시고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두 행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인본적으로 보면서 인간의 노력과 열심과 정성으로 보면 절대 안됩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택자들에게 첫 제사를 계시하신 사건이며 오직 예수만 받으신다는 진리를 선포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만 받으시며, 명령하신 장소에서 받으시며, 지정하신 제사장으로만 받으십니다. 이는 장차 영원한 제물되시며 영원한 성전되시며 영원한 제사장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며 믿음의 실체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입니다.
즉, 예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며 예수님 없는 모든 것은 전부 가짜라는 것입니다. 예수로 위장한 내용과 교리와 모습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영 분별, 정말 중요합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 하나는 ‘제사’입니다. 이 제사는 내가 자의로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맘대로 하는 제사는 하나님께서 싫다고 하십니다. 그만두라고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대로 순종하여 드려져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언약대로 죽으시고자 이 땅에 오시는 메시야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계시하시고자 그토록 구체적이고 집요하게 하나하나 기록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제사와 관련된 법들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제물 자체에 효력이 있거나 효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효력의 실체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은 제사를 드려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제사의 실체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 보좌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또 죽는 것은 없습니다. 한 번의 죽음이요 영원한 죽음입니다(히9:12). 이제 우리 성도들은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게 됩니다(롬12:1). |
5절 후반부에서 8절까지의 말씀은 분하고 안색이 변하여 동생 아벨을 시기하는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며, 예고하신 대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내용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은 결과에 대해 몹시 분하여 안색마저 변하는데(5절후),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가인을 책망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6,7절)
위의 본문에서 의문이 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인과 아벨이 각자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을 통해 얻은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가인과 아벨 이전에는 사람이 제사드린 적은 없었으며 또한 제사에 대한 안내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신 것입니다. 이에 가인은 분하였고 안색마저 변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전능자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향하여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며 악을 행하였다고 책망하셨으며 그리고 그에게 ‘죄를 다스리는 자가 될 것이다’라며 장래를 예고하십니다. 여기서 가인이 ‘악을 행하였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제사드린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법이며 섭리입니다.
이즈음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선’과 ‘악’ 그리고 ‘의’와 ‘불의’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이어지는 성경 내용에서 계속 언급되는 용어이기도 하며 또한 성경을 깨닫는 데에 큰 흐름이며 핵심적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위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선을 행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본문에서 가인의 악은 하나님께서 열납하시지 않는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선’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이며, ‘악’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절대 기준이 되시며 그가 만드시고 계시하셨습니다. 또한 ‘의’는 -도덕이나 물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 하나님의 선택으로 은총을 입게 된 것을 말하며 ‘불의’는 하나님의 은총에서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의인’은 ‘하나님께 선택되어 은총을 입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가리키는 ‘의’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판단은 타락한 이성에서 행해지는 상대적이며, 기준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지식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판단이나 기준 역시 모두 죄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마저도 판단합니다. 상대적 기준을 가진 인생이 절대적 기준을 가지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들을 판단한다는 것은 교만이요 사악하다는 증거입니다(요7:24,8:15). 또한 타락하여 한쪽으로 치우친 사고 체계를 가진 자가 법을 만들고 규율을 만들어도 그것은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들이 하는 일들도 모두 자기중심으로 잣대를 재고 이기적이며 언제나 사심을 갖고서 모든 일들을 행합니다. |
성경은 인간적 눈과 생각으로는 결코 보여지지 않습니다. 성경 저자의 뜻은 저자의 시선으로 보며 해석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 죄인되었음을 고백하는 믿음과 눈으로 보아야 하며 하나님과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겸손한 자의 시선에서만 보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선과 악’의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절대적 기준이 없으면 서 있으나 넘어진 자입니다】 |
위의 본문에서 ‘네가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을 두드리느니라’고 하나님께서 가인을 책망하시는데, 이 말의 뜻은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들어오려고 문 앞에 잠복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예고하여 주시는데, 이 말의 뜻은 가인에게 죄의 욕망이 있으므로 죄를 범하게 된다는 예고를 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8절) 가인은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경고와 예고 메시지를 동생 아벨에게 말하여 줍니다. 그리고 그 후에 가인이 아벨과 함께 들에 있을 때에 아벨을 쳐 죽이게 됩니다. 이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예고하신 대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7절 참조).
