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사랑 에베소서 3장 17-19절
새해 벽두부터 세계가 전쟁 위기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지금은 진정되는 분위기인 듯 하지만 미국은 이란의 군부 실세를 죽이고 이란은 핵무기 동결 억제 협상에서 탈퇴하고 여객기를 격추하였습니다. 어떠한 전쟁도 이기는 자는 없습니다. 휘발유를 잔뜩 뿌려놓은 건물에서 라이타를 켜는 행위는 자살행위입니다. 가스가 꽉 차있는 차안에서는 문을 열어서 환기를 해야지 성냥을 켜는 행위는 자살행위입니다. 지금 중동에서 미국이 한 짓도 이란이 한짓도 이런 바로 이런 행위입니다. 핵개발을 멈추겠다고 하고 동결했으면 미국과 유럽연합은 경제제제를 풀어주었어야 합니다. 이란은 지금까지 핵협상과 관련 꾸준히 합의를 지켜왔습니다. 상호간에 협상을 하고 합의 이행을 하는 그런 테이블위에서 총질을 해대는 건 양아치만도 못한 짓들입니다. 더구나 솔레이마니는 사우디가 이란에 화해의 아젠다를 보낸 상황에서 국가 최고지도자의 메시지를 가지고 가던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국가 원수를 친 거나 나름 없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이란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이란이 한 짓은 더 바보같은 짓입니다. 아무리 실수라해도 민간인을 죽여놓고 말이 안되는 상황입니다.
세계의 근본적인 악의 축의 하나는 세계경찰을 자임하는 미국의 일방주의입니다. 그 일방주의는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 침공으로 IS를 낳게 했구요. 이제 중동에서는 더 잔인하고 더 강력한 반미세력이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미국의 권력자들은 이런 걸 의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정치지도자들이나 권력자들은 그럴 수 있어요. 자기들 권력을 유지하고 정권을 지키고 자신들의 존립 근거를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그럴 수 있어요.
문제는 그런 쓰레기 같은 권력에 계속해서 표를 주는 대중들입니다. 민주주의의 사회에서 우매한 대중은 우매한 권력을 낳구요. 결국 우매한 권력이 자행하는 모든 잔인한 폭력의 공범자들입니다.
올해 우리나라도 총선을 치릅니다. 여러분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박근혜 전대통령이 탄핵되고 과도기를 거쳐 현정부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변화의 물꼬를 튼게 바로 지난 총선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민심이 이반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의회 권력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집권당이 과반수는 고사하고 1당이 되지도 못했습니다. 그 의회 권력의 변화가 지방 권력의 변화를 이끌었고 탄핵을 가결시켰고 지금의 정부를 낳았습니다.
이번 총선은 지난 3년 전 광화문을 달구었던 촛불의 완성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과제가 무능하고 오만했던 국가 지도자에 대한 심판이었다면 이번은 의회권력를 제대로 세우는 일이 이번 총선의 과제입니다. 그래야 사법권력도 제대로 세울 수 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이들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안하무인에 소통도 안되고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들 권력과 재산지키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국회의원들을 청산시켜버려야 합니다. 정치 철학없이 돈만 가지고 정치하려드는 사람들 다 몰아내야합니다. 녹색당도 의석을 얻고 민중당도 다양한 소수 정당도 정치권에 많이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기후변화문제도 노동자들의 인권, 실업 문제들도, 다양한 소수자들의 삶의 문제들이 국회안에서 공론화되고 기계가 발달되고 기술이 발달되고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고 삶의 질이 더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소수의 권력층이나 지배층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고민하면서 만들어가는 의회를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맹자 이야기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이 사냥터를 만들었는데 그 사냥터를 개방해서 모든 국민들이 다 그곳에서 사냥을 할 수있게 만들어놓으면 누가 반대하겠냐는 거죠. 그 넓은 땅을 사냥터로 만들어놓고 자기 혼자가 즐기고 혼자서 모든 것을 독식하니까 문제지 모든 백성이 자유롭게 신나게 다 이용할수 있게 만들어놓으면 더 크게 만들라고 한다는 거죠. 인권과 생명이 보호받고 자연과 함께 작은 자 하나까지도 함께 공존과 공생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으로 그런 총선을 잘 치를 수 있는 한해가 되길 빕니다.
