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피리>는 초연 이후 지금까지 오래 사랑받아온 오페라로, 35세에 요절한 모차르트의 말년(?) 작품이다. 모차르트는 총 22개의 오페라를 작곡했다고 한다. 그 중 미완성작품이나 공동작품을 제외하면 17개. 당시 오페라에 대한 인기와 모차르트의 생산능력을 감안하면 많은 작품은 아니다. 이 17개의 작품 중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코시 판 투테>, <마술피리>, <이도메네오>, <후궁 탈출>, <가짜 정원사> 정도가 모차르트 오페라를 대표한다.
헌데 이 <마술피리>를 감상하다보면 어째 좀 이상하다. 짜개가 안 맞는 느낌이랄까.
스토리(대본) 전개도 이상하고, 사건 간 개연성도 떨어지고, (고대 이집트라는) 작품배경도 필요할 때만 벗겨 먹고... 한마디로 억지스러운 느낌이 있다.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처럼 매끄럽지 못하다. 어째 그럴까?
여러 요인이 있지만, 핵심은 모호한 선악 구도때문이다.
밤의 여왕 경우를 보자. 일단 위상 자체가 좀 애매하다. 남편이 죽으며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 앉은 것 같진 않고, ‘빛나는 돌(정통성의 상징?)’을 물려받은 자라스트로와 함께 권력의 일부를 나눠 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둘의 대립은 정당한 권력투쟁이다. 승자와 패자는 있을지언정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대본에서 명확히 드러난 밤의 여왕의 악행은 (딸을 복수의 도구로 삼았다는) 패륜 하나다. 그리고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악의 축이다.
자라스트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파미나 공주는 모노스타토스에 의해 납치&감금되어 있다. 모노스타토스는 한때 자라스트로를 섬겼고, 모든 지혜를 꿰고 있다는 현자가 이를 모를 리 없다. 헌데 납치를 방조 혹은 동조했다.
“우리의 결사(neighborhood)에 가입하기로 한 타미노가 시험을 통과하면 그에게 파미나를 넘겨주겠다. 이것이 그녀를 데려온(납치해온) 유일한 이유다.”
뭐 이런 개떡 같은 핑계가 있는가. 물론 부연된 설명은 있다.
“밤의 여왕의 딸에 대한 믿음이 그녀의 최후를 이끌 것이다.”
정적인 밤의 여왕을 물리치기 위해 그녀의 딸을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선인가. 이게 선의 축이란 현자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부수적인 요인이지만, 프리메이슨의 이념이 강제 주입된 타미노 왕자의 사랑법에도 문제가 있다. 타미노는 침묵 수행을 위해 파미나의 사랑을 외면한다. 또 이별의 고통에 자살까지 생각하고 있는 파미나를 남겨둔 채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훌쩍 떠나버린다. 뭐, 결과적으로는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그런데 정말 해피엔딩일까.
“사랑 때문에 앓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어.”
“거짓된 왕자여, 그대 때문에 죽노라.”
파마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불안감(언제 또 사랑을 외면당할지 모른다는)은 완전히 지워진 것일까. 생각하기에 따라선 스토커 모노스타토스의 사랑법이 덜 계산적이고 더 인간적이지 않은가. 자의건 타의건 사랑에 앞서 조건(혹은 이념)을 완성하려는 타미노 왕자보단.
누구의 잘못인가?
모차르트 오빠는 아니다. 본연의 임무가 대본에 곡을 붙이는 것이니까.
대본을 쓴 엠마누엘 쉬카네더의 잘못으로 보인다. 모차르트에게 작곡을 의뢰한 쉬카네더는 연출가이자 극단주다. 또한 모차르트와 함께 비밀결사 프리메이슨에 심취해있다.
당시는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계몽주의가 확산되고 있는 시점. 사상적으로는 왕정을 거부하는 공화정이 태동 중이었고, 공화정은 프리메이슨의 사상적 기조인 ‘인도주의적 박애’와 맥을 같이 한다. 따라서 <마술피리> 대본 이곳저곳에 *프리메이슨의 상징과 이념이 곁들여진다. 현자 자라스트로와 결사단, 침묵의 수행이나 물과 불의 시련, 깨달음을 얻어야 들어갈 수 있는 빛의 사원 등등과 같은.
*프리메이슨의 상징과 이념과 관련한 흥미로운 논문이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엄보영님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K.620에 나타난 Freemason 특징 연구】가 그것인데, 이하는 결론의 발췌.
