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공해와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는 이 시절에 있어서 숨통이 확 트이는 곳 금산면은 바로 김제의 허파라 할 수 있으며, 산으로 물줄기로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아늑하게 안아줄 수 있는 고장이다. 곳곳엔 푸르름이 있으며, 또 곳곳엔 많은 이야기들이 어려있고,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 민초들의 소망과 이루지 못했던 恨과 믿음이 서려있는 곳이다. 이것의 가치는 자연의 경관처럼 바라보면 보이게 되는 경우보다는, 바라보고자 할 때 보이는 길이 열리고 보다보면 그 가치가 살아나는 경우이다.
다시 말하면 금산면을 경관적으로 바라다보면 그냥 그저 그런 산 좋고 물 좋은 여느 시골지역과 다름없으나, “금산면이 이런 곳이었어?”라는 호기심으로 첫 발자욱을 디딘다면 점차적으로 우리의 역사가 보이고, 정신문화와 종교가 보이고, 산과 들, 그리고 물줄기 하나에도 커다란 의미였음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금산면은 바로 그러한 곳이다. 나라 잃은 백제 유민들의 정신적 안식처이자,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평등한 희망을 심어준 미륵신앙의 성지 금산사, 그리고 백성이 주인됨을 꿈꿨던 정여립과 동학농민운동, 일제로부터 독립만세를 외쳤던 원평장터에서의 3.1만세운동, 그리고 불교, 개신교, 천주교, 증산교, 원불교 등을 비롯한 각종 종교들의 성지들이 밤하늘의 별들처럼 반짝이는 곳이다.
별들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으나 하늘을 올려다 봐야하며 어두운 밤이어야 보이듯이 우리들의 지역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우선되어야 지역의 가치가 살아나고 전파될 수 있는 것임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에 이번 금산면 일원 두 번째 편에서는 금성리와 화율리, 장흥리, 금산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금산면 남부에 자리하고 있는 금성리는 남동쪽에서 북쪽으로 원평천이 흐르고 있으며 남쪽에는 상두산이 솟아있는 산골짜기에 자리한 고장으로 이곳에는 전교생 십여명이 재학중인 화율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또한 대부분이 산지인 금성리에 비교적 평평한 마을을 이루고 있는 평지마을에는 평지 보건진료소가 있어 대부분의 산지인 금성리 일대의 보건위생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는 산골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백제시대 지배층의 무덤양식인 횡혈식 석실분이 발견된걸 보아서는 백제시대에는 이곳 금성리 일대에 유력자들이 마을을 이끌며 살았던 고장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화율리도 마찬가지로 산골짜기에 위치한 고장으로 원평천이 흐르고 있고, 율치저수지가 있어 경관이 매우 뛰어난 곳이다. 또한 1889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성당인 수류성당이 자리잡은 곳으로 유명하다. 처음 지어질 당시에는 목조 성당으로 문화․예술적으로 상당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나 한국전쟁당시 불에 타 없어지고, 1959년 벽돌식 건물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화 ‘보리울의 여름’의 야외 촬영지로 활용될 당시에는, 시골마을의 따스한 풍경으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이곳 상화마을에서는 조선시대 백자가마터는 백자 요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현재 밭 주변에 상당히 많은 자기편과 분청사기편들이 산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매장문화재 조사를 통하여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다량 수습되면서 이 지역이 오랫동안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장흥리는 발굴조사 결과 ‘장흥리 고분군’으로 명명된 매장유적지가 있는 곳으로 학계에 알려져 있는 곳이다. 금산사와 멀지 않은 장흥리에 백제시대부터 유력자들의 무덤인 석실분들이 다량 발견되었고, 토기의 파편과 옹관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당시 금산사와 관련된 지배층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되나, 모두 도굴된 상태로 발견되어 당시 시대적 현황을 살피기에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금산리는 금산사로 인하여 이름 지어진 곳이기에 그야말로 김제의 보물창고라 할 수 있다. 이곳에는 미륵성지인 금산사를 비롯하여, 신분차별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서려있는 이자익 목사와 조덕삼 장로이야기로 유명한 금산교회가 소재한 고장이다.
또한 증산교를 창설한 강일순(강증산)의 외동딸인 강순임이 설립한 신종교인 증산법종교 본부가 있는 곳이며, 증산교로부터 갈라져 나온 신종교인 모악교의 본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관광자원 또한 풍부하여 경관 좋기로 유명한 금평저수지와 모악랜드와 유스호스텔이 자리잡고 있으며, 모악산 도립공원과 한여름 물놀이를 즐기기 위한 금산사 계곡이 있어 김제에서 외부관광객들이 금산리 지역을 가장 많이 방문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는 맛집과 멋들어진 카페들이 유명세를 타며 이곳을 방문하기 위해 인근지역에서 잠깐씩 다녀가는 사람들도 많아 향후 금산면 지역은 김제에 있어서 관광지의 메카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 금성리(錦城里)
본래 금구군 수류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금곡리, 구룡리, 시성리를 합하여 금곡과 시성의 이름을 따 『금성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수류(금산)면에 편입되었다.『금성리』에는 시목, 용복, 평지 세 마을이 있다.
