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에서 11장까지의 의미분석 | ||
언약자손의 보호 | ||
3장 아담 심판과 보호 | 4-5장 심판과 보호 | 6-11장 인류 심판과 언약 |
1-7 아담의 범죄 8-19 하나님의 심판 20-24 하나님의 보호 | 4:1-8 가인의 범죄 4:9-12 하나님의 심판 4:13-5: 하나님의 보호 •4:13~24/가인에게 베푸신 긍휼 •25~5:32/아벨에게 베푸신 긍휼 | 6:1-12 인류의 죄악 6:13-8:12 하나님의 물심판 8:13-9:17 하나님의 언약 9:18-11: 언약의 성취 |
6장부터 11장까지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고 노아에게 언약을 세우시는 섭리 내용인데, 6장 1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은 인류의 죄악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린 아벨, 그리고 아벨을 대신하여 주신 셋의 후손을 보시면 노아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6장에는 가인의 후손들도 열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언약하신대로 저들에게 각각 번성하시도록 하신 것입니다. 각각 번성한 가운데서 벌어지는 일을 1~2절에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고 하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들을 가리키며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들을 말합니다. 여기서 사람의 딸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상대적 관계를 말씀하고 각각 번성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왜 악인도 번성해야 합니까? 악인을 적당하게 사용하셔서(잠16장4절,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의인을 의인되게 하시기 위함이요 마지막 때에 악인이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심판당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면서 의인으로 하여금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인 셋의 후손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 사실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선과 악 즉 좋은 것과 싫은 것을 알게 된 결과인 것입니다. 사람이 금과를 먹은 후로는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와 같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은대로 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가 좋은대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가인의 딸, 곧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는 것은 타락된 인간의 악행인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성경 전체를 이어가는 낱말들의 정리입니다. 낱말이나 작은 문장들에 대해 먼저 정리되고 이해하게 되면 성경 전체의 내용이 보다 명확하게 깨달아집니다. 성경의 모든 용어나 작은 문장들도 반드시 성경 안에서 해석되어지는 것이 해석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경 해석가나 목회자들은 성경을 성경 안에서 해석하고자 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치우쳐 해석하고서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두려움도 확인도 없이 단정해 버립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선과 악, 의, 성전, 안수, 믿음, 교회, 예배, 계시, 거룩, 영적, 가난, 뿌린대로 거둔다 등, 이러한 낱말들과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성경에서 정확한 뜻을 찾아 확인하고서 본문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역적이고 역사적인 내용들은 그들의 시각과 시선으로 확인을 해야 합니다. 또한, 성경을 읽다 보면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납득이 안되는, 사단의 말이나 동물이 말하는 경우도 있고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나라의 왕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말도 있습니다. 또한 당시 선지자들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내용이 전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이들의 모든 말들과 주장들을 가지고 하나님은 당신의 뜻과 계획을 개진하시면서 만사를 주권적으로 역사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시기 때문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교리적인 서술만이 아닙니다. 역사와 시공과 물체 등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셨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을 공부의 기회로 만들어서 확인하고 성경을 보게 되면 확신과 함께 더욱 기쁨과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상입니다. 택자인지 불택자인지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인물들에게 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인지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강단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합니다. 성경의 내용이라고 하며 여기저기서 필요에 따라 뽑아서 마음대로 성도들에게 갖다 내밉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문구가 ‘기도하면 된다’ ‘뿌린대로 거둔다’ ‘~~하면 복 받는다’ ‘예수님께서 하셨으니까 우리 성도들도 해야 한다’는 등, 이런 것입니다. 그러면 왜 목회자들은 기도하지 않습니까? 