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바람이 부는데로 요한복음 3장 1-5절
저희 동네에
빵집이 있어요. 벌써 5-6년 됐어요. 유기농 밀가루를 쓰구요. 동네 주민들 먹을 빵을 자기 식구가 먹는
것처럼 정성들여 잘 만들어요. 그동안 저녁때 가면 빵이 거의 없을 정도로 꾸준히 잘 됐어요. 요즘 장사가 안된데요. 빵 맛이 없어서가 아니예요. 그 작은 골목에 빵집이 네 개가 있었어요. 그런데 최근에 그분이
만드는 방식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같은 종류의 빵을 만드는 빵집이 생겨났어요. 빵집이 5개가 된 거예요. 겉에서 봐도 유럽식의 분위기를 느끼게 만들어놨어요. 손님을 빼앗길만해요. 사람이 살다보면 잘못 살아서 삶이 열악해 지기도
하지만 특별히 잘못 살지 않아도 어려움에 처하기도 합니다. 아침 6-밤10시까지 정말 열심히 사는 분이예요. 성실하게 살아도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은 어려움이 닥치고 상황이 안좋아지면 모든 걸 자책해요. 뭔가 잘못산거 같고, 나만 못나보이고, 내 인생이 특별히 실패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잘못 살지
않아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자본이 자본을 먹어치우는 최첨단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동네를 걸어다니다 보면 수시로 가게가 바뀌어요. 집
근처 모퉁이에 5~6번 치킨집이 바뀌더니 최근에 스시집에 생겨났어요.
그런데 손님이 없어요. 얼마나 갈지 모르겠어요. 맛이
없는 것도 아니예요. 특별히 잘못 사는 사람들이 아니예요. 잘못
사는 걸로 치면 동네상권에 골목상권까지 독식하려는 자본가들이 훨씬 잘못 사는 거죠. 남들 집은 아무런
문제없이 아니 문제가 생겨도 잘 해결하며 잘사는 것 같아 보이는데 나만 힘든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평생을 병 수발을 드는 사람도 있어요. 젊었을 때부터 어머니 병수발을 들었는데 나이들면서 어머니 병수발에, 남편 병수발까지 거기에다 집안 경제까지 책임져야해요. 그럴 땐 나만
벌받은 것 같데요.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버릴까봐 나에게 맡겨주신지도 모르는데 꼭 모든 벌을
나혼자 받고 있는 것 같데요. 심리적으로 무척 위축될 수 밖에 없어요.
사람이
자꾸 자책하고 스스로를 비하하고 심리적으로 계속해서 위축되다보면 좋은 빵을 만들수가 없어요. 하루 종일
사람이 없으면 사람이 기운이 빠집니다. 그런 기운으로 맛난 음식을 만들 수가 없어요. 심리적으로 계속해서 쪼여들면 몸이 민감해지고 화가 올라오고 좋은 에너지가 나갈 수 없고 그러다보면 끊임없이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이미 그 사람에게 좋은 능력과 기술과 달란트가 충분한데도 부정적인 생각들이 좋은
삶/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걸 방해해요.
오늘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보십시오. 니고데모가 뭐라고 대화를 시작합니까? 선생님
선생님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특별한 분인 걸 제가 압니다. 이런 대단한 일들을 행하시는 걸 보면 정말
선생님은 특별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특별한 표적을 행사해 주십시요. 그러니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그러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겁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깔려있는
전제가 있습니다.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니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꺼꾸로
이야기하면 나는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찾아다닙니다.
