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특사가 북녘을 찾아가는 날, 은빛순례단은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참배를 했다.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을 찾아뵙고 나라를 아우른 어른들이 품은 뜻을 오늘에 잇겠다는 은빛다짐을 하는 자리다. 아울러 현충원에 묻힌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며 맺힌 걸 푸는 자리, 해설을 맡아주신 이일영 선생 덕분에 한결 깊이가 있었다.
모인 사람은 채현국 선생과 이부영 선생, 도법스님 그리고 한반도중립화통일협의회장 강종일 선생, 강원생명평화민회 공동대표 목영주 선생을 비롯해 스물여섯 사람이다.
은빛순례단은 먼저 현충탑에 참배를 했다. 도법 스님, 채현국 선생, 이부영 선생이 헌향했다. 그 뒤로 현충탑 안에 새겨져 있는 국군용사들 위패를 지나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 묘소 참배를 하기로 했다. 본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비롯해 임시정부 요인 묘소 참배를 마친 다음에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리 잡힌 행사가 있어 오지 못한다던 도법스님이 억지로 틈을 내어 오셨는데 서둘러 떠나야 하는 까닭에,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참배부터 하자고 뜻을 내놓았다.
도법스님 : 원래 실상사에 행사가 있어서 올 수 없었는데 머리라도 보태야 한다고 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삼일절에도 보면 성조기를 든 쪽이 있는가하면 한반도 기를 든 쪽도 있었어요. 우리 사회가 친북, 반미, 친미해서 반목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걸 풀고 함께 가는 길을 찾고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려면 우리가 이미 있는 역사를 먼저 받아들이고 나서 앞으로 어쩔 것인지는 머리 맞대는 것이 좋겠다, 하는 마음에서 두루 참배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박정희 묘역을 참배하면서
이부영 : 우리 역사를 이끌어왔던 분들이게 차별없이 참배하고 앞으로 화해와 용서로 내디디자는 뜻에서 박정희와 이승만 전 대통령께도 참배하고 이어서 김대중과 김영삼 전 대통령께도 참배하고 독립지사 묘역이나 6.25전몰장병, 베트남전참전전몰장병들에게도 참배 드린다는 이 취지는 설명 드리지 않아도 우리가 국립현충원을 갈등의 장이 아니라 화해와 용서, 평화를 가져다주는 우리 역사의 용광로로 받아들이자는 겁니다. 그런 뜻에서 오늘 여기 와주신 여러분 마음 씀이 앞으로 화해와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도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그러나 이걸 넘어서지 못한다면 우리 역사가 또 다른 질곡 속에 갈등과 대결을 되풀이할 따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분에게 참배를 하면서 제 마음속에서 무언가 씻겨 나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런 걸 해내지 못하면 우리 사회 안에 갈등과 대립을 넘어서지 못하고 결국은 남북 간에도 화해하기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여러분도 마음속에 감회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일영 : 이부영 선생께서 ‘화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묘소 양쪽에 서있는 나무가 산목련입니다. 산목련은 북한 나라꽃입니다. 봄이 오면 가장 먼저 피는 꽃으로 매우 아름답습니다. 아마 육영수 여사가 산목련 같다고 해서 심은 것 같은데, 북한 나라꽃인 산목련이 여기 서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법스님 : 여기(국립현충원) 묻혀 계신 모든 분들은 아마 서로에게 품었던 분노나 원한을 이미 다 녹여서 어차피 우리는 이 땅에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니, 함께 더불어 가자고 다 정리했을 거예요. 이일영 선생님께서 이곳에 계신 분들이 품은 뜻을 잘 설명하셔서 살아계신 분들 마음 씀에 잘 녹아들 수 있도록 힘써 주시기를 바라면서 저는 좀 먼저 가겠습니다.
그 뒤 일행은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에 참배를 하고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으로 옮겨갔다.
