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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만들기 은빛순례이야기
이부영, 박정희 묘소에 분향하다
박대통령 시절 언론자유 수호 투쟁, 민주 운동으로 옥살이
“참배하고 나니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 없었다!”
이승만‧김대중 묘소도 찾아
대통령 특사가 북한을 찾아가는 3월 5일, 한반도 평화만들기 은빛순례단은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을 찾아뵙고 순례를 떠나는 뜻을 말씀드리고 나라를 아우른 어른들이 품은 뜻을 오늘에 잇겠다고 다짐했다. 채현국 할배, 도법 스님,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 이부영 선생을 비롯한 순례자 스물여섯 사람은 현충탑에 참배하는 것으로 현충원 참배를 열었다. 이어서 박정희, 김대중, 이승만, 김영삼 전 대통령 묘소에 차례로 참배했다.
순례 첫 발걸음으로 현충원을 찾아 순국선열에게 참배하자는 얘기가 나올 때만 해도 대통령 묘소에 참배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애국지사와 순국선열 그리고 전몰 국군장병과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참배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도법 스님이 “우리 사회가 친북이니 반미‧친미라면서 반목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걸 풀고 함께 가는 길을 찾고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앞으로 화해와 용서로 나아가자는 뜻에서 대통령 묘소도 두루 참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얘기했다. 남남화해도 하지 못하면서 남북평화를 말하는 것이 맞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현충원을 화해와 용서, 평화를 가져다주는 역사의 용광로로 받아들이자는 겁니다. 저도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그러나 이걸 넘어서지 못한다면 우리 역사가 또 다른 질곡 속에 갈등과 대결을 되풀이할 따름이고, 남북 간에도 화해하기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분에게 참배를 하면서 제 마음속에서 무언가 씻겨 나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뿐 아니라 여러분도 감회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묘소에 참배를 하고 나서 나온 이부영 선생 말씀이다.
이부영 선생은 박정희 전두환 시대 군부독재에 온몸으로 맞섰던 ‘전사’였다. 4‧19 때 고3이던 이부영은 옆에서 공부하던 친구 몇몇이 못 견뎌서 뛰어나가서 데모를 하다가 부상을 당하고 총 맞아 죽기도 했다. 충격을 받은 이부영은 공대를 가려고 하던 생각을 버리고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온다.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면서 동료 기자들과 함께 1974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만든다. 10월 유신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선언문을 발표했다가 이듬해 해직되고, 긴급조치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됐다. 80년대엔 민주민중운동협의회 대표, 민통련 사무처장, 전민련 의장을 맡아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며 5차례 구속됐다. 영등포 교도소에 갇혀있던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이 축소, 은폐, 조작됐다는 사실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알려 6월 항쟁에 불을 지폈다.
박종철 고문치사 축소 은폐 알려
참배를 하루 앞두고 이부영 선생은 이런 말씀을 했다. “변 선생, 이승만 묘소에 참배를 하는데 마음이 내키지 않을 분이 있을 수도 있는데 어쩌지요?” 그때까지도 박정희 이승만 묘소에 참배하는 것이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일까.
이승만 묘소에 참배를 마친 이부영 선생은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정부수립에 한 몫을 한 어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분 시대에 만들어진 한반도 정세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분들 영혼은 이미 그걸 넘어서서 한반도 비극이 끝나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계실 거라고 봐요. 머지않아 꽉 막힌 것 같던 우리 조국에 남북 숨통이 트여서 왔다 갔다 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늦어지면 어떻습니까? 20년 30년은 왜 기다리지 못하겠어요. 전쟁만 없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롭게 통일로 갈 수 있다면 이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그 녹지 않을 것 같던 세월이 녹아내릴 것으로 믿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들 비원을 함께 담아서 인사드립니다.”고 했다. 며칠 뒤에 만난 이부영 선생은 박정희 이승만 묘소에 참배를 하기 전까지는 헤아릴 수 없는 답답함이 있었는데 “참배를 하고 나니 그렇게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고 털어놓으며 홀가분하다고 말씀했다.
“나라 곳곳을 걸으면서 평화로 가는 길을 찾자”
한반도 평화만들기 은빛순례단이 순례를 떠나겠다고 다짐하는 잔치마당은 지난 3월 1일 오후 2시, 승동교회에서 펼쳐졌다. 승동교회는 백 년 전 학생들이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넘겨받아 탑골공원을 비롯해 곳곳에 나눠주려고 모인 곳이다. 바람이 불어 몹시 쌀쌀한 교회마당에 200여 명이 빼곡히 들어섰다. 다짐마당 문을 연 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사장 이삼열 선생은 “전쟁은 사람 마음에서 비롯하므로 평화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사람 마음속”이란 유네스코 헌장 구절을 길어 올리며 군비강화로는 평화를 만들 수 없다면서 나라곳곳을 걷고 또 들으면서 평화로 가는 길을 찾고 싶다고 했다.