라고 묻고 싶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도 안되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얼마만큼 뿌려야 거두는지 묻고 싶고, 뿌리는데 왜 안되는지 묻고 싶고, 목회자 당신들은 왜 뿌리지 않는지 묻고 싶습니다. 왜 그토록 목회자 당신들이 말하는 복을 받지 못하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자신들도 혼미하고 그 혼미한 심령으로 성도들도 혼미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생명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다만 의식 행위에 필요한 도구로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직 말씀이 중심이어야 합니다】 앞서 2장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깊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선’과 ‘악’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레미야가 예언한 말씀 한 구절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29:10)고 예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선한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예레미야 선지자가 남방 유다에 대하여 바벨론에 패망하기 직전 예언하는 내용인데, 남방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지만 70년 만에 회복되어 다시 돌아온다는 예언을 ‘선한 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세운 남방 유다가 망하는 것이 누구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표면적으로는 분명 남방 유다의 죄로 말미암아 바벨론 느부갓네살에 의해 주전 586년에 망합니다. 그것도 완전히 망해 버립니다. 그런데 위의 말씀에서, 남방 유다가 망하고 그리고 70년 후에 다시 회복되게 하시겠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사전에 예언을 하신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어떻게 누구에 의해 망했으며 누가 흥망성쇠를 주장하신다는 것인가요? 바벨론의 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하시는 일입니까? 인간은 시간세계 가운데 살고 있어서 그 순간순간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원자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셔서 불꽃같은 눈으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한 눈에 보시며 모든 것을 아시고 친히 다스리십니다. 즉 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일시적으로 망하게 하셨다가 그리고 70년 후에 회복시키셔서 택하신 유다 민족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시고 섬기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다’고 하셨습니다. ‘길’이다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신 영원자로서 내일을 포함한 나의 모든 인생을 전부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운행하는 배에 타고만 있으면 그 분은 모든 길을 아시고 항해하시는 절대 무사고의 운전수이십니다. 우리 자신은 내일 일을 몰라서 답답하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합니다. 우리 인생은 한시 앞도 모릅니다. 앞이 어둡고 깜깜하게 느껴집니다. 우리 인생의 해답은 나 자신이 결코 아니며 ‘오직 예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셨다가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을 ‘선하다’라고 정의 하십니다. 성도들도 살다보면 실패하여 망하기도 합니다. 그 순간 얼마나 아프고 힘듭니까? 때로는 주를 위해 살고 싶어서 더더욱 노력하고 수고하였는데 말입니다. 먹는 것도 줄이고 입는 것도 아껴서 주의 몸된 교회에 헌금하고, 하는 일도 많지만 시간을 내어서 주의 일에 봉사도 하였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실패와 아픔도 ‘선하다’ ‘승리다’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선하신 뜻 가운데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아프게 하고 망하게 해서 여호와를 알게 하고 그리스도를 의지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소생시키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방법입니다. 이 사실을 정확하게 깨달으셔야 마음이 편합니다. 망해도 편하고 패해도 편합니다. 그리고 흥해도 절제와 겸손이 나타납니다. |
하나님의 아들들 곧 셋의 후손들이 사람의 딸들인 가인의 후손들 중의 딸들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게 됩니다. 이는 부패한 모습입니다.
이에 대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3절)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곧 노아 시대에 홍수로 멸하실 것에 대한 예고이며 기한은 120년으로 정하셨는데, 이때는 아직 노아의 아들인 셈과 함과 야벳을 낳기 전입니다.
그리고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아주 영원히 헤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시 구원하여 주시지 아니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의 뜻은, 하나님께서 육체가 되어 자기 좋은 대로 행하는, 즉 육체의 소욕에 이끌리어 살아가는 사람들과 계속 함께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 영의 소욕에 사는 백성들을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육체의 소욕에 끌려 살아가는 자들과 함께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노아로 하여금 다시 만들겠다는 의미입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으로 영의 소욕으로 살아가는 백성입니다. 영의 소욕을 쫓는 자기 백성들을 다시 만드시는데, 방주를 만드는 일백 이십 년의 기간을 정하시고 그 기간 동안 노아로 하여금 아들 셋을 낳게 하십니다.
