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증인 사도행전
4장 32-35절
하와이에 갔을 때 제일 오래된 감리교회에 가보았습니다. 교회도 예쁘게 잘 지어졌고 역사 자료실도 잘 꾸며져 있고 교회를 안내하시는 분들도 사무원들도 무척이나 친절했습니다. 그런데 제일 감동적이었던 건 교회 입구에 놓여진 통이었습니다. 사랑의
쌀 나누기! 누구나 갖다 놓고 누구나 가져 갈 수 있는 곳간! 오픈된
공간이었고 저녁으로는 누가 갖다 놓아도 누가 가져가도 모를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누구나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지역사회 구호단체에도 보냅니다. 사랑합니다. 힘내세요.
옛날 저희 어렸을 때는 성미라는 게 있었습니다. 밥 먹을 때마다 제일 먼저 한 공기를 퍼서 성미주머니에 넣습니다. 그건
하느님 몫입니다. 하느님의 몫은 이웃의 몫입니다. 옛날에는
목사님 사례비도 드리기 어려우니 성미로 사례비를 드리기도 하고, 일부는 교회나 지역내 어려운 이들에게
주기도 했습니다. 한국 교회 일화에 보면 교회 밖에 그 성미통을 놔둔 교회도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놔두면 교회 안의 어려운 사람에게만 전달되지만 교회 밖에 놔두면 저녁으로 몰래 자존심 다치지 않고
정말 먹을 양식이 떨어지면 거기에 가서 쌀을 가져다 아이들을 먹이는 거죠. 그러다가 양식이 좀 넉넉하게
생기면 다시 갖다 놓고 그럽니다. 지역에 있는 성미통 하나가 순환을 통해 지역의 가난을 이겨나가고 전체를
살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교회 지역에 하나만 있어도 사람들 교회 욕 안합니다. 그런 교회 더 생겨나라고 칭찬하고 교회 짓는데 연판장 안 돌리고 민원센터에 민원 안 넣습니다. 아마 더 많이 생기라고 응원하고 지지해 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기획위원회에서 오병이어 은행을 만들자는
기획위원회의 중론은 매우 아름다운 결정이었습니다. 다행히 옛날에 위기관리 헌금이라고 갑작스럽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쓸 수 있는 헌금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헌금을 쓰셨던 분이 교회 어려운 일을 겪는 분들을 생각하시면서 다시 헌금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종자씨 삼아서 오병이어 은행을 만듭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갑작스럽게 어려움을 겪으면서 단돈 만원 구경하기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최소한의 생활비를 빌려드리는 은행입니다. 최대 50만원까지 월 1회, 무이자, 무기한상환이 원칙입니다. 돈이 생길 때 갚는 거고 이자는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갚게 되면 또 누군가를 위해 쓰여지게 됩니다. 저희
교회 내에서 시작하지만 좀 더 기금이 모아지면 지역내로도 옮겨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뜻하지 않은 위기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과 함께 연대하며 살아가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헌금을
따로 걷지를 않고 교회 헌금의 일정금액을 적립하는 방식으로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이야기는 예수님 이후의
예수님 이야깁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증거가 공동체의 삶안에서 나타난 이야깁니다. 초대교회 교우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공동으로 사용했다는 겁니다. 사유재산이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유재산이 있었고 개인의 소유가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소유물로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집에 도서관이 생기면 우리 가정을 위한 서재이지만
마을에 도서관이 생기면 마을전체를 위한 도서관인 거죠. 김가영 집사님 아버님이 무상으로 농사지을
땅을 빌려주셨어요. 올해 저희가 그 땅에서 농사를 지을 예정입니다. 작은 100여평의 텃밭이지만 개인텃밭이 아닌 공동체 텃밭으로 사용합니다. 새신자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여러분들 속으셨습니다. 우리는 텃밭을 투자하는 분들에게는 물론 투자하지 않는 분들에게도 꾸러미를 드립니다. 물론 투자한 분들 우선으로 드리지만 투자하지 않았다고 않드리지 않습니다. 함께
나 하나 먹자고 투자한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잘 먹자고 투자한 것이니까요.
