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순환 – 로마서 8장 28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유기농 텃밭농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중의 중요한 하나가 순환입니다. 순환의 방식에는 버릴게 없습니다. 요즘은
수세식 변소가 생기면서 그 귀한 똥과 오줌을 다 버리지만 옛날에는 남의 집에 갔다가도 똥은 집에서 싸라고 했습니다. 한해 농사 거름에 똥보다 귀한게 없는 겁니다. 실제로 옛날 오줌
똥으로 거름을 했을 때 배추와 요즘 유기농 배추와 영양분이 20-30배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버릴게 없습니다. 온갖 동물이 죽어도 핵이 되거나, 비닐같이 썩지 않는 영원이 다른 생명을 병들게 하는 무엇이 되지 않습니다. 모두
흙을 살리고 다른 동물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어린이 텃밭 교실을 하는데 애들이 벌레하면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막 울어요. 그런데 이재원 집사님이 그 무서워하는 아이들을 앉혀 놓고는 하나씩 하나씩 설명을
해줘요. 결국은 이놈들이 나를 살리는 놈들이다는 거죠. 지난
주에는 기겁을 하고 무서워하던 아이들이 엇그제는 흙을 만지면서 얼마나 신나게 텃밭을 가꾸는지 몰라요. 몸이
기억하는 거예요. 이재원 집사님께서 그 애를 써가면서 설명하신걸 아이가 무의식중에 몸이 기억하는 거예요. 새소리
바람소리, 나뭇가지 하나, 돌맹이 하나 순환하는 방식에는
버릴게 없습니다.
순환의 삶은 서로를 살려줍니다. 똥은 땅을 기름지게 하고 땅은
식물들을 건강하게 살려주고 식물들은 곤충과 동물들을 살려주고 그 동물들은 다시 땅을 기름지게 해 줍니다. 서로를
죽이고 노하고 싸움하고 분노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빅픽쳐를 보면 끊임없이 서로를 살려줍니다. 이것이
인간이 지속가능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상대를 경쟁의 상대가 아닌 나를
살려주는 생명으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귀해요 안 귀해요.(비
소리) 그래서 순환하는 삶에는 쓸모없는 존재가 없습니다. 서로 살려주는 존재!
현대사회의
병은 순환하지 않는 삶을 만들어내는데서 옵니다. 밭을 정리하다보니 비닐이 엄청나게 나와요. 수년이상 된 것 같은데 그냥 그대로 있어요. 땅의 순환을 방해하구요. 기운을 단절시켜요. 수십년이 지나도 그대로 있을 거예요. 숨통을 막구요. 공기구멍을 차단하고 햇볕을 단절시켜요. 땅을 죽게 만드는 거죠. 땅이 병들면 채소들이 병들고 그것을 먹은
동물과 사람이 병듭니다.
쓰레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세상에서는 다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순환시켜가면서 쓸모없는 것들이 없었어요. 자신에게
맞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득이 되는 존재이기에 그냥 빅픽쳐로 인식하고 골라내지 않았어요. 그런데 잘 보세요. 우리는 매일같이 쓰레기 봉투에다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쓰레기들을 골라 내 버리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계속해서 자신에게 별로 유익하지 않으면 별 효용가치가 없으면 골라내는 삶이 몸에 뱁니다.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기 때문에 그냥 공존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도 모르게 끊임없이 계속해서 솎아내는 삶에
길들어지는 거죠. 현대인의 비극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 선생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는다는 것을 압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느것 하나 쓸모
없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저마다의 쓸모를 찾아 유용하게 선용할 줄 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챤은 우선적으로 쓰레기를 생산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날마다 결단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천천히
적게 소비하고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물건을 소비하는 방식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시간을
의미있게 가꾸어가는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앞으로 이곳에 새집을 하나 지으려고 합니다. 시장에서 좋은 새집 사다가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훌륭한 새집이
되기도 하지만 또다른 쓰레기를 만들어갑니다.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또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 돈을 벌기 위해 때로는 누군가에게 노예가 되기도 해야하고 비굴해지기도 해야하고 밤낮없이 일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연물을 이용해서 새들이 자연스럽게 드나들 수 있는 집도 지을 수가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상상도 해보고 함께 그려보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아이들은 꿈을 꿀 수 있고 상상의 나래를 펼 수도 있고 그렇게 가꾸어 가는 시간은 그 시간 자체가 은총과 사랑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소비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간을 의미있게 가꾸어가는 방식은 그 시간자체가 은총의 시간들입니다.
그리고
재활용, 재배치의 능력을 키우며 살아야 합니다. 지렁이가
사람 밥상에서는 징그럽고 쓸모없는 존재가 될 수 있지만 땅, 흙속에서는 땅을 살리는 보물입니다. 배치를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존재의 가치가 달라지는 거죠. 얼마전에
지방에 한 공동체를 다녀왔습니다. 수유리에서 시작한 교육 신앙공동체인데 홍천으로 귀농을 했구요. 전국 단위의 몇군데 더 공동체를 확산하고 있더라구요. 이야기를 하는
중에 누가 그런 질문을 해요. 공동체를 하다보면 안맞아서 힘들어가거나 나가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럴때는
어떻게 하냐? 그랬더니 그곳 목사님이 뭐라하시는지 아세요? 할수
없지요. 하지 않아요. 삶에서는
개인의 기질을 바꾸어야 하는 문제가 여전히 있기는 하지만 자신들은 관계를 바꾸어주려고 노력한다는 겁니다. 도시가
안맞으면 농촌으로 보내고 너무 촘촘한 관계를 힘들어하면 느슨한 공동체를 선택할 수 있게 해주고 그런다는 겁니다.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개인의 인격문제로 비하하지만 않는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예요. 무조건 내치지도 않고 그냥 떠나간다고 쉽게 포기하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충분한 이야기와 관계와 상담하면서 서로에게 맞는 결들을 찾아준다는 겁니다. 배치를
잘 못하면 지렁이가 밥상에 올라가지만 배치를 잘하면 흙에서 보물이 되는 이치입니다. 그래서 섬세한 공감과
이해속에서 배치의 능력을 키워가는 겁니다. 저마다의 쓸모를 찾아주는 겁니다. 순환되지 않는 삶은 고이고 썩고 그래서 골라내야하고 사회 밖으로 몰아내야 하고 그것을 위해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쓸모없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때로는 노예를 감수해야하고 경쟁을 감수해야 하고 짓밟고
올라서는 걸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순환하는 삶은 재배치를 통해 저마다의 쓸모를 찾아줍니다. 빅픽쳐 안에서 쓸모없는 존재가 없음을 서로가
알기에 / 서로를 살려주는 존재임을 알기에 / 존중하고 신뢰하고
끝까지 내치지 않습니다. 신앙인이 유기농, 그리고 순환가능한
방식의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은총의 땅에서 삶의 순환도 배우고 생명의 감수성도
키우고 오가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의 신비를 전하고 풍성한 먹거리를 나누는 복된 은총의 공간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