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영혼 요한 복음 8장 31-32절
동녘이 30년을
넘어서면서 교회의 표어를 바꿉니다. 처음 표어는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신앙과 기독교내의 미신타파라는 기독교
개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동녘교회는 말 안되는 기독교에 저항하면서 말되는 기독교, 신앙을 도깨비 방망이 식으로 주술화하지 않고 주체적 신앙으로 우리가 선 곳에서 자기 변화와 사회변화의 누룩이
되자는 사명을 가지고 지난 30년을 살아왔습니다. 큰 주제의
틀이 변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시대의 언어로 새롭게 했습니다.
그 처음의 단어로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단어를 공동체가 함께 집어넣었습니다. 동녘은
예수님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신앙인으로 살아가길 희망합니다. 사실 신앙과 자유는 결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은 어쩌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일텐데 이게 자유라는 단어와 맞아떨어지는가? 그런 생각을 한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적대자들 조차도 “선생님 선생님은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예수님이란 분이 누구에게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여기서의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
여러분은 자유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이명박, 박근혜씨가 권력을 쥐고는 국정원부터, 법원, 검찰, 공기업
경영권, 심지어는 대기업까지 틀어 쥐고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야 정말 자유로운 영혼들이구나 하지 않습니다. 삶이 주는 억압의 굴레를
벗고 그만두고 싶을 때 언제라도 그만두고 가고 싶은데 가고 먹고 싶은 것 먹고 하고 싶은 일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자유로운 영혼이라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자유로움을 이야기하기에는 “내
맘대로의 자유”만으로는 뭔가 많이 불충분합니다.
삶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번째 부류는 퐁당형입니다. 위험한 곳에 퐁당퐁당 빠지며 사는 부류입니다. 자기 원칙에 따라 사는게 아니라 삶의 큰 조류에 휩쓸려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남들 학원보내니까 학원보내고 대학가서 남들 술먹으니까 술먹고 담배피니까 담배피고 결혼하니까 결혼하고 청탁하니까 청탁하고 삥뜯으니까
삥뜯고 다 그렇게 사는 세상이니까 그렇게 사는 겁니다. 퐁당퐁당 빠져도 원래 세상살이가 다 그런거야
현실에 순응하면서 좋은게 좋은 식으로 살아가는 형입니다.
지금처럼 좋은 시절을 만나면 큰 문제가 없지만 좋지 않은
시절은 만나면 언제든지 퐁당퐁당 시대가 요구하는 질서에 편승합니다. 그러면서 잘못되면 세상 탓하고 상황을
원망하고 그렇게 만든 남들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창세기 아담과 하와처럼 분명 자기가 먹고 싶어서 먹었으면서도
하와가 먹자고 해서 먹었고 남들 다 먹으니까 먹어도 되는 줄 알았다고 변명합니다. 평생을 상황에 끌려다닙니다. 결국 내 삶, 내 선택이 없습니다.
남의 인생을 사는 거죠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야형입니다. 바다같이 위험한 곳은 방파제를 쌓고 접근을 하지 않는
부류들입니다. 지난 주에 비발디의 사계 전 악장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잘 듣고 들어오는데 함께 간 일행과 오랜만에 택시를 탔어요. 오면서
음악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운전기사 아저씨가 불편했던 모양이예요. 이분이 기독교인인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찬송가를 제외한 모든 음악은 사탄의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분이셔요. 우리가 클래식 음악이야기를
하니까 사탄의 음악예기를 하는 거라 생각하셨나봐요. 한 말씀 거하게 하시더라구요. 모든 음악은 사탄의 음악과 하느님의 음악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느님을 찬양하는 음악을 들으라는 겁니다. 졸지에 우리는 나쁜 악령의 음악을 찬양하는 사람이 된 거예요.
육지와 바다를 구분하듯이 삶에 경계선을 두고는 속되다고
생각하는 것을 벌레 보듯 가까이 하지 않는 부류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삶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경계선
밖의 것들을 끊임없이 혐오합니다. 사람을 구분하고 종교에 벽을 쌓고 금을 긋고 담을 쌓고 끊임없이 경계선을
만들어 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주의자들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밀어내고 병든 사람들을 솎아내고 자신들의 기준에 불경스럽고 거룩하지 못한 것들을 밖으로 구분해서 몰아냅니다. 삶에서 끊임없는 단절과 분리와 소외를 낳습니다.