육체가 된 사람이 자기 좋은 대로 행하는 것이 범죄입니다. 하나님 없는 자는 반드시 ‘자기가 좋은 대로’ 행합니다. 이같은 범죄는, 사람이 영은 죽고 육체만 살아 있어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죽은 행실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모두 육체가 되어서 하나님이 좋으신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좋은대로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이 사람과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고 멸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진 4절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계속하여 용사들을 생육하는 말씀인데, 당시 ‘네피림’은 장부 또는 거인을 뜻하는데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네피림이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는데 이들의 후손이 아낙 자손들이며 모세가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자 12명의 용사들을 보냈을 때에 보았던 자들입니다(민13:28).
5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의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셨다는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5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6절)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하십니다(7절).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의 심판의 시작 시점을 백이십 년으로 정하시는데 당시 노아는 하나님께로부터 의인이라고 택정함을 받고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위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땅 위의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하십니다. 쉽게 이해와 납득이 어려운 대목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신 일에 대하여 한탄도 하시고 근심도 하실 수가 있으시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표현은 사람들의 죄악과 그들의 마음의 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싫어하심을 인간적인 어투로 표현한 말이라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 실수를 하신다거나 또는 무능하셔서 행하신 일이 실수나 실패를 하여 한탄을 하시고 근심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악함을 보시고 한탄하시고 근심하시는 것은, 싫으신 것을 보시고 싫어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시요 전능자가 아니시면 어떻게 하늘과 땅을 움직이셔서 홍수 재앙을 내리실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싫은 것은 싫어하시고 좋은 것은 좋아하시는, 세상 모든 만물의 초월적 전능자이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선과 악을 주관하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싫어시니까 싫으신대로 다 멸하시고 그리고 간수하여 다시 시작할 자를 의롭다 칭하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좋으신 대로 섭리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전능자이신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섭리인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노아가 여호와께 은혜를 받습니다(8절). 노아는 여호와께 선택을 받은 언약자손 셋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모든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는 가운데서도 노아만은 보호함을 입게 하십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아담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셔서 지키시고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이끄시는 자를 지칭하는 단어가 ‘의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믿음의 선물을 주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 중에 노아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함께 나오는 것이 방주입니다.
의인된 노아와 방주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의인 노아와, 세상이 모두 심판받던 때에 유일하게 남았던 노아 가족과 각종 동물들이 사십 일 동안 탔었던 방주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위하심일까요?
9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노아를 당대의 의인이라 소개하고, 노아 외의 그 시대의 혈육 있는 자들에게는 패괴하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사적을 설명하시면서 그를 향하여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소개하십니다(9절).
본문에서 확인되는 바 ‘의인’의 조건은 여호와께로부터 은혜를 입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지 않고서는 죄인된 인간으로서는 결코 의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의인이라고 칭함과 인정을 받아야만 되는데 그 인정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의인’이라고 인정되어야만 구원을 받게 됩니다.
‘노아는 의인이며 당대에 완전한 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내용에 근거하여, 노아를 도적적인 행위 면에서 흠이 없는 완전한 자로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만일 노아를 도덕적인 행위 면에서 흠이 없는 완전한 자로 볼 경우, 노아가 여호와께 진멸을 당하지 아니하게 되는 것이 여호와의 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노아 스스로의 공로에 의한 댓가가 되는 것입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롬3:10,11).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취하여 선택하신 셋의 계통을 따라 태어난 것도 은혜이며, 그 같은 사실로 인하여 모든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시는 진노의 심판을 면하도록 하여 주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행위의 댓가가 전혀 아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도덕적으로 행위가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여호와의 취함을 입어 선택된 셋의 계통을 이은 후손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인은 하나님께서 좋으시고 기쁘신 뜻대로 선택하신 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의인들을 완성하시는 분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 예수님의 피를 댓가로 하여 그 은혜를 입혀 의롭다고 하는 의인으로 부르십니다.
이 노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고(10절)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했습니다(11절).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12절). 여기서 ‘모든 혈육 있는 자’는 산 영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이 범죄하여 영적으로 죽어 육체로만 살아 있는 상태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육체가 된 사람은 육체의 욕망대로 행동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모든 행위가 부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