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보이는 햇살은 참 좋았다. 길가에는 개나리며 벚꽃이 활짝 펴서 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흔들리는 나뭇가지며, 가끔씩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들... 기온은 몹시 낮았고 바람은 옷을 뚫고 살갗으로 파고 들었다. 이대로 걷기순례를 하는 것이 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날씨.
터미널에서 도법스님을 만나고 근처 찻집에서 차흥도 목사님을 뵈었다. 차흥도 목사님은 지역신문 기자와 인터뷰 중이었다.
근처 시장의 밥집에서 따땃하게 배를 채우고 나니 추위가 좀 가시는 듯하다. 도로표지판 가게 간판들에 나오는 이름들을 간판을 보니 음성, 금왕, 무극 등 지역의 명칭을 딴 이름들이 많이 보인다.
“음성은 우주를 갖고 노는 동네인가봐요!”
음성군(陰城郡) 금왕읍(金旺邑) 무극리(無極里). 참으로 거창하고 특이한 이름이다.
순례자는 “무극은 태극”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한 말이었으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것은 아니었다. 음성에도 지명에 대해 설이 분분하다 하였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이곳 무극(無極)은 지하에 금맥이 많은 금광지대여서 나침반이 극을 가리키지 못하여 무극(無極) 상태가 되어 붙여진 이름이고, 나침반에 다시 극이 생기는 곳을 ‘생극(生極)’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명의 어원 생성에 대한 다른 의견도 있어 무엇이 정설인가는 아직 합의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추운 날씨를 녹이는 것은 그래도 따뜻한 사람이다.
다시 찻집에 모여 음성지역에서 오신 분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도법스님이 먼저 은빛순례에 말씀을 드리고,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이야기가 오갔다.
창밖으로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면서 대화모임을 좀더 하고, 차량으로 이동할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그래도 걷는 게 좋을 것 같아 길로 나섰다. 첫걸음은 음성읍 사정리에 있는 강당말 집단묘소. 사람이 걸을만한 길이 따로 없는 국도변을 따라 바람을 맞으며 걷는다. 바람은 거셌지만 길가의 벛나무는 한껏 꽃봉오리를 벙글고 있었다.
드디어 목적지인 음성읍 사정리 강당말에 있는 집단무덤. 5기의 무덤이 보였다. 이 무덤의 실체를 규명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데, ‘동학군묘’라는 사정리 마을에 내려오는 구전이 있고,(동학군을 전멸한다는 목적으로 사정리는 집까지 불태워질 정도로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그에 따라 사정리에는 전해오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 1907년 9월에 3일동안 이곳에서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가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항일의병묘”라는 학계의 의견도 있다고 한다. 그것이 어떤 분들의 죽음이었든 국권과 생존을 위해 희생한 이들의 무덤인 것은 확실한 것인 듯 하다.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순례에 함께 해주신 음성군의회 이상정 군의원님이 음성동학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음성은 1880년부터 동학이 성했던 곳이라고 한다. 1893년 황산에 포소가 설치되었고, 음성, 괴산의 동학 조직운동이 나와 있는 자료들도 많다고 했다. 광산노동자들도 동학과 조직적인 연계가 있었다. 이곳 강당리라는 마을 이름도 동학운동에 대해 유래했다고 한다.
1894년 9월 18일 교단의 재기포 선언이 있기 전에 이미 경기도와 음성지역에는 동학군이 집결하여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는데, 재기포 선언이 있자 경기도 등에서 황산으로 1만여명이 집결하여 청주를 거쳐 보은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을 발굴했지만, 유골은 나오지 않았고 토양분석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차피 조사하는 김에 무기류의 금속 등이 나올 수도 있으니 발굴을 해보자는 음성군 차원의 합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음성군에서는 이곳을 역사유적으로 만들겠다는 확실한 의지를 갖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국유림사업소에서 잣나무를 심으려고 했다가 향토사 연구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물러섰고, 현재는 주변의 사유지를 매입해서 안내판과 주차장 조성을 하려고 한단다.
순례단은 무덤에 막걸리를 뿌리고 묵념을 했다.
당신들이 그렇게 이루고 싶어했던 세상. 평화로운 한반도를 지켜봐주소서!
그곳을 떠나서 차량으로 도착한 곳은 감우재 전승기념관.
감우재전승기념관은 6.25전쟁이 발발하고, 계속 밀리던 국군이 북한군에 대응하여 최초로 승리한 곳이다. 감우재 전투는 1950년 7월 4일부터 10일까지 벌어졌는데, 이 전투에서 2000여명의 북한군이 죽었고 국군도 70여명이 죽었다.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승기념관에서 당시의 전투관련자료, 장비 등을 비롯하여 전쟁 당시의 생활, 전쟁의 참상을 담은 사진자료들을 관람했다. 보기에도 끔찍한 전쟁의 참상이다. 지금 이 순간에 재연된다면 우리는 과연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까, 더구나 지금처럼 무기가 현대화된 시대에.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관람을 마치고 1층 한쪽에 있는 휴게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나라 곳곳을 둘러보면 온천지에 있는 유적지의 대부분이 전쟁의 역사를 알려주는 유적지이다. 이런 유적지를 둘러볼 때마다 우리는 과연 이곳에서 어떤 의미를 새겨야 할까,를 고민하게 된다.
단순히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먼저, 이러한 역사 전적지가 새로운 희망의 토대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분열을 조장하는 곳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안내판의 내용들이 그렇고 그것을 설명하는 사람들도 대부분이 그렇다.
여러 방면에서 인간에 대한 인식의 폭이 확대되고 있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람은 본래 극악무도한 사람이거나 희생적인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도 더불어 살아야만 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개인은 서로 관계를 맺고 비로소 인간이 된다. 산다는 것은 공동체적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동체가 위기에 처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면 집단적인 압력은 인간을 파괴한다. 그래서 자기 생존을 챙겨야 하는 동물적 개인이 남는 것 같다. 어느 한쪽을 감히 정의라고 말하지만, 그 정의의 현장의 이면에도 수많은 이전투구가 있었고, 참상이 있다. 다만 정의의 무게에 눌려있을 뿐이다. 불의의 현장의 이면에도 수많은 인간의 얼굴이 있다. 아주 작더라도 그런 빛이 있었다.
집단행동에 두려움을 가진 나는, 참상의 현장들을 순례하면서 오늘도 스스로 질문한다.
똑같은 상황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선택은
“나라면 이렇게 했을텐데…”,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텐데…”
과연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두 가지 극단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지?
첫댓글 오늘은 마음의 빚을 지지 말고 청산하는 날 되였으면 참 좋은 날이 되겠죠
무더위가 연일 계속되는 날에 건강 잘 관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