세번째 부류의 사람은 연꽃형입니다. 앞의 두부류의 사람은 경계선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의 차이일뿐 경계선을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번째 부류의 사람은 이 경계선을 허무는 사람들입니다.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허무는 사람들입니다. 위험한 바다이지만 그 바다에 들어가서 삽니다. 배를 타고 노를 젓고 바람이 불거나 폭풍이 몰아치면 기가막히게 윈드 서핑을 하면서 파도를 가르지르며 살아가는
부류들입니다. 진흙이라고 가리지 않고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삶에 다가오는 이들을 누구든 환대하며
함께 살아가지만 마치 진흙속에 핀 연꽃과 같이 독야청청 물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쳐놓은 성스럽다고
하는 곳에 속된 것이 있고 속된 것 안에 성스러운 것이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유행가를
부르면서도 선한 삶을 길어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매일같이 찬송가를 부르면서도 국가를 통째로 말아먹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세속한가운데서 살지만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내 종교 안이든 밖이든 자유롭습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찬송가냐 유행가냐 가리지 않습니다. 술을 마시는 자리냐 마시지 않는 자리냐 가리지 않습니다. 경계선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넘나듭니다. 그곳을 넘나들며 소통하고
사랑하고 어울립니다. 그러면서도 물들지 않습니다. 경계선을
허문다는 의미에서는 첫번째나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보다는 훨씬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독야청청 나홀로 연꽃입니다.
네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디오 함께 보실까요?
(영상은 우리들이라는 영화의 한장면입니다. 매일 맞기만 하는남동생에게
누나가 묻습니다. 왜 맞고만 오냐고 때리라고? 그랬더니 동생왈
그래 한대 그래서 때렸다고 그런데 두대 세대 계속 때리다보면 언제 노냐고 나는 놀고 싶다고 그래서 한대 때리고는 또 맞았는데 그냥 놀았다고. 나는 놀고 싶다고…) 어떠세요? 우리들이라는
영화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농락당하지 않고 삶에서 자기 즐거움과 자기 삶의 이유를 빼앗기지 않는 그래서
마침내 모든 상황을 자기판으로 만들어버리는 형입니다.
누룩형입니다. 누룩이
뭐죠? 이스트입니다. 빵에 들어가면 밀가루 전체에 스며들어
전체를 부풀립니다. 경계선이 없습니다. 육지에 있을 때는
육지에서 놀지만 바다에 가면 배를 타고 노를 저으며 때로는 윈드 서핑을 하고 바다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라는게 때때로 바다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잠수를 하는 거예요. 전복을 잡고 산호초를 구경하면서 그 귀한 순간들을 내 판으로 만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사회가 관습이 쳐놓았던 다양한 삶의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하늘의 소명에 신실했던 분입니다. 율법은 끊임없이 사람과 사람사이에 종교와 종교사이에
민족과 민족사이에 성과 속 사이에 경계선을 만들고 담을 쌓고 벽을 만들었지만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자기 사랑에 충실하셨고 그 사랑이 결국은 타자에게
스며들어 전체에 영향을 주는 누룩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동녘은 그런 자유로운 영혼의 삶을 희망합니다. 경계선을 넘어 사랑에 충성하는 예수님의 삶과 같은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통해 다가오시는 하느님 앞에 열린 모습으로, 사회가
쳐놓은 틀에 메이지 않고 율법주의적 종교와 관습의 속박을 벗어던지고 모든 타자앞에 모든 마음앞에 환대와 배움의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닉탓한 스님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타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어떤 상황속에서도(육지에
있든, 바다에 있든 바다에 빠져있든)
지금 이순간 여기서 깨어있는 수행과 사랑을 통하여 충분한
평화를 길러올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웃음과 그 기운과 그 사랑이 퍼지고 스며들어
주변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면 타자에게 줄 수 있는 인생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은 삶의 신비와 은총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아름다움과 고귀한 가치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이며 신비임을 날마다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의 힘이 그 진리의 힘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성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힘으로 예수와 함께 바다밖에서는 드넓은 초원을 달리며
사랑가를 부르고
바다 위에서는 거친 파도를 가르며 사랑가를 부르고
바다에 빠지면 수면아래로 내려가 잠수를 하면서 사랑노래를
부르면서
상황에 농락당하지 않고 우리가 선 바로 이땅에서 누룩처럼
스며들어
하늘 빛 물감 물들이며 살아가는 그런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가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