그 텃밭에서 지역아동센터 생태 텃밭교실도 열 예정입니다. 그곳에서 아이들이 자연에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키우고 수확하고 나누는 일들을 해나갈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아이들도 원하는 친구들 있으면 누구나 다 보내주세요. 금요일 오후 3-5시에 할 예정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주신 귀한 것들로 공적인 영역을 넓혀서
모두가 혜택을 누리고 모두가 함께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간 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갔던 초대교인들의 이야깁니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정말 한사람도 없었겠습니까? 있었겠지요.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은행을 만들었던 방글라데시 무하마드 유누스의 그라민은행은 단돈 27달러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 은행이 주로 여성들과 빈곤층을 대상으로 운영을 하는데 2천여
마을에 6만여명에게 돈을 빌려주는 은행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그
은행을 운영하는 원칙 중의 하나가 연대보증입니다. 공동체의 일원이 돈을 빌려갑니다. 그러면 그 공동체가 연대보증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돈을 갚겠지요. 돈을 못 갚으면 공동체가 공동으로 책임을 져주는 방식입니다. 중요한 건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면 못갚을 것이라는 편견이 있는데 상환률이 90%가 넘는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러한 제도들로
인하여 가난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맘쓰고 정주고 서로 염려하고 제도적으로 정착하고 하는
사람들의 섬세한 마음 결로 가난하지만 웃으며 살 수 있는 사회가 하느님 나라 공동체입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모두 다 그랬겠습니까? 그정도로
식구처럼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저는 이 대목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필요를 아는 건 매우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가난함을 느끼는 건 실제 경제적인 수준하고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빚하나 없어도 수입이 적어 가난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빚이 산더미 처럼 쌓여있는데도
스스로 부유하다고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난을 느끼는 건 상대적입니다. 사도들이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는데도 크게 말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서로 신뢰하고 믿고, 그 믿음과 신뢰해주는 만큼 제대로 잘 집행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일 첫부분은 뭐로 시작하죠? 제 1계명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그 앞에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 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우리가 종으로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출애굽을 위시해서 이스라엘 역사는 노예 해방사입니다. 이집트 제국에서
해방하셨고, 이스라엘이 왕권을 가지면서 왕권이 제사장의 권력까지 넘보게 되자 사람들이 왕앞에 노예가
됩니다. 그 노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예언자들이 등장하고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로 이어지는 제국 권력의 노예화로부터 저항하며 해방해나아가는 과정이 포로기 이후의 역사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종교권력에 대항하셨죠.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느님 이야기를 쉽게 전달하시는
랍비의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계셨고 사람의 병을 고쳐주는 치유의 은사를 달란트로 가지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는
그가 그 달란트와 재능으로 종교권력에 노예화 되어 있던 당시의 서민들에게 자유와 행복의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진 달란트와 재능을 가지고 생명에 대한 진정성을 가지고 자신들을 노예화시키는 종교의 폭력성들을 걷어치우고 자유롭게 살아가신 겁니다. 초대교회는 초대교회의 방식으로 자신들을 노예화시키는 물질, 사유재산, 가난을 넘어서서 함께 자유롭게 행복한 삶의 길들을 열어갑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방식으로 예수님이 살아가던 사회에서
예수님답게 함께 행복한 길을 걸어가신 거고 초대교회는 초대교회가 닥친 현실에서 초대교인들답게 함께 행복한 길을 걸어가신 겁니다.
옛날 미국에 살 때 소문난 음식점이 있었습니다. 맛도 있고 손님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갔더니 맛이 달라졌습니다. 주인이 바뀐 겁니다. 예전같지가 않아요. 가요 안가요? 안갑니다. 예수의 맛, 초대교회의
맛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노예화 되기를 원치않고 누구나 모두 함께 아름다운 생명으로 살아가길 원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 맛을 잃지 않으면서 동녘이 동녘스럽게 되고 내가 가진 재능과 달란트를
가지고 그 맛을 내기 위해 참다운 내 자신이 되는 것, 내가 예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초대교회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참 내가 되고, 우리가
참 우리가 되고 동녘이 그 맛을 잃지 않고 동녘스러워지는 것, 이것이 곧 부활의 증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다운 길에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