이부영 :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정부수립에 한 몫을 한 어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분 시대에 만들어진 한반도 정세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분들 영혼은 이미 그걸 넘어서서 한반도 비극이 끝나야 한다는 걸 합의하고 계실 거라고 봐요. 그런 뜻을 모아서 우리가 오늘 참배를 했다고 봅니다. 머지않아 꽉 막힌 것 같던 우리 조국에 남북 숨통이 트여서 왔다 갔다 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늦어지면 어떻습니까? 20년 30년은 왜 기다리지 못하겠어요. 전쟁만 없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전쟁만 없이 평화롭게 통일로 갈 수 있다면 이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그 녹지 않을 것 같던 세월이 녹아내릴 것으로 믿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들 비원을 함께 담아서 인사드립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 묘역 참배
이부영 : 그때 김일성 주석과 남북정상회담을 하기로 했는데 김일성 주석이 돌아가는 바람에 정상회담이 이뤄지지 않았어요. 역사에 만약이라는 걸 생각하는 건 허망하지만 그때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면 남북화해는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고,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핵 위기는 그때 더는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몹시 안타깝습니다. 사실 저는 정상회담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 뒤에 누가 반쪽 지도자가 되든 이루지 못한 정상회담을 성취시키려면 조문을 가야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분이 초경계령을 내렸습니다. 초상집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던 거죠. 역사에는 응달과 양달이 다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금융실명제나 군부 하나회 척결은 이 분이 지닌 과단성이 아니었더라면 어려웠을 겁니다. 이렇게 봤을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추모의 정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깊이 영면하시도록 빌며 내려갑시다.
채현국 : 이부영이 “김일성 조문을 가야한다”고 하면서 빨갱이가 됐어.
이부영 : 그 전에 국가보안법으로 대여섯 번 들어가서 이미 빨갱이인데 확인 사살한 겁니다.
이일영 : 이부영 선생은 북한에 몇 번이나 다녀오셨어요?
이부영 : 저는 이제껏 북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어요. 자유롭게 운동을 하려면 북한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은빛순례단은 이어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묘역 그리고 임시정부에서 애쓴 어른들이 계신 묘역을 참배했다. 참배를 마치고 현충원을 나선 시각은 여섯 시를 넘기고 있었다.
어른들이 나누는 말씀을 들으면서 법정스님이 남긴 말씀을 떠올렸다. “불행을 만드는 것은 가진 게 모자라서가 아니고 몸이 편치 않아서가 아니라, 지난날 늪에 갇혀 헤어날 줄 몰라서이다. 맺힌 걸 풀어야 꽃 피고 새가 우는 화창한 봄을 맞을 수 있다.”
무지개는 물이 빛과 어울려 빚은 문으로 문을 가리키는 우리말은 “지게”였으니 본디 “무지게”라고 했을 것이나, 세월이 흐르면서 바뀐 이름이다. 은빛순례길은 물과 빛, 다름이 만나 빚은 무지개처럼 젊음과 늙음, 여성과 남성, 갑과 을, 보수와 진보, 종교와 종교, 동과 서, 남과 북이 어울려 평화를 빚을 문을 내려고 나선 길이다.
부디, 한반도를 평화롭지 못하게 만든 허물을 깊이 느끼며 나선 걸음걸음마다 엉킨 실타래가 풀리고 마음에 맺힌 멍이 다 풀려서 마침내 이 땅에 늘 꽃이 피고 새가 우는 화창한 봄을 맞을 수 있기를 빈다.
국립현충원 참배길 나눴던 말씀이 적지 않다. 시간에 쫓겨 미처 녹여내지 못한 얘기는 며칠 사이에 다듬어 올리도록 하겠다.
첫댓글
앞선 시간을 사신 어머니와
현재를 살아가는 딸의 잦은 충돌.
한치의 양보도 허할 수 없는 기싸움에
서로를 외면한 적이 많았습니다.
돌이켜보면
깊어가는 어른들의 꼰대문화에 대한 회의만 있었습니다.
오늘
프란시스코교육회관모임에서
'평화가 길이다'는 은빛어른들의 절박한 말씀에 뭉클해졌습니다.
아이들에게 평화란 즐거운 놀이듯이 불순한 마음 내려놓고
내 안의 평화에서 출발하겠습니다.
벌써부터 2019년 3월 1일이 기대됩니다.
반갑습니다. 함께 평화롭게 걸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