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가족 마태복음 12장 46-50절
여전히 코로나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는 이들, 그리고 확산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있는 전 세계 모든 이들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화를 전합니다.
가정의 달 5월입니다. 어린이날도 있고 부모님의 날도 있고 스승의 날도 있고 성년의 날도 있고 부부의 날도 있고 청소년의 날도 있고 온갖 가정 구성원들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코로나의 위기 속에서도 일을 멈추고 심지어 외출, 외식을 멈추고, 교회 모임도 멈추고 각종 모든 소모임을 멈추고 심지어 친척들 간, 부모님들 간의 만남까지도 멈춰도 멈추지 못했던 게 함께 사는 가족들이었습니다. 모든 관계와 만남이 멈추었어도 오히려 들어오지 않던 자식들이 들어오고, 나가라고 해도 나가지도 않고 일까지도 멈추고, 혹은 재택으로 바뀌어 지내는 순간까지도 오히려 더 오랜 시간 함께 보내며 얼굴을 부딪치고 밥상까지 집 밥을 해 먹어가면서까지 함께 해야 하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 가족들이었습니다. 다시 못 올 시간을 선물 받은 느낌으로 사시는 분들도 계시고 제발 좀 코로나 좀 빨리 끝나서 제발 밖으로 들 나갔으면 하는 심정으로 사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삶에 있어서의 기초단위인 이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 가정에 공을 잘 들이는게 평화의 지름길인지를 절실하게 경험하게 되는 그런 기회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가족 개념을 넓게 확장시켜 주셨습니다. 육체적인 혈연으로만 맺어진 가족만이 가족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연대하고 좋은 세상을 향해 뜻과 마음과 결을 함께 만들어가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가족들임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처음에 우환이 고립되었을 때 창문을 열면서 서로를 응원하고 우환에서 전세기가 들어올 때 우리가 아산이다 하면서 여론을 바꾸어 주고 대구가 고립되어 있었을 때 내 일처럼 내려간 간호사, 매일같이 일하는 분들을 위해서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주고 고립되어 있는 분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책을 보내주고 연대하고 함께 했던 많은 분들을 보면 육신의 가족들보다도 더 가족같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가족들이 이런 거구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지구 반대쪽에 있는 사람조차도 때로는 가족이 될 수가 있지만 매일 얼굴을 마주보고 밥상을 마주하고 잠자리를 함께 하는 사람일지라도 남보다도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가깝거나 멀거나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수없이 많은 관계들안에 하나님의 뜻을 채우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가족도 가족이 될 수 없고 그 안에 하나님의 뜻 / 하나님의 마음을 채우면 남도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겁니다. 특히 가까운 매일같이 만나는 사람일수록 더더욱요. 차라리 먼 사람들은 괜찮아요. 지구촌 반대편에 있으면 좋아요 눌러주고 유튜브 눌러주고 개미군단처럼 십시일반 마음도 모으고 해서 잘할 수 있고 차라리 우리가 아산이다 하면서 인터넷으로 홍보도 하고 연대도 하고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차라리 먼데 있는 사람을 감정 내려놓고 가족같이 대하라면 평정심을 가지고 교양있게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가족들을 가족처럼 대하는 일이 제일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 제일 어렵습니다.
사람이 자주 만나고 편해지만 더 잘해야 하는데 때때로 더 함부로 합니다. 쉽게 대하고 막대합니다. 혹시라도 저와 가까워지셔서 상처받으신 분들 계시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더 겸손히 노력하겠습니다. 예수님!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하느님의 마음과 그 뜻을 채워야 비로소 진정한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상에서 매일같이 만나고 부딪히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청소하시는 아주머니, 아저씨부터, 경비 관리하시는 분들, 슈퍼마켓, 빵집 아저씨 아줌마, 일터에서 만나는 직장 상사, 부하직원 관계가 좋으면 괜찮은데 매사에 관계가 어긋나는 사람들 그 안에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도 잘 못합니다. 감정 때문입니다. 감정이 평정되었을 때는 뭐든 신사적으로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도 사람인지라 감정 컨트롤이 안 되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침묵기도를 자주하는데 최근에 그것 말고 또 다른 방법을 경험했습니다.
