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면은 지난 두 편에 걸쳐 금산사와의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며 지역사의 큰 줄기를 함께 해왔음을 언급한바 있다. 그리고 이것은 지역의 역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은 지역의 움직임으로 시작했지만, 국가역사의 큰 중심축이 요동치는 대표성을 지니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기에 그 의미가 크다 하겠다.
민중이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대의적이든 직접적이든 정치에 참여하여 그 뜻이 받아 들여져 세상을 개선시켜 나가려는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실현된 것은, 반만년 우리역사에서 따지고 보면 100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 이전엔 백성이란 그저 통치의 대상일 뿐이었고 우매한 민중으로 인식되어 교화시켜야 할 대상이자 지배층 중심의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는 소수의 귀족중심, 조선시대는 소수의 양반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역사는 그들만의 기록으로 채워졌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협조하는 층 위주로, 해방이후에도 여전히 힘을 갖은자가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 구시대의 권력체계를 답습하였다.
그러나 고대부터 우리 역사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은 농사를 지어 쌀을 대어주는 농민들이었고, 도기를 굽고, 쇳물을 녹이고, 직물을 짜 옷감을 만들던 장인들이었으며, 전국 곳곳의 길을 누비며 유통시킨 상인들과 소와 돼지를 잡았던 백정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각종 세금으로 배를 곯았으며, 천민의 신분으로 물건을 만들고, 소와 돼지를 잡아 고기를 대주면서도 돌팔매질을 당하며 ‘천한 것’이라는 멸시를 당해야만 했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막연한 미래였고, 그 미래의 상징성으로 다가 온 것이 바로 미륵이었으며, 금산사의 미륵신앙은 전편에도 언급한 바 있듯, 신라로부터 나라를 빼앗긴 백제유민의 안식처였으며, 백성들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정여립 모반사건, 지배층의 부당한 세금착취에 항거했던 금구민란, 외세를 몰아내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했던 동학농민혁명에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 천주교, 개신교 등의 외래종교의 정착과 원불교와 증산교 등의 민족종교, 또 그로부터 분파된 수많은 신흥종교의 생성에도 밀접한 영향을 주었다. 이와 더불어 또 한 가지 우리가 알아두어야 중요한 사실은, 청도리에 위치한 귀신사와 금산리에 위치한 금산사와의 관계이다.
신라가 백제를 복속하여 신라의 영토로 만들 무렵(676년) 의상대사가 귀신사(국신사)를 창건하였는데, 그 당시의 이름은 국신사(國信寺)로, ‘국가가 믿는 사찰’이란 뜻에서 알 수 있듯이 갓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정책적 일환으로 금산사는 국신사의 말사로 되었으며, 이 부분에 대하여 우리는 몇 가지 의문점을 가져야만 한다.
첫째로 신라 땅이 되어버린 금산면에 왜 ‘國’자의 이름을 사용한 사찰을 창건 했는가? 둘째로 인근에 금산사라는 대표적 사찰이 있음에도 어떤 목적으로 또다시 사찰을 조성했으며 그것도 국가가 나서서 ‘국신사’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세웠는가? 그리고 세 번째로 당시 금산사와 귀신사와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이다.
이것에 대한 궁금증의 해답은 지역의 두 주요사찰의 정체성규명과 지역사의 흐름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이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하고자 한다. 백제는 신라나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당시 불교가 국교(國敎)였으며, 정치와 사회, 그리고 문화, 거의 모든 부분이 불교의 영향이 미쳤던 시대였고 국가였다. 그렇기에 금산사는 백제인의 안식처였고, 백제인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던 사찰이었으며, 신라에게 나라를 빼앗긴 이후 나라를 되찾고자하는 정신적 지주로서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금산사였다.
신라는 이에 신라의 진골출신의 귀족이자 저명한 고승으로 추앙받던 의상대사를 통해 금산사를 견제할 새로운 사찰로 국신사를 창건한 것이다. 또한 정복한 백제와 고구려의 땅 곳곳에 신라가 믿던 화엄종을 전파하고, 나라 잃은 유민들의 저항정신을 회유하기 위해 화엄10찰을 세우고 지원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국신사이다.
