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환대
나그네 대접하기를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히브리서 13장 2절)
제주도에 예멘 난민들이 들어왔습니다. 6월 1일부터는 아예 무비자로는 입국자체를 불허하고 있고 현재 제주도에 와있는 이들도 약 500여명이 되고 있는데 출도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본토로 들어와서
그들 커뮤니티로 가면 훨씬 더 많은 도움속에서 살길을 찾을 수 있는데 다양한 난민 포비아 현상으로 제주도에 묶여 있습니다. 지난 주에 이효성 전도사님께 전화를 드려봤어요. 그랬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을 아름아름 맨투맨으로 돕고 있데요. 방한칸 마련해주고 농장이나 양식업장에 소개해주고 그렇게 살길을
터주고 있는데 전화 걸어와 그들을 돕겠다고 어디에 있냐고 해도 알려주지를 못한데요. 이사람들이 그냥
외국인 노동자라면 모르는데 난민이라는 게 알려지면 마을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진데요. 그러면 그 마을에서
발붙이고 살기가 힘들데요. 도와주는 사람도 계속해서 도와주기가 힘들데요. 니가 뭔데 나서서 그런 사람 도와주냐고 그러다 사고나면 책임질거냐고 그런데요.
옛날 기독교 선교 초기에도 기록에 보면 기독교를 박해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기독교인들은 모여서 애들을
잡아 먹는다고 소문이 난거예요. 근거는 있어요. 성만찬이
그거예요. 사람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고는 살을 먹고 피를 먹는다고 하니까 아마도 힘없는 애들을 잡아서
먹는 걸로 소문이 난거예요. 근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사실에 기반해 있지 않은 전혀 근거없는 거짓뉴스들인
거죠.
사람들이 이슬람하면 제일 먼저 IS를 생각합니다. 한국을 생각하면 태극기 집회를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극단적인
소수의 경우를 보편화시킵니다. 더구나 난민들이 늘어나면 이슬람이 강력한 남성중심 사회라 외국인 남성이
늘어나면 각종 범죄와 성범죄가 늘어날 거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큽니다. 저도 미국에서 살아봤지만 어느
나라든 시민권자가 아닌 이들에 대해서는 법이 매우 엄격합니다. 그리고 그걸 그 사회 소수자는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여기서 사람들 그렇게 많이 음주운전 해도 미국에 가서는 거의 안합니다. 하다가 걸리면 그대로 추방입니다. 그자리에서 수갑차고 그대로 추방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함부로 못합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는 난민으로 받아들이는 비율이 매우 낮은 나라랍니다.
실제 2015년 시리아 사태가 났을 때 시리아 난민 문제로 세계가 떠들썩했을때도 우리나라에 1300여명의 시리아 난민이 들어왔는데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은 4명이
불과하다고 합니다. 시리아가 어떤 나라냐면 한국전쟁때 우리 나라에서
600만이상의 난민이 발생했을 때 받아준 나라중의 하나예요. 1994년부터 현재까지 난민신청자가 32733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그중에 792여명만이 난민으로 인정받아
혜택을 누리고 있고 대부분은 불법체류자라고 합니다.
낯선 이를 환대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문화도 다르고
살아온 습관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이들을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 어느날 받아들이는 일은 어색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유럽에서조차 밀려온 난민들입니다. 여기서 조차도 내 몰리면 결국은 바다 한가운데서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살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제주도의 시민단체들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난민들을 좀더 체계적으로 지원관리하고자 연합조직체를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토라를 보면 너희가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토라의 계명을 이야기 하기전에 반드시 나오는 귀절이
있습니다. “너희가 나그네 되었을때를 기억하라”라는 말입니다. 나그네를 절대로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한때는 나그네였다.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사실 지금의
UN 난민 기구 역시 한국 전쟁의 난민이 모태가 되어 생겨난 기구입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 부모님 세대에 우리 부모님의 부모님은 난민이셨어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 총칼들고 다 죽이고 죽이고 남은 건 집집마다 총살되고 몰살되고 서로 죽고 죽이던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던 시절
보리고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먹을 것이 없어서 보리가 나기 그 직전까지를 못넘겨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시절이 불과 반세기 전의 일입니다. 폐허가 된 땅위에 고아원을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재건하고 다시금 살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낯선 외국 선교사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세대가 pay Back 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또다른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이루었다고 해도 그럴일은 없겠지만 무식한 지도자들이 막가파식으로 가다보면 하루아침에 다 재가 됩니다. 통장에 있는 돈, 들고 있는 핸드폰, 그렇게 공들여 적금까지 붇고해서 마련한 집(지금 난민들 고향에 있던
집 다 폭격당하고 가지고 있던 패물 팔고 마련할 수 있는 현금 최대한 마련해서 전쟁없는 세상을 향해 나온 사람들입니다) 다 소용없어집니다. 당장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구요. 도저히 이 땅이 살 수 없는 땅이 되면 우리도 언제든지 보드피플이 되어 누군가에게 우리의 삶을 구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남예기가 아니라는 거죠.