용하다는 점쟁이도 찾아가고 상담잘하는 선생님도 찾아가고 기도잘하는 목사님도 찾아가고 의사선생님도 찾아가고… 버클리에 살때보니까 한방병원을 누군가에게 소개시켜드렸더니 동부에서 비행기 타고 와요. 해결됩니까? 해결방법을 제시해 주기는 합니다. 임시적으로 호전은 시켜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해결은 의사가
해주지 못합니다. 누가해요? 콜레스테롤이 높아서 병원에 갔더니
약먹으래요. 약먹는 건 증상만을 호전시켜주는 거지, 몸을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는 건 아니죠. 그래서 약먹기 싫다고 했더니 운동하래요. 운동하면 된데요. 하루도 빠지지 말고 매일매일 꾸준히 운동하래요. 그러면 된데요. 해결방법은 얻어오지요. 그런데 해결됩니까? 안되죠. 해결은
누가해요? 내가 하는거죠.
평생 찾아다니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분들 대다수는 나는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누군가 대신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거죠. 요리좀 배워보세요. 했더니 “예이 그건 목사님이니까 가능한거죠. 저는 못해요. 특별한 사람들이 특별한 재능이 있으니까 그런거죠. 저는 못해요.” 그러시는 거예요.
못하는 걸까요? 안하는 걸까요? 여러분 여기
요리 못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많지요. 요리 못하는 걸까요? 안하는
걸까요?
제가 아는
어떤 여자분이 운동치예요. 운동이란 운동은 숨쉬는 운동빼고는 하나도 못해요. 그분이 우울증에 걸렸어요. 남편은 바뻐도 너무 바쁘고 애들은 크고
집에 혼자있다보니 너무 외로운 거예요. 존재감도 없고 삶에 의욕도 없고 삶이 너무 우울한거예요. 이러다가 내 인생 망가지겠다 싶어서 탁구를 시작했어요. 10년이
넘었어요. 근데 초급이예요. 성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예요. 근데 초급이예요. 그런데 그래도 즐겁게 칠 정도는 돼요. 그러면 됐지요. 뭘바래요. 사람이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못하지 그리고 기대치가 너무 전문가 급을 기대해서 그렇지 못하는 건 없어요. 저두요. 국을 끓였는데 한솥 그대로 버린 적도 많아요. 처음부터 음식을 잘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아요. 못하는게 아니라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한번도 안해보고 그래서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드리냐면 우리가, 우리가정이, 우리들의 관계가
한걸음 더 좋은 세상(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참 많아요. 앞에서 이야기 했던 끊임없는 자기 비하, 자책, 심리적 위축, 나는 못한다는 생각,
실패의 경험들, 제는 안된다는 생각(나만의 주관적인
생각일수도 있는데) 정말로 장애물들이 너무 많아요. 실제
능력이 없는 게 아닌데 이런 부정적 생각들이 나를 한발자욱도 못나가게 해요.
오늘 예수님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니고데모는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재능으로만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죠. 좋은 세상은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일상의 천국은 소수의 난사람, 든 사람들의 독식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기만 한다면 누구나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난다는 의미가 뭘까요? 지난 주에 어느 집사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님이 고관절 수술을 하시면서 병원에 입원해 계셨어요. 집사님 아버님이 혼자 사시는데
정치적 견해가 달라서 많이 무딪히신데요. 그래서 부자지간이지만 그렇게 편한 관계가 아니셔요. 그냥 아버님께 가시면 안부 정도 묻고 깊은 이야기는 서로 절제하고 그냥 그렇게 살아오셨데요. 다정다감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주일날 그림책을 여러 권 가져가시더라구요. 아버님께 읽어드려야겠다구요. 사실 결심은 그렇게 하지만 그걸 실행에
옮기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마다 다 관계하는 방식이 있어서 그 관계하는 방식에 변화를 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아버님과 많이 싸워요. 정치적
견해가 달라서 저희 형님은 예스맨이예요. 아버님이 말씀하시면 처음부터 끝까지 Yes셔요. NO가 없어요. 큰
아들의 몫을 톡톡히 하세요. 막내는 애교덩어리입니다. 하루에도
아침저녁으로 전화한데요. 저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저도 아버님을 닮아서 고집이 있어서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안밀리려고 하다 꼭 부딪쳐요. 그런 아버님
앞에서 웃으면서 동화책을 읽어드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예요. 그런데 전화가 왔어요. “목사님 목사님 아버님께 동화책 읽어드렸어요. 그런데요 아버님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몰라요.” 어떻게 읽어주셨어요. 그거
쉽지 않으셨을텐데요.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집사님만의
특별한 달란트일까요? 사실 따지고보면 한글 알고 글 읽을 줄 알면 동화책 누구나 읽을 수 있어요. 그거 못한다고 하면 다 거짓말이예요. 그런데요. 사람들이 그걸 못해요. 능력의 문제가 아닌거예요.