저희 집은 단독주택에 있습니다. 주차난이 심각합니다. 밤이 되면 골목골목 심지어는 인도까지 주차를 할 정도로 차가 많습니다. 그런데 얌체처럼 자기 집 앞 도로를 점령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차금지 표지판을 자기 집 도로에 딱 세워놓고는 자기 차만 대는 겁니다. 개인 땅도 아니고 어자피 다 불법인데 나누면서 써야되잖아요. 특히 단독주택은 저녁때가 되면 주차난이 심각합니다. 화가 나잖아요. 그래서 경찰서에다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단독으로 점령해서는 안된데요. 그래서 치워달라고 했더니 그걸 놓는다고 해서 위법은 아니래요. 그럼 제가 치우면 어떻게 되냐고 했더니 개인의 사적인 물건을 제가 함부로 치우면 안된데요. 그건 개인의 물건을 내가 만지는 것이니까. 그차도 못대게 하려면 차라리 사진찍어서 도로교통과에 보내래요. 신고 들어온 건 다 딱지 처리한다는 겁니다. 나도 못 대게 하는데 그사람도 못대게 신고를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사진 찍어서 신고를 했을까요? 않했을까요? 제가 화나는 건 독점하는 게 화가 나는 거예요. 다들 어려운데 독점하면 안되잖아요. 제가 차를 못댈 수도 있지만 자기가 독점하는 건 안돼잖아요. 그래서 한참 화가 나서 몇 일을 식식대고 있는데 볼 때마다 화가 나는 거예요. 이 화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더라구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사람이 저렇게 까지 않하던 사람인데 왜 저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을 찾아가지는 않고 그냥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어요. 그런데 뭔가가 보여요. 그 전까지는 정말로 제가 그곳에서 10년을 살면서도 안보였던(보이기는 했지만 인식이 되지 않았던)게 보이더라구요. 저희 집 주인은 이미 제가 오기 전부터 그 표지팻말을 저희집 앞에 두고 사셨어요. 그분이 특별히 이기적이거나 나뻐서 그러신게 아니예요. 저희 집 주인이 대형건물들 청소도구를 납품하는 일을 하셔요. 그래서 매일같이 트럭이 수시로 들락날락 거려요. 그래서 짐을 싣고 내려야하니까 항상 그 팻말을 집 앞 도로에 놓으셔요. 저는 이분이 하시는 일이 그러시니 이것이 감정으로까지는 안올라왔던 거예요. 그런데 옆집에 사시는 분들 입장에서보면 다를 수 있는 거예요. 늘상 그걸 핑계삼아 저녁에 당신들 차는 늘 당신들 집앞에 세우는데 자기는 수년동안을 살면서 좀 억울한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러나 보니 하나둘씩 그런 게 생겨나는 거예요. 그런데 신기한게요. 저희 집앞 주인집 사장님이 해놓은 걸 인식하는 순간에 그 화가 다 사라지더라구요. 그 사람의 입장과 처지에서 행동을 이해하게 되다보니 감정이 가라앉더라구요. 그래서 이성적으로 대처를 했죠. 제가 일일이 다 프린트해서 그동네에 있는 주차팻말에 다 붙여놓았어요. 이렇게 세워놓으시는 건 이해하겠다고. 그런데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늦은 밤에는 급한 경우 차를 대도 이해해 달라고! 그다음부터는 가능하면 주차팻말 놓여있는 곳은 차를 대지 않구요. 어쩔 수없이 대는 경우에는 그분도 제 처지를 이해했던지 그 표지판을 보도블럭위로 말없이 올려놓더라구요.
모든 사람을 가족처럼 교양있게 대우하며 살아가지는 못하더라도 때때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다보면 좀 더 감정 조절을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감정의 대부분은 내 입장에서 내 이유가 커지기 때문인데 상대가 저런 행동을 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지난 주에 임계장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은퇴이후 비정규직 노동현장으로 몰리는 어르신들의 이야기인데 평생을 정규직으로 사셨던 분이 은퇴이후 4년동안 비정규직 현장에서 겪으신 이야기를 담아놓으셨는데 먹먹하더라구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더 참담한 비정규직의 현실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시종일관 떠오르는 생각은 역지사지의 마음이었어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는 가장 비참한 건 최저시급보다도 온갖 비인간적인 수모더라구요. 우리가 옷을 다 한번씩 바꿔 입고 살아보면 서로를 향한 마음들이 훨씬 커질 테고 그러면 좀 더 감정을 넘어서서 인간다운 인간의 맘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그림 한점을 보여드리고 마칠까 합니다.
스페인의 작은 시골마을 성당에 있는 예수님 그림이었습니다. 시가 지정한 문화재입니다. 물감이 많이 벗겨져 예수님의 얼굴이 영 못쓰게 되었습니다. 문화재다 보니 아무도 손을 못 대고 으레 그런가보다 하고 모두가 그냥 지나쳤던 그림입니다. 그런데 딱 한사람이 오갈 때마다 예수님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눈물 흘리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성당을 매일 청소하시는 할머니 교인이셨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는 물감을 직접 챙겨 오셨습니다. 그리고 손을 보셨습니다. 불안한 예감은 늘 비껴가지를 않습니다. 색칠을 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고통어린 모습은 사라지고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변해갑니다. 엽기 사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요. 교회도 시당국도 발칵 뒤집혔습니다. 감히 거룩하신 예수님의 얼굴에 손을 댄 불경스러운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 화가의 딸은 고발까지 하겠다고 지역언론과 인터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큰 웃음을 주는 예수님 얼굴 보겠다고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겁니다. 시 당국은 관람료를 받아 그림을 복원하는 기금으로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덕에 할머니는 49%의 저작권료까지 받게 됩니다. 이 당국은 이 그림을 복원했을까요? 아직까지 못하고 있답니다. 이 이야기가 상징하는 것은 많지만 저는 가시관, 고통, 아픔만을 담아냈을 때는 소외되었던 이 그림이 웃음과 우스꽝스러운 즐거움을 주는 예수님이 되셨을 때 비로소 만인의 예수가 되었다고 해석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속에서도 역지 사지로 한번 더 생각하면서 사람에 대한 여유있는 웃음을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가족들을 가까이에서부터 멀리 좀더 확대해가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패밀리가 있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있는 곳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가족입니다. 일상의 가장 가깝고 평범한 곳에 하나님 나라의 선함을 키워가시는 우리의 5월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