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 누가복음 17장 21절
동녘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잘 오셨어요. 동녘에 오시는 모든 분들에게 읽어주는 시입니다.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 실로 어마 어마한 일이다.
그는 / 그의 과거와 현재와 /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일에 마음 열어주셔서 고맙고 상호간의
환대의 길을 열어주셔서 고맙고 함께 하나님 나라의 동지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어 소중한 인연으로 품습니다. 동녘의
한 식구가 되시는 그리고 되실 분들과 함께 몇가지 나누고자 합니다.
1.여러분은 모자이크의 한조각입니다. 물위의
하나의 물방울이 아닙니다. 한방울의 물방울은 물 속으로 들어가면 자기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물에 흡수되고
맙니다. 여러분들이 한바가지 물이 되어 바닷물속으로 들어가면 여러분은 사라지고 바닷물만 남게 됩니다. 동녘은 공동체 안에 들어가서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고 흡수되어 하나의 형태로 획일화되는 삶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밑그림에서 모자이크의 한부분입니다. 독특한
색깔과 몫과 고유의 아름다움을 살리십시오. 노래를 좋아하시는 분들에 의해 중창단이 생기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공동체문화가 생겨나고 사회적 관심이 많은 이들에 의해 그쪽의 결이 열립니다. 누가와서
어떤 결을 내더라도 하시고자만 한다면 동녘에서는 새신자라고 일부러 못하게 막지 않습니다.
동녘은
늘 그렇습니다.
인문학자가 있기에 사람의 길을 더 잘 성찰할 수 있는 모자이크가 붙여지고 수학자가
있어서 인문과 과학적 사고의 균형을 맞춰갈 수 있습니다. 열심히 앞서가는 사람들이 있고 뒤에서 좀 천천히
가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 밸런스가 이루어집니다. 내면의 성찰을 원하는 이들과 사회적 참여를 원하는
이들이 있어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양수레바퀴를 돌려갈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나는 웃음을 만들어주시고
어떤 분들은 따뜻한 가슴을 내어주십니다. 어떤 분들은 말로 웃음을 주시지만 어떤 분들은 감칠맛나는 먹거리로
웃음을 주십니다. 이 모든 모자이크가 하나의 큰 그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동녘에 흡수되지 마시고 충분히 여러분 자신이 되십시오. 구약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하느님께 도대체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하느님은 나는 나다라고 하셨지요. 나는 누구와 비교되어서도
비교할 수도 없는 나일뿐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되십시오. 그러면
지금까지 동녘에 없던 또다른 그림이 그려질 것입니다. 그게 동녘입니다.
2.종교에 노예가 되지 마십시요. 목사의 노예도 되지 마십시오. 사랑의 노예가 되십시오. 예수님은
교리적 종교, 율법적 종교, 생명을 살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종교를 과감하게 거부하셨습니다. 인간이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이유는 나와 우리와 우리의 관계를 살려가기
위함이지 교회를 키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것에도 노예화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출애굽은 성서의 원형적 경험이요, 근본정신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직접 손으로 빚으신 생명들이 뭔가의 노예가 되어 학대받고 스스로 자학(교회에 충성하지 못하여)하며 살아가길 원하질 않으십니다. 신학자 하비콕스는 “종교의 미래”에서
종교와 신앙을 구분합니다. 종교는 믿음, 교리, 율법적 체계를 가진 것을 말하고 신앙은 자신의 삶(일, 사람- 어떤 인격과 어떤 정신과 가치를 일구고)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데 앞으로의 시대에 종교는 약화되고 퇴화되겠지만 영성, 신앙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욕구는 점점 더 강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녘은 참된 신앙인을 꿈꿉니다. 종교/교리에 노예가 되지 마시고 사랑에 헌신하십니다. 김남주 시인은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때
참 자유인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자유인이 되십시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 선생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하나이 되고자한다면 어느 것(어떤 종교에
있든지, 어떤 단체에 있든지 어떤 이념에 있든지)도 문제삼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찰하고 대화하고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고 고백하면서 누군가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가 더 크게
품고 사랑하면서 더 큰 자아로 나가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만나는 횟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들입니다.
어제 남과 북의 노동자가 하나되어 축구를 하는 모습을
간간히 뉴스를 통해 보았습니다.통일이 안되면 어떻습니다. 많이
못만나면 어떻습니까?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존중이 있고 신뢰가 있고 어쩌다 한번 만나더라도 즐겁게
재미있게 잘 놀고 먹고 살 수 있으면되지 뭐가 더 필요한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녘에
있는 동안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동녘은 사랑하는 일이라면 어떤 시도, 어떤 실험에도 열려있습니다. 그 실험의 주인이 되십시오.