금빛을 대표해 나온 흥사단 대학생아카데미 연합회 회장 이예람은 “은빛선배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분열되고 적대하고 협력하지 않는 사회가, 과연 99년 전 이곳에 모인 학생들이 꿈꾸던 미래일까요?”라고 드잡이했다. 이어서 한반도 평화만들기 은빛 순례를 떠나며 올리는 다짐은 이부영 선생과 더불어 순례단 모두가 외쳤다.
-한반도 평화만들기 은빛순례를 떠나며 올리는 다짐
이 땅에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함께 어깨동무하지 못하는 병이 깊어졌습니다. 이 허물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나이 먹은 이들이 깊이 뉘우치며 평화를 여는 순례를 떠나려고 합니다.
100년 전 오늘, 1919년 3월 1일 우리 어르신들은 이 땅을 짓밟아온 일제에 맞서 어른과 아이, 언니와 아우가 내남없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100년이 지난 오늘,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엄혹한 시절에 앞 다퉈 나라를 되찾으려고 나섰던 어르신들께 낯을 들기 어렵습니다.
해방을 맞은 우리는 품은 뜻과는 달리 남북으로 나뉘어 어리석은 이념갈등에 휩싸여 서로 원수로 여겨왔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온 국민이 흘린 피와 땀에 힘입어 경제발전을 이루고 민주주의를 이뤄냈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속내를 들춰보면 오순도순 살지 못하고 집단과 개인이기주의에 빠져, 내 편 네 편으로 나뉘어 내 것만 챙기느라 ‘우리’를 조각조각 흩어놓았습니다. 빈부격차와 지역갈등 골이 깊어졌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입만 있고 귀가 없었습니다. 이제 귀는 열고 입은 닫으려고 합니다. 이 땅을 평화롭게 하는 일이라면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옛 어르신들이 드높인 삼일정신을 올곧게 받들어 가겠습니다. 예순이 넘은 사람은 은빛이 되고 예순이 되지 않은 이는 금빛이 되어 모두 한 마음으로,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사이좋게 살아가는 나라를 빚었으면 좋겠습니다. 은빛순례길, 먼저 한 해를 약속하며 걷고 또 듣겠습니다. 내딛는 걸음걸음 서로 다르기에 더 아름다운 사회, 달라도 함께 행복한 사회,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이 되는 사회로 가는 디딤돌을 놓도록 힘쓰겠습니다.
◯ 걸음을 떼기에 앞서 다지고 다집니다
- 내 이로움에만 매달리지 않고 우리를 두루 이롭게 하겠습니다.
- 은빛은 나이가 벼슬이 아닌 줄 알아, 금빛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듣겠습니다.
- 보수와 진보가 섶을 풀고 마주 앉아 네 옳음을 받아들여 서로 살리도록 애쓰겠습니다.
- 비판과 반대보다 새로운 결을 내놓도록 힘쓰겠습니다.
◯ 이렇게 하겠습니다
- 걷고 또 걷고 듣고 또 들으면서, 나라 살리려고 하나 됐던 삼일정신을 되살리겠습니다.
- 두런두런, 헤아리려는 얘기를 나눠 마침내 한반도 온누리가 길이 평화로울 수 있는 길과 그 슬기를 함께 찾아겠습니다.
- 걸음걸음마다, 찢긴 조각을 모으고 모아 올올이 평화로운 조각보를 빚어보겠습니다.
◯ 순례 길에는 문턱이 없습니다
- 남녀노소 누구라도, 온 식구가 손에 손잡고 어서 오세요.
- 내디디는 걸음걸음, 둘러앉은 자리마다 이야기꽃을 피워요, 우리 함께.
이 작은 날갯짓이 마침내 한반도를 울리고 세계를 울리는 큰 평화물결로 바뀌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뜻 모읍니다.
2018년 3월 1일
한반도 평화를 빚으려는 1000인<은빛순례단> 모심
평화가 100만을 모았고 기적을 이뤘다
은빛순례단은 길을 떠나면서 나라곳곳에 사는 여러 사람들과 평화를 아우르는 이야기들을 듣고 또 듣고 나누겠다고 다짐한다. 예순이 넘은 은빛들은 길을 떠나면서 “나이가 벼슬이 아닌 줄 알아 입은 닫고 귀는 열겠다”고 다지고 또 다졌다. 그러나 연찬은 듣기만 하는 자리만은 아니다. 은빛과 금빛이 어울려 참다운 평화가 무엇인지 새 결을 찾아가는 자리다. 연찬이란 ‘뜻을 벼린다’는 말씀으로 서울을 비롯해서 인천 그리고 청주로 또 새로운 곳으로 발길을 옮기는 곳마다 펼쳐진다. 이 꼭지에서는 청주연찬에서 나눈 얘기로만 꾸민다.
