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 사도행전 4장 5-12절
오늘 읽은 성서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잘 오역하는 성서
본문 중의 하나입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어쩌면 가장 기독교를 독선적이고 폐쇄적인 종교로 만드는데 일등공신을
한 본문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 사후 초기 기독교운동의 과정에서 권력에 의해 희생된
예수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흥행이 되자 종교지도자들이 모여서 예수의 제자들을 세워놓고는 이 일의 배후가 누구냐 하고
다그칩니다. 그러자 예수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이 일의 배후는 우리 선생 예수다 너희들이 죽이고 너희들이
이 사회 밖으로 내치고 버린 바로 그 예수가 우리의 유일한 배후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고백가운데
오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과히 어록이 될만한 말입니다.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천국티켓을 독점으로 발매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은 예수님 만이 옳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은 틀렸고 잘못됐고 그렇기에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는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오만 방자한 종교의 바벨탑을 쌓게
하는 그런 본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이해야 말로 삶에 파토스와 정열을 가지고 자기 변화와 삶의
변혁을 꿈꾸었던 예수운동을 가장 천박하고 유치찬란한 종교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해보셨지요.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이 본문의 참 뜻을 압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도서관에 있다가 밥도 같이
먹고 학교 벤치에 앉아서 마주보고 이야기 하다가 밤 늦게까지 데이트를 했는데도 헤어지기가 싫어요.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혈압도 정상이고 심장도 건강하고 혈액순환도 잘 되는데 그녀만 보면 맥박이 빨라지고 심장이 쿵쾅쿵쾅거리고 시집가는 새색시처럼
얼굴이 빨개져요. 술도 안먹었는데. 정말 그래요. 추운 겨울에 두꺼운 파카를 꼭 껴입고 오들오들 떨면서 공원에 있는데 몇시간을 있어도 하나도 안추워요. 그렇게 오랫동안 공원을 거닐었는데 들어가기가 싫어요. 제가 미쳤었나봐요. 그때 그순간 그녀는 제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우리교회 안에 피었던 철쭉이 있었습니다. 저희 교회 올 때 매우 크고 꽃도 화려했던 놈이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잘 못 주어서 그런지 다 죽고 몇 가닥 남지 않은 아이입니다. 그때부터 참으로 정성껏 물을 주었습니다. 애중 중지키워가면서 지난 1년 동안 열심히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예쁘게 꽃을 피워주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사랑스러운지
교회 오면 한참 이 놈을 바라봐 주었습니다.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답고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슴
뛰는 삶의 뭔가를 느꼈습니다. 적어도 그 순간 이 꽃은 제 인생의 거룩한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다른 꽃들이 천박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에
수없이 많은 꽃들이 있지만 유독 이 꽃은 제 인생에 특별한 의미인 겁니다. 저의 가슴을 뛰게하고 세상을
다르게 보이게 하고…. 세상에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있지만 그 여인은 제 인생에서 특별한 의미인 겁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잘못되었거나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죠. 평생을
한번도 밥상을 제대로 받아 본적이 없는데 예수라는 사람은 자기를 식탁에 불러 식탁을 겸하면서 말을 건넵니다. 한결같이
다 손가락질하는데 그분은 길을 멈추고 이유를 묻고 말을 건네고 내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고 예수라는 존재는 그들의 인생에서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예수라는 분은 우리 인생에 특별한 존재다 라는 아름다운
고백의 언어입니다. 우리가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이런 가슴 뛰는 사랑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인생이
아름답습니까?
오늘의 고백에서보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똑 같은 언어도 어느 상황에서 쓰였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빨갱이라는 말이 새누리당안에서 쓰여지면 종북 좌파가 되지만 진보적인 정당안에서 나 좌빨이야라고 쓰여지면 기득권자가
아니고 체제 저항적이고 개혁적이다라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촛불이라는 단어가 80년에는 영원한 우리들의 오빠 가수 조용필씨가 연상되지만 2000년대
이후 광화문 광장, 그리고 민주화 집회의 상징성을 연상시켜줍니다. 언어는
어떤 시대 어떤 상황에서 누구와 쓰느냐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던 운동은 지금의 미투운동과
같이 거대한 권력(당시는 종교권력이 주였지만 지금은 모든 분야에서의 권력)이 형성한 카테고리를 허무는 일이었습니다. 종교권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세요. 사람들이 성추행을 당하고 집단 강간을 당하고 주변에서 그런짓하는지 다 알고 그래도 아무 말도
못하잖아요. 우리같이 다 멀쩡하고 다 정상적으로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인데 몸갖다 바치고 전재산 다 갖다
바치고 그러면서도 교회의 비리가 다 나와도 믿지 않잖아요. 종교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화시키고
병들게 하고 좁은 우물안에 가두어 버리면서 자기들 말만 잘듣는 우물안 개구리로 만들어버리는데도 거기에 목숨을 걸잖아요.
