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을 세우라
고린도전서 10;23-33 2019. 10. 13 (주일 낮 예배)
9세기 말 사라센 제국의 압둘라만(Abdulraman) 3세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왕국을 49년간이나 통치했던 왕이었습니다. 그의 일 년 수입은 현재 화폐가치로 260억 원이나 되었답니다. 후궁을 3,321명이나 두었고, 그 사이에서 616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외견상 행복의 조건을 넘치도록 갖춘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그가 숨을 거둘 때 충격적인 말을 남깁니다.
“내 평생에 행복했던 날들은 겨우 14일에 불과했다.”
그 14일은 어떤 날이었을까요? 특별한 걸 많이 먹은 날일까요? 아니면 수입이 더 많았던 날일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아마도 그 날은 따뜻한 사랑을 느꼈다든지, 마음을 나눌 친구를 만났다든지, 어떤 깨달음이나 보람을 느꼈다든지, 그런 날들이 아니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인생을 돌아볼 때, 언제가 가장 행복하셨나요? 그때 무엇으로 인해 행복하셨나요? 혹시 “난 별로 행복한 날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 분이 계시다면 앞으로의 인생은 정말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조지 갤럽(George Gallop) 아시지요? 미국의 심리학자이며 통계 조사법의 창시자지요. 지금도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통계 조사기관이 갤럽이잖아요? 이 갤럽이 ‘어떤 사람이 가장 행복한가?’를 조사했더니 가장 행복한 사람은 ‘신(神)에 대한 믿음과 생생한 체험을 소유한 사람’이고, 가장 불행한 사람은 ‘가진 것은 많으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사는 사람’ 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불행한 사람이 될 수 있고,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으로 재산, 외모, 명예, 건강, 지식 등을 말합니다.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도 행복한 사람의 다섯 가지 조건을 말했습니다. 첫째,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을 가진 사람. 둘째, 사람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용모를 지닌 사람. 셋째, 자신이 기대하는 것의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를 가진 사람. 넷째, 남과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 겨우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을 가진 사람. 다섯째, 자신의 연설을 듣고서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를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조금 부족하고 모자란 상태가 행복하다는 거죠? 재산이든 외모든 명예든 완벽한 상태에 있으면 오히려 그것 때문에 근심과 불안, 긴장과 불행이 교차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약간 모자란 상태에서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할 때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뒤가 좀 안 맞지요.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할 때는 행복했는데 얻고 나니 불안해지고 불행해진다면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23절과 24절 말씀 함께 봉독할까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아멘.
그렇지요. 풍족하다고 자신을 위해서 다 쓰는 것이 아니고, (덕)을 세우기 위해 절제하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일에 써야 비로소 행복해진다는 비밀을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기뻐할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끼도록 창조하셨어요. 그래야 모두가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도 경험하셨잖아요. 남에게 무엇을 받을 때보다 남에게 나누어 줄 때가 더 기쁘잖아요. 도움을 받을 때도 좋지만 남을 위해 봉사할 때가 더 기쁩니다. 내게 생기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이건 돈을 많이 벌었을 때 느끼는 기쁨하고는 차원이 다른 기쁨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느낄 수 없는 수준 높은 기쁨이지요.
그런데 사탄은 우리에게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할 수 있다고, 늘 거짓말을 합니다. 내 손에 들어온 것은 꼭 움켜쥐고 절대 놓지 말아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여러분 이 거짓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나눌 때, 그리고 누군가를 (도와)주고 베풀어줄 때 행복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할 수 있다고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될 만한 것만 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안다고 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는 것만 말하고, 내가 힘이 있고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지 않으면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이와 같은 말을 고린도 교우들에게 쓰는 이유는 전에 말씀을 드렸듯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 때문이었습니다. “시장에 나와 있는 고기 중에 상당량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인데, 아무 고기나 먹었다간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될 테니 그러면 안 되겠고, 그럼 아예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나?” 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겁니다. 또 불신자의 집에 방문해서 음식을 대접받는데 고기로 만든 요리가 나와요. “이거 십중팔구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일 텐데 이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게 고민인 거예요.