이부영 선생은 4‧19 이래로 중요한 집회현장에 모인 사람들은 평화롭게 시위를 했지만 총을 쏘고 패고 했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4‧19 때도 200명이 죽었어요. 견디고 견디다 못 견디니까 나중에는 같이 폭력을 썼어요. 6‧3한일협정 반대 때도 그랬고, 유신 때도 80년, 87년 6월 항쟁 두드려 패고 백골단이 동원되고 그러니까 각목 들고 맞서 싸웠잖아요. 얼마 전 세상 떠난 백남기 농민 때도 그랬잖아요. 그런데 이번 2016, 2017 촛불 시위를 보니까… 다 합하면 1,700만 명이 나왔다고 하는데 돌멩이 한 개 각목하나 들지 않았어요. 제가 주말마다 개근을 했어요. 될 수 있으면 빼놓지 않고 다 보려고 했어요.
탄핵이 국회에 상정되고 그때 시위대가 경복궁 전철역 위에 효자동 올라가는 길을 경찰이 막았어요. 인도와 차도 사이에 턱이 있잖아요. 몇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경찰이 방패하고 투구 쓰고 막고 있었어요. 젊은 사람들이 경찰차로 뛰어올라가더니 경찰하고 막 드잡이하는 거예요. 뒤에 우리 나이또래 어른들이 ‘야! 그러다가 다쳐 내려 와.’ 그러니까 뛰어내려오더라구.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러더니 경찰이 방패하고 투구 쓴 사이로 밀고 들어가 방패하고 투구를 빼앗았어요. 뒤에 있던 아주머니들이 야단치더라고. ‘야, 쟤들 뺏기고 들어가면 혼나. 돌려 줘.’ 그러니까 다 돌려주더라고. 그때 ‘이런 건 처음 본다.’ 그러면서 100만씩 모이기 시작한 거예요. 그게 언론에 보도되고 ‘평화집회다’ 하는 생각을 하고서 아이들을 데리고 여자들이 함께 나오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평화집회를 하는데 경찰이 봉을 들고 가로막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법원에다가 가처분신청을 했어요. 데모하는 집행부에서 그랬더니 법원이 ‘경찰이 잘못했다. 청와대 앞 100미터까지 경찰이 막는 걸 물려라.’ 이게 평화집회였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었어요.
100미터 전방에서 ‘박근혜는 물러가라!’ 소리를 지르니까 청와대 안까지 다 들린 거예요. 4‧19부터 쭉 떠올려보니까 시민운동의식을 비롯한 행동이 진화한 거예요. 성숙했어요. 돌멩이 하나 각목 하나 들지 않고 평화롭게 박근혜가 물러가도록 했어요. 국민들이. 이명박 박근혜를 단죄하고. 이제 우리는 자루 속 같이 갇힌 이곳에서 온갖 억압과 가난 가운데서 우리 스스로가 성숙해왔어요.”
이처럼 이부영 선생은 촛불이 평화롭게 타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정치가를 비롯한 남 앞에 나서서 이끈다는 사람들이 빚은 것이 아니라, 고만고만한 여느 사람들이 이뤄냈다고 밝힌다. 아울러 삼일혁명 또한 다를 것이 없었다고 했다.
“은빛 세대가 사회 양극단 책임 있어”
“저는 우리 세대 은빛, 머리가 허연 사람들이 잘못을 많이 했다고 봐요. 이렇게 늦도록 평화를 양극화를 시키는데 책임이 커요. 작년 초가을부터 실상사에서 생명결사에서 우리가 반성하자는 연찬을 했어요. 내년 삼일혁명 100주년인데 삼일혁명, 나라가 망해서 정부가 없는 속에서 일어난 겁니다. 그 결과로 임시정부가 생긴 거죠.
그때 천도교, 불교, 기독교 그 싸움 많은 종교인들이 지역도, 영호남이 어디 있었어요? 계층도, 가장 천하다는 백정이나 기생서부터 정승 판서했던 사람들까지 하나가 됐어요. 그렇게 일어난 게 삼일운동이었어요. 이념도 없었어요. 진보 보수가 어디 있어요? 지금은 명색이 해방도 되고 분단이 됐지만 양쪽에 정부까지 서 있는데도 허구한 날 진보 보수니 젊은이 늙은이니 하는 싸움, 노사대립 이러고 제대로 뭐 하나 되지 않았잖아요?”