여러분 부모가 자식 여행을 보내면 여행가서 잘 즐기고
잘 놀다오기를 바라겠지요. 집생각만 하다가 오길 원하시겠어요? 하나님도
그러지 않을까요? 백명에서 오백명 되니까 성전 부수고 새로짓고 오백명에서 천명되니까 또 성전 부수고
새로짓고 천명에서 오천명 되니까 또 성전 부수고 새로짓고 평생 성전만 짓으며 살다가 오기를 바라시겠어요. 중심을
세우고 성찰하고 사랑하는 능력을 키워서 온세상 모든 생명과 신명나고 재미있게 살다가 오기를 바라시지 딱 교회라는 감옥에 갇혀 평생 살다오기를 바라시겠어요. 교회는 구원의 방주가 아닙니다. 교회는 삶의 중심입니다. 교회와 종교와 신앙은 중심/철학/신앙이
되야지 자신의 몸과 삶을 가두는 감옥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라고 부르는 그 이름 안에는 예수님이 꿈꾸고
예수님이 바라고 예수님께서 몸바쳐 살다가신 그 세상, 그 비전, 그
꿈이 있는 겁니다. 종교권력자들 앞에서 예수의 이름밖에 없다고 한 당찬 고백은 당신들이 만들어가는 억압적
/ 폭력적 질서에 대한 저항적인 파토스를 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열정과 확신입니다.
그런의미에서 여전히 예수님이 꿈꾼 그런 세상에 대한 열정과
확신 그 꿈을 가슴에 품고 가슴뛰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역시 행복한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이현주 목사님께서 쓰신 글에서 본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밤하늘에 별을 바라보면 유일하게 변하지 않고 일년내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별이 있습니다. 북극성입니다. 북극성이
일년내내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늘 변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함께 하니까 당연이 계절에 따라 위치가 변하는 게 당연한거죠. 즉 북극성이 절대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그 자리가 변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예수 운동의 특징중의 하나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타자에
대해 열려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여인 앞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으로, 노예앞에서는 노예의 마음으로 아이 앞에서는 아이의 마음으로 낮아졌습니다. 예수운동의
타자를 향한 사랑이 절대가 되기 위해 예수는 철저히 만나는 모든 타자 앞에 상대가 되었습니다.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이 거창고등학교 이사로 초청을 받으셨을
때 풀무원 원경선 선생님께서 교장선생님이셨는데 만나자 마자 “목사님 저희 학교의 주인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러셨데요.” 대부분 학생이나 교장이나 선생님이나 교육자와 피교육자
다 이렇게들 이야기 하잖아요. 그런데 그분께서 그러시더래요. 목사님
저희 학교의 주인은 설립이념입니다. 학생수가 적어도 선생수가 적어도 그 설립이념을 제대로 지키며 학교를
운영한다면 작아도 이 학교는 제대로된 학교로 존재할 것이지만 그것이 무너진다면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학교 설립이념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목사님을 이사로 모셨습니다.
그러시더래요.
모든 타자앞에서 상대가 되라는 건 내 삶의 중심철학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죠. 물은 자기의 속성을 잃지 않으면서 동터오는 새벽 풀잎위에서는 이슬 방울이 되고
농부의 이마에서는 더위를 식혀주는 땀이 되고 고통당하는 슬픔앞에서는 한 방울의 눈물이 되고 가뭄에 찌든 들녘에는 온대지를 적셔주는 빗방울이 됩니다. 마치 그 물처럼 그 본질적 속성을 잃지 않되 그철학과 정신과 신앙과 위엄을 잃지 않되 한없이 부드러운 유연성으로
타자앞에서 진실한 사랑이 되는 것 그것이 오직 예수의 이름안에 담긴 참된 절대성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예수의 이름으로 한주간 평화를 낳으시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