어떤 식으로든 살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함께 지혜와 마음을모아 이 일에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서는 난민들을 보살피시는 하느님의 이야기입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사람들은 땅 한 평도 없어서 농사조차도 짓지 못하고 떠돌아다닐 수 밖에 없었던 암하렛츠
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왕권을 쥐고 강력한 군주제가 들어섰을 때 등장했던 예언자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왕의 폭정과 학대로부터 난민이 된 시대의 가난한 하나님의
아픔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지키려 했고 제사장은 성전을 시키려
했고 바리새파사람들, 율법학자들을 위시한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지키려 했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시대의
난민이 되어 같은 사회 / 같은 공간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버림받고 냉대받고 무시당하던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분입니다.
토라에서는 말합니다. 너희가
나그네를 학대해서는 안된다 너희도 한때 나그네였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곧 나그네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선생님은 나그네 대접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천사를 대접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본 가네자와 교회의 나가오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 목회를 할 때 심지어는 사모와 자식만을 놓고 5년 동안 목회를 한적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어렵게 목회하던 그 시절 한 젊은이가 폐결핵에 걸려서 깊은 산골로 들어옵니다. 5살에 고아가 되어서 할머니 품에서 커오다가 뜻을 품고 신학교에 들어가는데 너무 못먹고 고생을 해서 폐결핵에
걸린 겁니다. 그 젊은이가 토해내는 피를 다 닦아주고 손수 돌봐주고 먹어주고 입혀주면서 그 청년을 지극정성으로
돌봐줍니다. 훗날 그 청년은 일본 협동조합의 아버지가 됩니다. 가가와
도요히코가 바로 그입니다. 부지중에 지극 정성을 다해 대접해 준 그 한사람, 많은 사람도 아니예요. 그 한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한 목회가 훗날
일본의 경제를 살려가는 인물을 배출해 냅니다.
그뿐 아닙니다. 성서에 환대의 예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낯선 세사람을 초대해서 발 씻을
물을 주고 고운 밀가루 세스아를 가지고 와서 반죽하고 기름진 송아지를 잡아서 요리했다고 나옵니다. 세스아면
한 스아에 8리터입니다. 밀가루 24리터면 한푸대가 넘습니다. 게다가 송아지를 잡았어요. 세사람을 위해서!!! 잔치를 벌렸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임신을 예견합니다. 제가
이부분이 메이크센스하게 이해가 안되었어요. 지극한 대접을 한 것과 사라가 임신을 하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럴 수가 있었을 것 같애요. 여기있는 분들 앉아서 핸드폰 어플 나눔한번 해보십시오. 아마도 여러분 핸드폰 프로그램 쓰는 수준이 단순에 업그레이드 될 겁니다. 모바일 팩스 하나 알고 나니까 어디에서도 팩스를 보낼 수 있구요. 어떤
팩스도 핸드폰으로 다 받을 수 있어요. 자 아브라함이 낯선 나그네 무리가 지나가는데 그들을 대접하기에
최선을 다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아브라함은 당시 유목문화의 흐름을 바꾼 사람입니다.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모르는 세상에서 낯선 사람은 늘 위험의 대상이었죠. 그래서
조금이라도 수상적이거나 우리에게 해코지를 하면 부족을 몰살하는게 일반적이 예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사람을 위협의 대상이 아닌 환대의 대상으로 본 겁니다. 낯선 무리들을 내 안으로 환대해서 고기 쓸게하고
밥먹이고 술먹이고 재미있게 해준겁니다. 그러면 어떤 반응이 일어나죠.
기분이 좋죠. 그런데 아브라함의 집의 근심이 뭐였죠. 수십년동안
사라에게 아이가 없는 거예요. 문화와 문화가 만나면 삶의 노하우가 만납니다. 사회와 사회가 만나면 축척적 삶의 지혜와 지혜가 만납니다. 분명이
이 나그네 공동체에는 아브라함 공동체가 가지고 있지 않던 애낳는 노하우가 있었을 거예요. 그들이 알려준데로
하자 얼마지나지 않아 사라는 애를 낳습니다. 할렐루야!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는 진리안에서 보면 사랑과 환대를 받아본 사람은
그 사람의 삶을 통해 사랑과 환대의 역사를 써내려갑니다. 내가 지금 환대하고 사랑하고 지극정성을 다한
사람이 후에 누구를 살려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나그네 되었을 때 환대받았던 수없이 많은 사람들, 그들의 몸의 기억이 또다른 시대의 하나님의 아픔을 살려가는 씨앗이 됩니다. 낯선
타자를 환대하는 일은 크게 보면 또다른 우리 부모, 그리고 우리 자식을 환대하는 일이 됩니다. 낯선 타자는 나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더 성숙시켜 나가고 더 큰 사랑으로 인도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동녘이 새로운 꿈을 꾸고 있지만 그 새로운 꿈 가장 중심에는
이 환대의 정신안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안의 외로움, 우리
안의 아픔 그리고 우리 이웃안에 있는 진정한 아픔에 맘열고 귀열고 살아갈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이 진정 사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한주간동안도 님들의 나라에도 환대의 은총과
축복이 충만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