촛불이 그지없이 평화롭게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던 그저 보통 엄마 아빠 그냥 학생처럼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말씀하는 평화는 어떨까? 한살림 살림꾼인 박대호 님은 그동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이 말하는 평화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촛불이 만들어낸 우리나라 민주주의에서 봐야할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적어도 한 곳에서 수천 명이 모여 집회를 하는데 사회를 민주노총이 보면 왠지 거북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반 시민들이 나와서 발랄하게 사회를 보고, 새로운 퍼포먼스를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더군요. 이번 촛불은 경직된 운동권들이 쓰는 말이 아니라 시민들, 학생들이 하는 말로 힘을 이뤄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군사독재, 정치 아니면 고도성장에서 가져온 리더십들이 경직되게 했어요. 그런데 이번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감성을 드러낼 수 있는 울타리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정치에 반영된 것이 큰 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않던 사람들 뜻을 존중하고 아울러 청소년과 젊은이 참여가 보장되는 구조가 빨리 세워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보다 풍부한 논의가 일어나 남북평화에도 자유롭게 뜻을 내놓을 수 있고, 이것이 정책에 반영되면 평화로 가는 길을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요? 지식인이나 정치인들과 같은 지도그룹에 따라서 움직이는 평화라는 것들이 과연 보통 사람들 뜻을 대변하는 평화일까? 하는 의문이에요. 그동안 얘기하지 못했던 이들이 (뜻을 드러낼 수) 있는 마당을 많이 만들어주는 것이 삶속에서 평화를 만들어내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민들은 촛불집회에 참여할 때 가까고 먼 곳을 떠나 더 재미있는 데로 갔다고 했다. 남녀노소가 자유롭게 얘기하고 마음대로 표현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고 다 받아들이는 잔치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그저 보통 학생, 시민이었다. 집회에서 만난 어떤 시민은 “이런 것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게끔 하는 문화로 바꾸어가는 게 평화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촛불이 사람들을 어울려 춤추게 했다고 말씀했다.
괴산에서 온 홍수호 님은 “전쟁이 일어나면 개인이 평화로울 수 없잖아요. 사회평화와 개개인평화가 맞물려 있어요. 그러나 개인 고통과 사회 고통이 반응은 매우 다른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어떻게 공부하고 움직여가야 하는지 어른들 말씀을 들으려고 왔습니다.
지난해 연말에는 정말로 한반도 전쟁이 터질 것처럼 불안했어요. 그때 그리던 평화는 전쟁에 맞서는 평화였어요. 터지면 이 땅에 어떤 평화도 무너질 수밖에 없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몇 달 사이에 180도로 바뀐 지금, 평화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여요. 제게는 지금 평화는 ‘다른 이름으로 다가온 폭력’이에요. 평화와 통일은 같은 맥락에서 얘기하는 게 정말 쉽지 않아요.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이 땅에 평화가 구축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향을 보면서 천천히 가며 염원하는 평화가 있는 것 같구요.
우리 모두에게는 평화가 있습니다. 내면 평화가요. 그동안 우리가 평화를 만들려고 애쓰고 살아왔는데 그 안에 평화가 있는지, 적개심이 있는지, 피해의식이 있는지, 미움이 있는지, (짚어봐야 해요.) 우리 안에 정말 평화가 있다면 진보와 보수가 이렇게까지 척지면서 싸워야 하는지 의심스러워요. 정말 반대하는 평화가 아니라 함께하는 평화가 우리 안에 있다면 이렇게까지 싸울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고 연민이 들거든요. 미움과 피해의식으로 가득 찬 적개심만 가지고 가면 앞길이 보이지 않아요. 평화로 가는 길 찾기를 할 때 내 안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만나야 하는지…
물론 평화를 내 안에서 찾아 삶에서 구현하고 내가 빛이 되었을 때 어둠은 자연히 물러가듯이 같이 빛을 품어내는 평화를 찾아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평화보따리를 풀어놓는다.
3.1 독립운동을 완성하는 길은 ‘평화’다!
도법 스님은 백짓장을 맞들듯이 너와 나, 보수와 진보, 남과 북이 같이 맞들어야 할 것을 찾아야한다고 말씀한다.