교회적으로는 여기가 교회잖아요. 여기가 학교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학원도 아니고 직장도 아니고 사회단체도 아니고 교회잖아요. 교회는 어떤 곳이예요? 교회는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지속적으로 경험되는 곳이 교회예요. 여러분 미역국 끓여드리께요. 하고는 버섯도 넣고 다시마도 넣고 파도 넣고 다양한 해물도 넣고 그렇게 끓였는데 맛있어요. 그런데 미역이 빠졌어요. 미역국이예요. 아니죠. 미역국에는 미역이 들어가야해요. 다른 것 다 있어도 <사랑이 느껴지지 않으면> 이게 없으면 교회가 아니예요. 건물도 없고 돈도 없고 사람도 별로 없고 다 없어요. 그런데 몇 명되지도 않는데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 볼 때마다 꽉차있어요. 그래서 그 사랑이 흘러넘쳐서 주체를 못하고 막 나눠줘야해요. 이런 곳이 교회죠.
그래서 세상 어느 곳에서도 사람취급 못 받는 사람도 여기에서는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해요. 어떤 옷을 입고 와도 편견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받아들여져야해요. 어떤 성격 기질의 사람이 있어도 아파서 그러러니, 뭔가 꼬여서 그러려니, 뭔가 상처가 깊어서 그러려니 측은지심이 발동해야하는 거지, 왜 저런 사람이 교회를 나오지 그래서는 안돼는 거죠. 교회를 나와서는 안되는 사람은 이 세상이 없어요.
지난 주에 오랫동안 교회를 나오지 않던 어느 교인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최근에 하던 일을 접으셨데요. 너무도 맘 고생을 많이 하셨더라구요. 심지어 너무 힘들어서 언니에게 그 일을 맡기고 두 달정도 쉬기도 했데요. 맘 고생이 심했던 겁니다. 그런데 일터 한곳에 동녘을 다닐 때 받았던 텀블러를 항상 놔두었데요. 아마도 집사님 중 누군가에서 받은 선물이었데요. 근데 힘들때마다 그게 자꾸 눈에 들어오고 그게 눈에 들어오면 그 집사님이 생각이 나고 말로 설명이 안되는데 그냥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그랬데요. 그분도 그것을 선물로 주실 때 그 의미없이 주셨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의미없이 나누고 주신 그 어떤 것도 사람이 힘들때는 그게 힘이 되나봐요. 여기서 나누는 작은 웃음들, 위로의 말들, 격려의 말들, 저기 나눔터에서 주고 받는 크고 작은 것들, 일주일에 한번 이지만 마주치는 눈빛들, 한 번씩 말없이 잡아주는 손길들이,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살 때는 별게 아닌데요.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지낼 때는 그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도 나를 세워주는 힘이 된다는 겁니다.
아내가 다니는 교회가 1년에 한 번씩 창립기념예배 때 전교인에게 선물을 주는데 선물이 쾌 퀄리티가 있어요. 선물이 좋으니까 그날만 친인척에 동네분들까지 다 데리고 오는 거예요. 그래서 올해부터 남발을 막기 위해 교환권을 줬데요. 소모임을 통해서 하나씩 나눠줬데요. 지난 연말에!!! 그리고 첫주에 그 교환권으로 선물을 교환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교환권만 받고 선물로 교환하지 못하고 그 새 돌아가신 분이 계시데요. 삶이 그래요. 끝없이 지속될 줄만 알고 살았는데 어느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분 곁으로 훌쩍 떠납니다.
