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동녘학당)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로 시작되는 찬송을 기억할 것이다.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던 교우들은 자발적 의지에 의해서 성서를 읽었다기보다는 부모님의 강요나 교회의 예배 등을 통해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의 의견을 성서라고 생각하며 쇄뇌당하듯이 성서를 익혔다. 과연 성서는 이렇게 익혀도 좋은 책인가?
교회의 역사를 보면 성서를 일반 신자가 읽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고대와 중세에는 특정한 지식인(성직자)들만이 성서를 읽을 수 있었으며, 나머지는 청중이 되어 귀로 듣기만 했다. 마틴 루터의 독일어 성서번역은 그러한 의미에서 기억할만한 역사적 사건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성직자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읽고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사제이다”라는 루터의 외침은 지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성서만큼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었다.
■ 성경일까, 성서일까?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성경(聖經,the Holy Bible)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성서는 다른 여타 책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책이라는 의식이 그 속에 있다. 성경 외에는 그 어떤 책도 하느님의 말씀이 될 수가 없다는 폐쇄적 사고도 그 속에 있다. 한편 좀 더 개방적인 교단에서는 성서(聖書)라는 말을 쓴다. 성서 또한 하나의 책이라는 의식이 담겨 있다. 성경이라고 부르든, 성서라고 부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늘날 그 성서가 우리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우리에게 성서는 어떤 책인가?
그전에 상식처럼 확인해야할 것들이 있다.
1. 성서는 역사적 문헌이다.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기독교 성서는 구약성서 39권, 신약성서 27권, 합쳐서 66권에 해당하는 문헌의 모음집이다. 이 성서는 기록에서부터 수집, 편집, 선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역사적으로 오랜 과정의 산물이다. 예를 들어 구약성서의 경우 주후 90년경에 유대랍비와 학자들이 얌니아에 모여서 회의를 거쳐 오늘날과 같은 목록으로 확정했다. 한편 신약성서가 오늘날의 27권으로 정리된 것은 주후 367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가 부활절 서신을 자기 교구의 교회에 보내면서 정리한 목록이다. 따라서 성서가 정경화되기 이전에도 신앙은 있었다는 것이다. 신앙 이후에 성서가 있는 것이지 성서 이후에 신앙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글이나 문자가 없어도 삶이 가능하듯이, 성서가 없어도 신앙은 가능하다. 책보다는 삶이 우선한다.
2. 성서는 다양한 형태로 기술된 책이다.
성서에는 창세기와 같은 신화적 진술, 시편 등 문학적 진술, 욥기와 같은 소설적 진술, 잠언과 같은 경구적 진술, 역사적 진술, 예언적 진술, 서간체적 진술 등 다양한 장르와 표현방법들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성서를 읽을 때에는 장르적 특징과 역사,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읽어야 이해가 잘 된다. 무엇보다 성서는 과학적, 사실적 진술이 아니라 신앙적 진술임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성서의 과학성을 증명하려는 헛된 시도(창조과학회의 시도)는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성서를 더욱 잘 이해하는 태도이다. 따라서 성서를 기준으로 세상의 진위를 구분하려는 태도는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꿴 것이다.
3. 성서는 편견이 가득 찬 책이다.
성서는 객관적이지 않다. 특히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의 민족적 열망을 담아 쓴 것이기에 주의를 요한다. 이때의 하느님은 오직 이스라엘 민족만을 편애하는 하느님이며, 다른 민족을 저주하고, 처단하는 하느님이다. 이러한 입장을 오늘날에 적용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성서를 덮어놓고 하느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 입장에서도 참으로 유감스러울 것이다. 구약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신약의 경우에는 다양한 문헌들이 정경화되어가는 과정에서 탈락되거나 소실되었다. 신약성서의 대부분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문헌만 남아있다. 하지만 최근에 발견된 <도마복음>만 하더라도 예수를 참된 교사로 고백한다. 한편 여성들이 주체가 되는 문헌들은 – 예를 들면 <마리아복음서> - 의도적으로 제외시켰다. 이것은 남성중심적으로 교회의 전통을 세우려는 당대 기독교인들의 편견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성서를 완성된 형태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성서는 끊임없이 개정증보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로버트 펑크(Robert W. Funk)가 발표한 <근본적 개혁을 위하여 : 21개의 명제>에 성서와 관련된 명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21개 조항 중에서 성서와 관련된 조항은 19항과 20항이다.
19. <신약성경>은 기독교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만들기 위해 소위 정통파라고 자처한 자들이 작성한 일관성 없는 그리고 편견이 가득 찬 기록이다. 교회가 채택한 성경들은 전통을 살린다는 의미에서 또 그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나간다는 의미에서 축소되기도 또 늘려지기도 해야 한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번뜩이는 깨달음을 주는 시인의 시를 애독하듯, 우리의 삶에 영적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면 성경이 되는 것이다. 경(經)은 편집된 모음집이다. 성경은 고정되어 규격화된 책자가 아니다. 박혁거세나 이티(ET) 같은 신화와 얘기도 포함되는 ‘안과 밖’이 없는 텍스트(古典)이다.
20. 성서는 인간이 지켜야할 불변의 덕목을 규정하는 보편적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십계명도 그렇고 예수의 교훈도 마찬가지다.
펑크의 문제의식에 동의하는가? 아니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가? 자, 이 질문은 맨 마지막에 대답하는 것으로 하고 우선 가장 쉬운 질문부터 나눠보자.
질문1 : 성서를 꾸준히 읽고 계신가? 그렇다면(또는 그렇지 않다면) 이유는?
질문2 : 동녘에서는 성서와 더불어 자연과 역사가 하느님의 말씀임을 고백하고 있다. 오늘날 성서의 지위와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질문3 : 내 인생의 말씀구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