“대본을 살펴봤을 때는 등장인물부터 프리메이슨에 대한 인물을 묘사했다. 오페라 속의 지혜와 고결의 장인인 ‘자라스트로’는 프리메이슨 상징주의의 대표자인 이그나츠 폰 보른을 연결 시켰고 ‘밤의 여왕’은 그들의 탄압했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를 연결 시켰다. 타미노는 사회 계급 간 평등, 그리고 남녀의 결합과 협력을 강조했던 개혁군주 요제프 2세라고 해석되며 파미나는 오스트리아의 민중이라고 해석된다. 이런 사상은 타미노와 파미나가 시련을 이기고 사제들이 이시스&오시리스에게 바치는 합창을 하는 장면에서 결실을 맺는다. 또 오페라에서 프리메이슨의 비밀이 드러나는데 이성의 신전을 지키는 최고의 고승이자 사제 자라스트로는 ‘신성한 프리메이슨’에 관해 노래하고 음악과 관련해 특정한 조성과 음정, 노래를 동원한다. 플랫이 3개가 붙는 E플랫 조성, 이집트 신인 이시스와 오시리스를 찬양하는 노래, 서곡에 3번의 도입부 같은 페르마타 등 들이 프리메이슨의 의식/상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연구 결과 <마술피리>는 그저 음악만 담은 오페라가 아니다. 이 작품은 ‘프리메이슨’이라는 신념을 넘어서서 진정한 계몽을 많은 대중들한테 일깨워 주고 싶었던 것이다.”
작품 속에 시대의 조류나 사상이 가미되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하다. 그러나 과하면 선동이 될 수 있고 억지가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마술피리>의 전개가 툭툭 끊기는 것은 대본가 쉬카네더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 까닭이고, 작곡가 모차르트가 그것을 묵인한 때문으로 보인다. 상상해보라. 대본가이자 극단주인 쉬카네더로부터 작곡 의뢰가 들어왔다. 쉬카네더와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 단원이다. 짐작컨대 비즈니스 마인드의 쉬카네더가 더 열성 단원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쉬카네더와 그의 형은 <마술피리> 초연에서 파파게노와 승려역을 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본이 마음에 안 든다고 수정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한편 <마술피리>를 관통하는 주제는 시련을 극복해가는 왕자와 공주의 사랑이다. 시련에 맞서 싸우는 것은 타미노와 파미나의 의지와 노력이 주체가 되어야 함에도
“이지스와 오리시스여, 지혜와 깨달음을 허락하소서. 시험을 관장하는 신들이여, 인내를...”
신의 의지가 먼저고 인간의 그것은 부수적인 게 돼버린다.
엔딩 장면은 더 끔찍하다. 공주와 왕자는 긴 시련을 통해 사랑을 얻었다. 당연한 진행은 “천년만년 변치 말자.”여야 한다. 그런데
“밝음이 어둠을 물리쳤도다.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여, 신에게 감사할지어다. 이지스와 오시리스의 자비로 영원한 지혜를 얻었도다.”
이게 뭔가. 이래서는 무늬만 계몽이지 자기들이 그렇게 비난하고 있는 고전주의와 다를 게 없다. 알맹이는 달라진 게 없는데 무늬만 포장하려니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프리메이슨의 마초적인 한계, 예를 들어
“without a man, a woman can not fulfil her destiny.”
“it’s a woman’s duty to...”
“as a man...”
이런 노래와 대사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니 (시대를 격하고 있는 우리들은) 더 난감한 것이다.
설명이 필요 없는 우리의...
그러나... 그럼에도... <마술피리>가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말해 뭐 할까. 음악 때문이다. 각 장면에 정확히 부합하는 곡을 배치함으로써 대본의 허술함을 상쇄해버리는.
밤의 여왕 아리아의 섬뜩함, 파파-커플 아리아의 생기발랄함을 보라. 도입에서 엔딩까지의 전개가 아무리 허접해도 관객들은 잔영으로 남은 아리아 한 구절을 더듬거리며 벅찬 가슴으로 귀가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천재의 능력이고, 모차르트의 힘이다.
p.s.
낭만배달부와 같은 초보에게는 아래 국립오페라단의 작품을 추천한다. 원작에 충실한 우리말 해석이 달려있다.
첫댓글 엄청 진지하게 나가다가 갑자기 "설명이 필요없는.." ㅎㅎㅎㅎㅎ
엄청 진지는 제 스타일이 아닌데 내공이 부족해서...
원래 선무당이 괜히 무게잡고 그러잖어여. ㅠ.ㅠ
숫자 3은 삼위일체 때문에 그리스도교에서도 많이 나오는데, 마술피리에선 말씀대로 다른 이유로 3이 많이 나오지요~ 툭하면 같은 음악 세 번씩 나오고 시녀도 셋, 아이들도 셋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