그런데 아벨이 죽으며 흘린 피에 대해 마태는 ‘의로운 피’라고 합니다(마23:35).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뿌린 피를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피라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히12:24).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벨의 흘린 피보다 더 나은 이유는, 아벨이 흘린 피는 후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흘리실 피에 대한 예표로서의 모형이며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여 피를 흘리게 한 사건은, 후일에 죄인들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보혈의 피를 흘리실 것에 대한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 질투하며 증오하는 사건은 장차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시기 질투하고 증오하여 죽이는 것에 대한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선’이라고 하시고 가인의 제사를 ‘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가인을 향하여 죄를 다스리는 자로 정하시고 예고하십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선과 악 모두를 하나님께서 주장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지 않으신 것이 우주 공간에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는 분명히 사단입니다. 이 사단이 40일을 금식하시고 광야로 오신 예수님께 다가와서 유혹합니다. 사단은 자신도 인간과 만물을 마음대로 다스린다고 거짓 속삭입니다. 그러나 사단 역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며 주관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선’이시고 사단은 ‘악’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 말은 사단이 악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단 역시 창조자라고 하는 것이며 사단 역시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전적인 사단에 의해 타락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이런 생각을 가졌다면 많은 문제점을 낳게 됩니다. 첫째는, 사단이 뱀으로 위장하여 에덴동산에 들어올 때에 에덴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무엇하셨으며 사단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에 들어올 때에 모르셨는지 아니면 방관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에덴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동산입니다. 동산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물리치고 뱀이 자유롭게 들어와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다라고 설명이 되게 됩니다. 둘째는, 사단이 피조물이 아닌 창조자라는 생각을 가졌다면 이원론이 되고 이로 인해 성도의 구원의 확신은 감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도 마음대로 들어간 사단이라면 우리의 구원도 막을 수가 있고 방해할 수가 있는 것이 되며 하나님과 사단의 싸움의 승패따라 우리의 영생과 영벌이 정해진다는 결론이 섭니다. 과연 그럴까요? 라고 묻고 싶습니다. |
하지만 사단이 하나님께로부터 피조되어 종속되었음을 성경 전체에서 증거합니다. 그중에 대표적으로 욥기에 보게 되면, 사단이 욥을 시험하고자 할 때에 사단 마음대로 악한 짓을 못하고서 하나님께 허락을 받습니다. 악한 일도 하나님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의인이라고 인정하신 욥의 시험 허용 범위를 정해 놓으시고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이에 솔로몬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16:4)
의인 욥에게 악이 다가왔습니다(욥1:6).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자 의인에게 시험과 시련을 허락하셔서 금과 같이 단련시키시고 연단하셔서 더욱 강하게 만드십니다(욥23:10). 이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다라 지방에 가실 그때에 귀신들은, 벌써 심판의 때가 아니라면서 자신들의 거처를 정해달라 예수님께 간구를 합니다.
때에 예수님께서는 돼지 떼에게로 들어갈 것을 명하십니다(마8:28~32). 예수께서 귀신의 무리들을 마음대로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해 귀신들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됩니다.
9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을 책망하시고 그에게 땅에서 유리할 것을 예고하시며 저주를 하시는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며 물으십니다(9절). 그런데 가인은 여호와께 거짓말과 반항을 합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9절). 이 모습이 타락하여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을 대하는 모습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가인에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으시면서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10절) 라고 하십니다. 아벨이 형에게 맞아 죽으면서 흘린 그 피의 호소하는 소리가 여호와께 들린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아벨의 피의 호소가 여호와께 상달된 것입니다. 이는 후일에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께 열납될 것에 대한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무죄한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저주를 내리십니다(11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내리신 저주의 내용은 가인이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주지 아니하고 그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12절).
땅이 효력을 주지 아니한다는 것은 그가 먹을 양식이 풍성하지 못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그가 거하는 땅을 떠나 방황하며 산다는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13절에서부터 5장 32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의 아들 가인과 죽은 아벨에게 긍휼을 베풀어 보호하시는 섭리 내용입니다.
이와 같은 여호와의 보호 섭리는 아담과 세우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가인에게 보호하시는 은혜와 죽은 아벨에게 베푸시는 긍휼의 은혜는 다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섭리를 분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데에 중요합니다.