“저는 속담이 갖는 의미들이 참 많다고 봐요.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은 우리가 맞들어야 할 그 무엇, 으뜸 가치는 ‘독립’이라고 생각했잖아요. 그래서 기독교‧천도교‧불교, 이쪽저쪽, 상놈양반을 가리지 않고 두루 어울려 독립선언을 하잖아요. 다 같이 품앗이한 거죠. 독립선언을 할 때 적어도 우리 운명을 선택하려고 누구에게 가서 상의하지 않았다고 봐요.
미국과 상의하고 중국한테 손 내민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조상들 스스로가 우리 운명은 우리가 만들겠다고 나선 거잖아요. 나는 지금도 우리가 그걸 해야 한다고 보는 거죠. 100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함께 들어야 할 그 무엇은 뭘까?
너와 내가 맞들어야 할 무엇, 이쪽과 저쪽이 맞들어야 할 그 무엇을 찾아내고 맞들어야 한다고 봐요. 일단은 북한까지 가지 않고 대한민국 안에서 우리가 가져가야할 가치가 뭘까? 그랬을 때 저는 독립선언을 하나하나 완성시켜가는 것이라고 봐요. 당시에는 독립이 맞들어야 할 가치라면 지금은 평화가 독립선언을 완성시켜 가는 길이라고 봅니다. 내년 삼일혁명 100주년에는 그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너와 나, 이쪽저쪽을 가리지 않고 우리가 마음을 모아서 미국을 비롯한 둘레 강대국들 눈치 보지 말고 평화를 맞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부영 선생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앞이 보이지 않도록 어두웠던 먹구름이 걷히는 데에는 우리가 지닌 굳은 뜻이 크게 작용했다고 말씀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국은 선제타격을 말했어요. 선제타격은 바로 전쟁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하죠. 설령 남쪽을 때리는 게 아니라고 해도 미군기지가 여기에 있는데 남쪽은 무사하리라는 생각을 할 수 없어요. 바로 전쟁이 시작된다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반도에서 또 다시 전쟁은 안 된다. 한반도에서 군사행동은 대한민국만이 결정할 수 있고 누구도 대한민국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결정할 수 없다.’고 천명하고 나섰어요. 이변이에요. 미국이 하겠다는데, 감히 군사작전권도 갖고 있지 않은 나라 대통령이 ‘전쟁은 안 된다.’고 드잡이하고 나섰어요. 이게 이변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저는 문재인 대통령이 내놓은 이와 같은 입장표명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변’을 일으킨 중요한 시작이라고 봐요. ‘북한 사람이든 남한 사람이든 생명은 모두 중요하다. 그러니 한반도에서 전쟁은 안 된다.’고 나섰어요. 그랬더니 미국에서도 ‘안 하겠다.’고 뜻을 밝혔어요.
‘전쟁이 아닌 평화여야 한다. 남북 모두 파괴하고 죽여선 안 된다.’ 이런 이야기가 북한을 움직였다고 봐요. 그래서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얘기하고, 평창올림픽에 참가하고, 그리고 미국이 그토록 듣고 싶어 하는 ‘비핵화’ 얘기까지 한 거죠. 이 얘기는 남북한 사이에 신뢰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요. 남과 북이 이렇게 한반도에서 평화를 지키자고 의기투합을 하니까 모든 것이 변하고 있어요. 꼬리가 머리를 흔드는 격이에요. 미국, 중국, 러시아, 하다못해 일본까지… 정말 큰 변화에요.”
은빛순례를 떠나며 올리는 다짐에서도 나와 있듯이 그동안 한반도는 바람 앞에 등불과 같았다. 이런 가운데 줏대를 잃지 않고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 목숨에 앞서는 가치는 없다면서 평화 만나서 풀어내자며 섶을 풀고 거듭 다가선 것은 촛불민심으로 태어난 남녘 문재인 정부다. 이제 이에 가슴으로 화답한 북녘 김정은 정권이 손에 손잡고 평화를 빚어가고 있다. 강대국이 아닌 이 땅에 사는 당사자가 절박하게 그려내고 있는 평화발자국이다.
우리는 이부영 선생이 박정희, 이승만 묘소에 참배를 한 뜻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 바탕에서 나와 너, 남과 북, 동과 서, 보수와 진보처럼 편이 갈려 있는 모든 이들이 섶을 풀고 마주 앉아 네 옳음을 받아 들여 새로운 결을 빚어나가야 한다. 이 땅에 참다운 평화가 깃들어 백두와 한라에서 사는 아이들이 서로 어깨동무하고 강강술래 할 수 있는 그날을 피어 올려야 한다. 마침내 이 땅에 드리운 평화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길이 이어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땀 흘려 가꾸어가야 한다.
변택주 / 꼬마평화도서관을 여는 사람들 바라지
이 글은 잡지 <붓다로 살자> 8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