어떻게 하지요? 우리 27절 말씀 함께 봉독합니다.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아멘. 여기서 양심은 그 불신자의 양심입니다. 그 사람은 악한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늘 자기 하던 대로 한 거죠. 아마도 손님이 오니까 더 정성껏 요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기 제물로 바쳤던 거지요? 그럼 난 안 먹습니다.” 이러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려면 차라리 가지를 말지, 왜 가서 그 사람을 무안하게 만듭니까? 식사에 초대했다는 것은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함께 식사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나누고 하나가 되어야지, “너는 왜 이런 걸 먹느냐? 나는 안 먹는다.” 하면서 그와 나를 (분리)한다면, 이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일 그 사람이 먼저, 기독교인들은 제물로 드린 것을 안 먹는다는 것을 알고, “이건 제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한다면 그 때는 먹지 말아야 합니다. 28절 말씀이지요? 함께 봉독.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아멘.
기독교인이 우상에게 제물로 드린 것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알고 혹 죄 짓게 할까봐 걱정되어서 “이건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말해 주는데도 “괜찮습니다.” 하고 먹는다면, 그건 아니지요. 기껏 말해준 사람의 양심을 무시하는 행동이 됩니다.
예. 이제 본질을 파악하실 수 있겠지요? 본질은 음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본질적인 기준이 있는데요. 그것은 음식뿐 아니라 우리가 결정해야 할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 기준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가지가 기준이 있는데요.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1절 함께 봉독할까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아멘. 먹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 같으면 먹고, 안 먹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 같으면 안 먹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이 말을 할까 말까? 내가 이 일을 할까 말까?’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하라고요? 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이면 하고, 아니면 안하는 거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면 하고, 아니면 안하는 겁니다.
옆 사람과 인사하실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만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뭘까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부모 된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어요. 부모님은 자녀들이 사이좋게, 사랑하면서 지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아무리 부모님께 용돈을 많이 드려도, 형제간에 서로 싸운다면 부모님의 마음은 기쁘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 때 기뻐하십니다.
특별히 가족 간에 서로 사랑을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너무 속이 깊어서, 사랑을 마음속 깊이 간직만 하고 계시는데, 그러지 말고 좀 꺼내서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말 한 마디를 해도 이왕이면 서로 격려해 줍시다. 우리는 참 이상해요. 아주 가깝고 흉허물 없는 사이일수록 상처 주는 말을 잘합니다. 예를 들어 어려움 당하고 있는 동생이나 자녀를 위로해 주고 싶은데, 이상하게 말은 “너 그러게 평소에 좀 열심히 살라고 그랬잖아. 네가 게을러서 이렇게 어려움 당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나와요. 야단을 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어렵게 사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데 내가 도와줄 능력은 없고, 그러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오히려 짜증을 내면서 이렇게 말을 하게 되는 거죠. 여러분, 이럴 때는 그냥 “힘들지? 지금은 어렵지만 앞으로 잘 될 거야! 내가 더 기도할게” 하고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잘 하는 것이 있으면 서로 칭찬해 주십시오. 요즘 어디를 가도 참 각박한 세상 아닙니까? 일터에서나 학교에서나 야단맞고 스트레스만 받지 칭찬받고 인정받을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라도 교회에서라도 서로 따뜻하게 (격려)하고, 칭찬하고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것, 그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입니다.
2. (남)의 유익을 구하라.
33절 말씀 함께 봉독할까요?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아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살 때 그들이 구원의 길로 나옵니다.
사실은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 이 말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이나 비슷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살 때, 우리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역시,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달라.”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16에도 (함께 봉독)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착한 행동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과 지옥이 죽어서만 가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내가 먼저 섬기면 천국이 되고,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욕심을 부리면서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면 지옥이 됩니다. 지금 세상을 보면 남의 유익을 구하기보다는 자기 유익만을 위하여 달려가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러지 맙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다고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절제하고 희생함으로 (덕)을 세우는 성도가 됩시다. 그래서 우리 가정과 교회를 사랑이 넘치는 천국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31. 영광을 받으신 만유의 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