지난 주에 나눈 말씀 중에 그런 말씀이 있었어요. “너무 판단하다보며 사랑할 시간이 없다고” 늘 하는 이야기지만 시간이 주어지면 그 시간동안에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랑을 가꾸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어요. 우리가 노력하는 만큼 우리안에 사랑이 꽉차면 더 이상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느님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그런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나이 한 살 더 먹으니 어느새 중년입니다. 아직 저는 배워야할 게 많고 성숙해야할게 많은데 누군가에게는 아빠구요. 누군가에게는 목사구요.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든든한 자식입니다. 하루종일 제 전화만 기다리는 부모님도 계십니다. 나이들면서 점점 무게감과 책임감이 커지는데 거꾸로 눈도 잘 안보이구요. 약을 먹어야할 조건들이 더 많이 생기구요. 종종 더 많은 실수와 잘못에 노출됩니다. 지난 주에는 수영을 하려고 수영장에 갔는데 수영복이 없어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나요. 수영복 가방이 너무 오래되어서 바꾸었는데 그 안에 없는 거예요. 옛날 가방에도 없고 뻔하거든요. 차에 없으면 가방에 있어야 하는데. 찾아찾아 가보니 제가 수영장 탈의실에 놓고 그냥 온 거예요. 분실함에 있더라구요. 실수도 많고 깜빡깜빡하는게 더 심해지고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더 많은 것들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냥 물어보길래 제 생각을 말했는데 목사님이 그렇게 하라고 했데 하면서 제 말이 권력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대했던 태도가 동녘의 분위기로 전락하기도 하더라구요.(화분하나 주었더니 동녘이 따뜻해, 화분하나 안챙겨주고 맹맹했으면 동녘 참 쌀쌀해 그랬을거 아니예요. 이렇게 저렇게 다 가볍게만 느껴지지 않는 위치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 자신이 하는 행동과 쏟아내는 말들, 감정들, 이건 것들을 다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알아차리면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점점 퇴화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요. 쏟아낸 말 행동을 주워담을 수는 없지만 살아가면서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들, 어떤 감정에 휩싸여서 살아가는지만 알고 살아도 사람이 막가지는 않을 거 아니예요.
저도 인내심을 잃는 교황을 보면서 많이 생각했어요. 사람이니까 너무나 많은 일들속에서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화를 냈는지 조차도 모르고 살아가는 겁니다. 교황님은 뒤늦게 알아차렸죠. 그리고 그 순간 정중하게 사과했습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 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알면 조절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무지입니다. 지식에 대한 무지가 아닙니다. 성경에 무슨 이야기가 쓰여있는지 모르는게 죄가 되지 않습니다. 된장찌개를 어떻게 끓이는지 몰라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차를 운전못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되고 모르면 물어보면 됩니다.
문제는 내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걸 못 느끼고 살아가는 거죠. 내가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무지입니다. 내 화가 누군가에게 꽂혀서 심장에 박히고 있는데 나는 화가 난지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무지입니다.
사람은 탐욕인줄 아는 순간 조절합니다. 문제는 내가 엄청난 탐욕안에 있는데 그 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저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 보는 시간도 많이 갖고 남의 예기도 좀 잘 듣고 지난 후에라도 깨달게 되면 행동하고 우리가 너무 많이 배우고 읽어서 아는 것 같은 지식, 실제로 몸으로 알지 못하는 그런 지식, 안다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삶, 그런 지식을 삶으로 몸으로 만들어가며 말은 적게 하고 몸을 자주 움직이는 그러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올해는 경자년입니다. 경자는 흰색 밝고 순수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쥐는 부지런함을 의미합니다. 내공을 쌓아가는데 부지런하고 좋은 일꾼을 뽑는 일에도 부지런하고 풍성한 사랑을 만들어내는 일에도 부지런하고 알아차리는 대도 부지런해서 세상을 보다 밝고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경자년을 이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