최치원이 찬술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보면, 중악 공산의 미리사, 남악 지리산의 화엄사, 북악 태백산의 부석사, 강주 가야산의 해인사와 보광사, 웅주 가야협의 보원사, 계룡산의 갑사, 양주 금정산의 범어사, 비슬산의 옥천사, 전주 모악산의 국신사, 한주 부아산의 청담사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신라 최고의 대표선수격인 의상대사를 통해 국신사를 창건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금산사가 백제유민에게 어떠한 존재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신생 사찰인 국신사의 말사로 금산사를 설정한 것만으로도 백제유민의 저항정신이 금산사를 중심으로 얼마나 거세게 일어났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금산사와 귀신사의 구도는 이후 김제 만경출신의 진표율사가 백제유민의 상실감과 좌절감을 달래기 위해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금산사를 중창하여 중흥기를 이끌었던 일과 맞물려 돌아간다. 귀족사회의 폐쇄적인 사회구조로 신라가 운명을 다할 무렵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금산사를 정신적 중심지로 여겼던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 청도리(淸道里)
본래 전주군 우림면(雨林面)지역으로 「청도」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두정리와 동곡리, 금구면 수류면의 용정리 일부를 합하여 「청도리」라는 이름으로 다시 전주군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에 김제군 수류(금산)면에 편입되었다.「청도리」에는 동곡, 백운, 하운, 청도등 4개 마을이 있다.
○ 동곡(東谷)
하운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1495년경 안동 김씨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이 형성될 당시의 이름은 ‘그릇굴’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그릇굴’이나 ‘도기촌’의 명칭은 그릇을 굽던 가마가 있던 곳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고, ‘구릿골’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이를 한자로 적는 과정에서 구리(銅)자를 써 ‘동곡’이라 했다고 한다. 동쪽의 제비산, 서쪽의 구성산 사이에 자리한 이 마을에는 계단식 논의 논둑을 따라 4기의 지석묘가 일렬로 놓여있다. 이 마을에는 효자 김춘 정문이 있다.
○ 백운동(白雲洞)
‘청도’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높은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항상 흰 구름에 싸여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을 한때는 ‘제2의 전매청’이라고 불렀는데, 해방 뒤 담배 사기가 몹시 힘들었을 때 이 마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담배를 마는 기계를 설치하고 담배를 팔아서 생계를 꾸려 나갔기 때문에 ‘제2의 전매청’이라 불리었으나 점차 단속이 심해져 담배 말던 기계를 없애고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누에치기에 필요한 잠구를 만들어 공급하였다. 그러던 중 마을이 산지를 보전하는 목적으로 ‘산지 취락구조 사업지구’로 들어가 높은 곳에 있던 농가들은 성덕면 대목리 김제, 만경 도로면 오른쪽으로 철수하여 ‘개미마을’을 이루었다. 그래서 지금은 산자락 아래에 있던 농가만 몇 가구 살고 있다.
○ 유각(有角)
청도 동북쪽 김제의 경계지점에 있는 마을로 ‘유각’이라 부르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옛날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때 김제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말을 갈아타던 역이 있었는데, 이 근방에 유각(주점을 표시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 하운동(夏雲洞 )
‘청도’ 남쪽에 있는 마을로 높은 산자락 아래 깊숙이 자리하고 있어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아 여름처럼 무더울 뿐만 아니라 안개 같은 구름이 골짜기에서 일어나 마을을 감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삼봉리
본래 금구군 수류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봉곡리, 봉의리, 봉암리, 계암리 일부와 남면의 유산리 일부를 합하여 봉곡, 봉의, 봉암에 세개의 봉자가 들어간다 하여 ‘삼봉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수류(금산)면에 편입되었다. 삼봉리에는 양지, 거야, 반복, 봉은 등 4개 마을이 있다.
○ 거야(巨野)
옛 수류면 지역인데, 구성산 기슭에 자리한 마을로 ‘삼봉’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고려 때 거야현(巨野縣)의 중심지로 현청과 객사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거야’라는 이름은 그 때 생겨난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마을에는 지금도 여러 곳에서 기와편과 주춧돌 등이 나오고 있어 당시에 번창했던 곳임을 증명하고 있다.