○ 시목(枾木)
수류면 지역으로 이 마을은 금산의 산골짜기에서도 황토흙이 많아 옛날에는 옹기그릇을 굽던 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점촌』이라 하였는데, 요즘 들어서 가마는 없어지고 대신 감나무가 많이 있기 때문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감 시(枾)와 나무 목(木)을 써「시목」이라 했다고 한다.
○ 용복(龍伏)
수류면 지역으로 「금성리」가운데 있는 마을이다. 뒷산 상두산의 모양이 마치 큰 용 한 마리가 엎드려 있는 것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돌멩이가 많은 것이 특징인데, 땅 위로 뾰족뾰족 솟아 있는 돌멩이가 마치 용의 비늘 같다고 한다.
○ 평지(平地)
용복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금산면은 산이 대부분이나 이 마을만큼은 다른 마을에 비해 비교적 평평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복호(伏虎)
용복 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지형이 커다란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형국과 같다 하여 엎드릴 복(伏)에 범 호(虎)자를 써 ‘복호’라 했다.
■ 화율리(禾栗里)
본래 금구군 수류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화리와 율치리를 합하여 ‘화율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수류(금산)면에 편입되었다. ‘화율리’에는 상화와 율치 두 마을이 있다.
○ 상화(上禾)
상화는 약 400년전 정씨가 유목민 생활을 하면서 정착했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상화’ ‘하화’두 개의 마을이었으나 두 마을을 합하면서 상화라 했다고 하며 110여년 전부터 카톨릭 신앙촌으로 구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〇 율치(栗峙)
하화 동쪽에 있는 마을로 밤티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은 완주군 구이면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조금 못미처 위치하고 있는데, 주위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장흥리(長興里)
본래 금구군 수류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황골(누렁골), 안정, 은곡을 합하여 ‘장흥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수류(금산)면에 편입되었다.
‘장흥리’에는 신흥, 은곡 두마을이 있다.
〇 신흥(新興)/누렁골
‘은곡’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1300년경부터 김해 김씨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누렁골’ 또는 ‘황곡’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누렁골’은 누런 금이 많이 나온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황곡’은 한자로 적으면서 황곡(黃谷)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일제시대에 자그마한 학교가 만들어졌는데, 그 학교가 ‘신흥’학교라 하여 ‘신흥’이라 했다는 사람도 있고, ‘장흥’에서 나누어져 새로 부자가 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흥’이라 했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지금도 누렁골이라 부르고 있고 마을 사람들도 어디에 가서 말할 때에는 누렁골에 산다고 말하고 있다.
〇 은곡(隱谷 )
‘장흥리’ 가운데 있는 마을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속 깊숙이 숨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임진왜란 때 광주 노씨가 피난처로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 금산리(金山里)
본래 금구군 수류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금성리, 용평리, 용정리 일부를 합하여 금산사가 소재한 고장이라 하여 ‘금산리’라 하였으며, 금산리에는 용화, 계룡, 금산 세 마을이 있다.
〇 용화동(龍化洞)
계룡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금산리 가운데에 위치해 있으며 마을이 형성된 것은 약 300여년 전이라 전해진다. 약 150년 전에는 옥천 육씨가 살았고, 뒤를 이어 진사 최씨와 강릉 유씨 등이 살았다고 한다. 이 마을이 번창하게 된 것은 1871년 정읍 덕천면 신기리에서 태어나 1909년 금산면 청도리 구릿골에서 세상을 떠난 강일순(강증산)이 창시한 증산교가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줄기가 마치 커다란 용이 누워 있는 것 같아 요오하동이 되었다 한다.
〇 계룡(溪龍)
용화동 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에 계룡산(鷄龍山)이 있어 계룡(鷄龍)이라 불렀으며,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 때 마을 계곡에서 용이 올라갔다는 전설에 따라 닭 계(鷄자)를 시내 계(溪)자로 고쳐 계룡(溪龍)이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효자 유동열, 효부 전주 이씨, 요자 유병익, 효부 전주 이씨 정문이 있다.
〇 금동(錦洞)
용화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은 산으로 빙 둘러싸여 단풍이 드는 가을이면 마치 비단을 깔아놓은 듯 아름답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〇 환평(環坪)
팥정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산의 모양이 고리처럼 둥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학예연구사 백덕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