3.그리고 하나님을 가두지 마십시오. 성서에
가두지 마십시오. 과거의 언어가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
안에도 가두지 마십시오. 기독교안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옳다는 신념안에 가두지 마십시오. 어제는 살렸던 지혜가 오늘은 또다른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모든 곳에 계십니다. 매일 매일 새롭게 다가오시는
하느님과 호흡하십시오. 나무하나 풀한포기, 때로는 낯선 타자,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하느님은 다가오십니다. 제가
젤듣기 싫어하는 말이 아내의 잔소리입니다. 그런데 하는 말 중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대로 살면 사람이 되도 몇 번은 되었을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다보면 참으로 다양함이 나타납니다. 부드러움이 있고 거침이 있습니다. 곡사포가 있고 직사포가 있습니다. 삼차원이 있고 사차원이 있습니다. 부드러움은 부드러운 사랑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거침은 거칠기 때문에 저항성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곡사포는 애둘러서 상처를 아껴서 좋지만
직사포는 힘들어도 뒷끝이 없어서 좋습니다. 그 모든 것 안에 진정성만 담겨있다면 그 다양한 모든 모습은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비콕스는 초기기독교의 모습에서 참 종교의 원형을 말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처음
기독교안에는 하나의 예수상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 예수를 강조했고 어떤 사람들은
보편적 그리스도를 강조했고 어떤 이들은 신비적 내면의 그리스도를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만 해도
예수님상이 다 다릅니다. 어떤 분들은 새로운 시대의 황제로 고백했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사랑의
혁명가로 고백했고 어떤 이들은 참된 지혜의 영적 스승으로, 그저 가슴을 나눌 수 있는 벗, 인생의 동반자로 고백을 했습니다.
진리는 만개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하나로 획일화하고 이것만이 옳다고 하는 순간 폭력이 됩니다. 어제
권영숙 집사님 회사 사장님을 만났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권영숙 집사님을 위해 직원 한분이
작정기도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구원의 확신도 없고 신앙이 없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주는 건
매우 좋지만 "이 분이 사람을 함부로 대하냐 이분이 일을 지나치게 악의 적으로 하냐 차라리 그런게 있다면
그런걸 말하라 그렇지 않은데 구원의 확신이 없고 교회 좀 널널하게 다닌다고 함부로 신앙이 없다 말하는
건 가장 위험한 태도이다." "하나님이 권영숙 집사님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당신의 일을 지금 하고
계시는지 모르는데 내가 생각하는 방식과 다르다고 상대를 열등한 존재로 보는 건 하나님 자체를 모독하는 거다"라고 했어요.
열린마음으로 모든 타자를 통해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보십시오. 때로는 불편함도 감수해야하고 때로는 과감한 용기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거기서 그것과 하나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신비주의자입니다. 엇그제 조정
고양환경운동연합대표를 만나 산황산을 한바퀴 돌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느낀 건 그분에게 있어서 산황산은
당신의 몸의 일부예요. 그산이 겪는 아픔이 당신의 아픔이고 그 산이 겪는 통증이 당신의 통증이예요. 타자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하나될 수 있을때 우리는 갇힌 나로부터 더 큰 나로 나아갈 수 있고 불완전한
만남에서 좀더 온전한 만남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것이 곧 구원의 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죽어서 가는 곳도 아니요, 우주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때 특별한 장소에서 만들어지는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 내가 숨쉬고 내가 발딛고 살아가는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대동세상입니다. 출애굽공동체가 꿈꾸고, 예언자들이 목숨바쳐 지켰던 세상, 예수님께서 몸소 살아내시고 그의
핏값으로 세우신 초기 기독교공동체가 실현한 세상, 동학의 정신,
3.1운동이 꿈꿨던 세상, 5.18. 6.10 그리고 광화문의 촛불이 바라던 꿈, 가난과 신분, 성별로도 나이로도 심지어 종교로도 차별받지 않는 존중과
평화와 인간미와 생태적 감성으로 숨쉬는 대동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주어진 삶을 즐겁고 복되고
보람되고 기쁘게 대동세상 이루며 살다오기를 바라십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동지로 함께 이 길을
걸어갑니다. 우리의 선한 결단에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