○ 산정리
‘대학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마을 뒷산에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양지(陽池 )
원래는 ‘거야’에 딸린 마을이었는데, 광복 후 마을을 1구, 2구, 3구로 하였다가 ‘양지’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였다.
○ 봉은(鳳隱)
봉은 마을은 풍수지리상 봉황이 숨어있는 형세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으로 보이며, 1895년경 언양 김씨 우상씨(宇相氏)가 갑오 동학 당시 남원 운봉으로 피난 갔다가 3개월 후에 다시 돌아와 숨어 지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 반곡(盤谷)
‘거야’ 북쪽에 있는 마을로 처음 이곳에 정착한 사람은 덕수 이씨와 전주 최씨라고 하며, 형성 당시에는 길이 구불구불한 골짜기란 뜻으로 ‘서리골’ 이라 했는데, 한자로 적는 과정에 ‘반곡(盤谷)’이 되었다고 한다.
■ 용산리(龍山里)
본래 금구군 남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용반리와 유산리, 송정리, 등 용리 일부, 서도면의 용정리 일부를 합하여 용반과 유산의 이름을 따 ‘유산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하리(봉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 금산면에 편입되었다. ‘용산리’에는 유산, 율리, 송정, 용반, 대유, 기룡, 용정 등 7개 마을이 있다.
〇 용반(龍般)
‘대유’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1600년경 전주 이씨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이래 전주 최씨, 해주 오씨, 동래 정씨 등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금구현 남면에 편입되어 있다가, 1914년 하리(봉남)면에, 1935년에 금산면으로 편입된 이 마을은 동쪽에 있는 구성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용(龍)이 서려 있는 것 같다고 하여 ‘용반’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 서남쪽에는 심은 지 100여년이 넘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데, 이 나무는 남원에서 와 머슴살이를 하던 사람이 구성산에서 옮겨다가 심은 것이라고 한다. 그 나무 아래 세 개의 공적비와 경로당이 있으며, 그중 하나는 새마을사업으로 진 빚 천만원을 갚도록 논을 사준 김제 군수 김준수씨의 공적비이며, 나머지 두 개는 마을 노인들을 위해 경로당을 지어 준 오세용과 김재두 두 분의 공적비이다.
〇 용정(龍井)
‘대유’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뒷산의 모양이 용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용이 이 마을의 우물에서 나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한 사람은 1825년경 달성 서씨 서의삼이라고 한다.
〇 대유(大攸)
‘용산리’ 가운데 있는 마을로 옛날 이 마을까지 배가 들어 왔을 때 배를 매어두는 고리가 있어 ‘고리배미’ 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던 마을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대유’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고 산 사람은 김해 김씨로 1400년경부터라고 한다.
〇 송정(松亭)
‘대유’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뒷산 소나무 숲에 정자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 마을은 조선 정조 때 평해 황씨가 정착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〇 (유산, 율리)배메
‘대유’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1620년경에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덕수 이씨가 처음 정착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배를 풀리지 않게 붙잡아 묶어두는 곳이란 뜻 ‘배메’라고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유산’과 ‘율리’ 두 마을로 나누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〇 기룡(起龍)
약 500여년 전 기와집을 짓고 살던 큰 마을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하며, 그 증거로 마을 주위에서 기와조각, 구들, 주춧돌, 그릇 조각들이 출토되고 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러다 1922년 갈대와 가시덤불만 우거진 이곳에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살피던 충주의 지리학자 강릉 최씨 최담과 경상도 울진 태생 인동 장씨 장병옥이 후세에 길이 빛날 터라 여기고 터를 잡은 이래 1946년 증산교의 계파인 삼덕교 교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어머니산인 모악산 줄기가 뻗어 내려 아들 격인 구성산을 이루었는데, 그 아래인 ‘기룡’에서 용이 일어나서, ‘용반’에서 용이 서려 놀다가, 봉남면 ‘주자’에서 여의주를 얻어, 봉남면 ‘등용리’에서 용이 승천할 것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학예연구사 백덕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