먼저 13절에서 15절은 아벨을 죽인 가인이 자기가 받은 죄벌이 너무 무겁다고 여호와께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이 너무 무겁고(13절) 또한 자신이 지면에서 쫓겨나 유리하는 자가 되었을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하는데(14절), 이에 여호와께서는 가인을 보호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15절). 여기서 가인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하는 것에서(14절) 당시에 이미 가인과 아벨 외에도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 스스로를 계시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계시(啓示) 차원에서 필요한 인물들만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아담이 낳은 자손의 이름이 다 기록되어 있지는 아니합니다(창5:4 참조).
다시 말하면, 성경에서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을 주시고자 계시에 필요한 인물만 등장 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인과 그리스도의 모형인 아벨만을 기록한 것이며 아담은 가인과 아벨을 낳고서도 많은 자손을 낳은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게 하신다’고 하시며 표를 주어 누구를 만나도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도록 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죽지 아니하도록 보호하시는 것은 작정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를 통하여, 가인은 버리시고 아벨은 취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까지 쳐 죽인 악한 가인을 죽지 아니하도록 보호하시는 것은 악한 자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사용하시고자 위함이십니다(잠16:4).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섭리를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에 대해서 때가 되면 뽑겠으나 곡식이 익어 거둘 때까지 가만 두어라고 하십니다(마13:29).
16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가인으로 여호와를 떠나 놋 땅으로 옮겨 가서 거하게 하시며 그 자손으로 번창하게 하시는 섭리 내용입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 합니다(16절). ‘놋’이라는 지역은 지금의 중동지방과 같은 유목민의 땅인 듯합니다. 그러한 곳에서 가인은 여호와의 긍휼을 입어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그 후손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육대 손으로 라멕이 출생합니다.
라멕은 아다와 씰라 두 아내를 취하여 아다에게서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인 야발과(19,20절), 수금과 퉁소를 잡은 자의 조상인 유발을 낳고(21절), 씰라에게서는 동철로 기계를 만드는 두발가인과 누이 나아마를 낳습니다(22절).
그리고 라멕은 자기가 상처를 입는 위기를 막기 위하여 사람을 죽인 사실들을 아내들에게 고하면서 조상 가인을 죽이는 자의 벌보다는 자기를 죽이는 자의 벌은 더욱 커서 칠십 칠배나 된다고 말합니다. 이같은 말은 라멕이 자기 조상 가인에게 언약하신 여호와의 말씀을 근거하여 하는 말입니다(23,24절).
다음은 아벨에게 베푸신 긍휼인데, 25절부터 5장 5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벨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보호하여 주시는 섭리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아벨에 대한 보호는 가인에 대한 보호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버림과 저주를 받은 상태에서 보호를 받아서 생육하고 번성하지만 아벨의 경우는 하나님께 취함 받은 상태에서 보호를 받는데 그것이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보내주시게 됩니다(25절).
셋의 출생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아벨에게 긍휼을 베푸시므로 다시 얻게 하십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고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 여인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고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남방 유다의 다윗 혈통을 끊으려고 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언약하신대로 다윗 혈통을 보호하셨습니다(왕하11:2).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힘을 합쳐서 예수를 죽이면 끝나겠지 모의하고 그를 죽였으나 예수께서는 약속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사단은 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몇 날 가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만사 모든 것들은 어김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아벨 대신에 셋이 출생한 것은 아벨의 피의 호소를 들으신 여호와께서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아벨의 후손을 번창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복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언약을 따라 가인과 아벨을 출생하게 하셨는데 가인이 하나님이 열납하신 아벨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아벨을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신다면 하나님의 의의 족보는 깨어지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언약도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십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26절) 라고 하십니다. 셋은 단지 아벨 대신에 하나님에 의해 태어나서 그 역시 아들을 낳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셋이 에노스를 낳았을 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여호와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셋이 에노스를 낳은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언약하신 대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가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이루시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벨의 죽음까지 극복하며 성취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에 인간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리어 방해물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약속은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성도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위의 본문에서 확인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의 후손이나 아벨의 후손이나 모두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신 것은 동일한데, 가인의 후손인 경우에는 자기들을 해하는 자들에 대한 저주가 더 무거워지기만을 바랐으나, 아벨의 후손의 경우에는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며 똑같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택과 은총의 여부 그리고 언약따라 버림을 받은 자와 취함을 받은 자가 나누어지며 결론마저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