용기를
냈던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무엇이 그 용기를 가능케 했었을까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래요. 물은 정결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씻어낼까요? 정화할까요? 죄를 씻어낼까요? 죄는 씻어내는 게 아니라 책임지는 거죠. 잘못한 것은요 바꿀 수가
없어요. 책임을 져야지요. 뭐를 씻어내요? 죄된 생각, 부정적인 생각, 불안한
생각, 그러한 기운을 씻어버리는 거죠. 없애버리는 거죠. 물론 불의한 일에는 저항해야 할 때도 있고 싸워야 할 때도 있지만 우리 삶에는 거짓생각, 확대된 부정적인 생각들에 지배당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이런 건 무시해야해요. 그래서 향심기도에서처럼 계속 흘려보내는 거예요. 사람이 그런 생각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죄를 짓고 나쁜 행동을 하고 자기를 병들게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계속 생각하고 있어 보십시오. 그런 생각이 그런 마음을 키우고 그런 마음이 그런 범죄를
낳는 거죠. 그런데 그런 마음이 생기더라도 씻어내는 거예요. 흘려보내는
거예요. 내가 못나보이고 나를 끊임없이 비하하고 자책하고 그런 생각도 악한 생각이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귀하게 만드셨는데요. 살면서 부정적인 생각, 기운을 안 느끼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걸 다 지고
살면 못삽니다. 그런 생각과 기운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흘려보내는 거죠. 성령은 거룩한 기운이예요. 평화로운 기운이예요. 감동의 기운이예요. 따듯한 기운이예요. 차별하지 않는 하늘의 기운이예요. 깊은 고통을 들여다보는 사랑의
기운이예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건 어쩌면 일상의 부정적인 기운들! 끊임없이 흘려보낼 것을 흘려보내고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집착하지 않고 머무르지 말아야 할 것을 흘려보내면서
거룩한 영에 나를 끊임없이 오픈하면서 내 기운과 에너지를 바꾸는 건지도 모릅니다. 몸을 가볍게 해야
일상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소리를 자유롭게 듣고 자유롭게 몸이 움직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위의 집사님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버지와의 관계했던 방식, 경험, 상처, 그 부정적인 것들에 붙잡혀 있었다면 절대 그렇게 못했을 것입니다. 그분은
그 순간 병석에 누워계신 연세드신 한인간의 아픔을 보신 거죠. 어떻게 하면 남은 인생 평화롭게 해드릴
수 있을까의 기운에 더 사로잡히신 거죠. 아버님과의 관계에서 무게감을 뺀거예요. 몸을 좀더 가볍게하니 아버지의 고통과 아픔이 보인거죠. 몸을 가볍게
해야 일상에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바람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래야 빵을 제대로 만드는데 집중할 수 있고 그래야 힘들어도 지구력있게
버틸 수 있고 그래야 못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해보지도 않고 스스로 포기하며 살아가지 않고 언제든지 자유롭게 감동의 바람이 부는데로 자신을 맡기며
한옥타브 위의 삶을 위해 용기있는 한걸음을 내디딜수 있는 거죠.
불어오는
바람에 내 몸을 맡길 수 있도록 좀더 몸을 가볍게 내려놓을 것 내려놓고 흘려보낼 것 흘려보내고 비울 것 비우고 성령의 기운을 내 안에 초대하며
살아가는 한주간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