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신앙의 대상
모태신앙으로 세상에 나올 때부터 기독교인이었던 나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Our Father, who are in heaven)”를 숨 쉬듯 자연스럽게 배우고 믿고 고백하고 전하며 살아왔다. 신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조직신학의 신론(the doctrine of God)수업을 통해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the God, who is omniscient, omnipotent, and omnipresence)”을 배웠다. 그러나 공부가 깊어지면서 내 신앙과 신학 사이의 괴리는 커지기 시작했고 갈수록 타락해가는 교회의 모습과 현실을 버텨내지 못하는 내 신앙의 나약함, 사회정의에 무관심하고 무력한 기독교의 무능함을 경험하면서 기존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가? 무소부재하신가? 하나님이 만드신 천지(heaven and earth)는 어디인가? 하나님은 아버지인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가? 그 하늘은 어디란 말인가?
조금만 정신 차리고 공부해보면 교회가 가르치고 믿기를 강요했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서 고대인들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반영된 시대적 산물임을 알 수 있다. 고대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한 하늘은 하나님의 집으로서 창공 저편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강력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하나님은 당연히 아버지여야만 했을 것이다. 사도신경을 비롯하여 교회가 금과옥조처럼 보존하고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한 도그마는 정치적 결정의 산물이었음도 알 수 있다. 그 도그마는 17세기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과학적 사고방식에 의해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고 그에 대한 반발로 교회는 견고한 교리체계를 만들어 절대화시킨 후 그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즉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독생자인 예수를 보내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신 하나님, 그 사실을 믿어야 구원과 천국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인 성경에 순종해야 복을 주시는 하나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된 것이다.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믿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날카롭고 무례하고 무자비한 언어를 사용해, 치밀하고 정확하게,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근거를 들어 이 하나님 개념을 논리적으로 철저하게 짓밟아 버렸다. 그리고 기독교는 더 이상 믿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현대 기독교는 치명상을 입었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거나 떠나고 있다. 그가 옳았다. 그가 검증하고 비판하고 비난한 그 개념은 결코 신앙의 대상이 될 만한 절대 가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공격해서 허구임을 증명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개념에 불과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가 공격해서 초토화시킨 것은 기독교의 교리조항이지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는 실체 없는 개념만 공격하고 만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기독교를 궤멸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실상 그의 노력은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 동안 기독교인들이 허수아비를 믿어왔다는 것을 밝혀주었고, 그 허수아비는 그에 의해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쯤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로, 개념으로 정리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고 정리될 수 있을까? 인간의 언어로 인간의 이성 안에 포섭된 하나님이 우리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현대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몇 가지 교리로 축소시켜 버린 것이다. 즉, 하나님을 피조물의 수준으로 격하하고 제한해 버린 것이다. 일찍이 하나님이 인간의 이성으로 정리될 수 없음을 깨달았던 어거스틴은 “네가 이해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인정받는 폴 틸리히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존재 너머의 존재”라고 했고, 위대한 영성가 토머스 키팅은 하나님을 “한계가 없는 실재”라고 했다. 도덕경에서도 “도라고 이름 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고 했다. 결코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고 인간의 이성 안에 담길 수 없다. 하나님 개념은 시대마다 바뀔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영원하시다. 하나님은 세계 속에 거하면서 세계를 껴안지만 항상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 무한한 신비이시다.
더 이상 인간의 언어로 규정된 하나님, 몇 가지 교리 조항으로 축소된 하나님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수많은 기독교의 교파를 두루 살피다가 그 중에 정확한 방식으로 믿는 사람들만을 구원하는 감별사 하나님, 동양은 배제하고 서양 사람들에게만 계시를 주신 불공평한 하나님, 특정한 방식으로 믿는 사람들만 천국에 보내는 배타적인 하나님, 성경의 문자에 얽매어 서로 싸우게 하는 하나님, 자기를 믿는 사람들만 보호하고 다른 종교 믿는 사람들은 멸망시키는 잔인한 하나님, 여성을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고 억압하고 무시하는 가부장적 하나님, 성소수자를 인정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는 속 좁은 하나님, 순종을 요구하고 상을 주며 불순종하는 자는 잔인하게 징계하는 요구와 보상의 하나님을 어떻게 신앙할 수 있겠는가? 스퐁 주교가 말했던 것처럼, 생각이 있는 사람(thinking people)이라면 결코 “머리가 거부하는 것을 가슴이 예배할 수 없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나에게 이 질문은 “강은희가 당신의 아내임을 믿습니까? 라는 질문과 다름없는 한심한 것이다. 대체 이미 계신 하나님을 왜 믿어야 한다는 말인가? 나에게 하나님은 믿어야 할 분이 아니라 매일 동행하면서 사랑과 우정을 나누어야 할 분이다. 나에게 신앙이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거하며 그 신비의 바다를 헤엄쳐 다니는 것이다. 나에게 구원은 믿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나날이 성숙해가고 변화해가는 것이 신앙의 요체이다. 걱정과 근심, 욕망과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모든 생명을 사랑하려 애쓰고 평화를 도모하며, 약자를 돌아보고 정의를 위해 연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다. 그리하여 내게 하나님 신앙은 경험이고 고백이다. 내 모든 일상에서 하나님을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고 그 하나님을 다양한 방식으로 고백하고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만의 특권이자 고귀한 정체성이다.
질문1. 지금까지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면서 하나님에 대해 가졌던 생각은 무엇이고 의문은 무엇이었는가?
질문2.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질문3.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각자 자신의 하나님 경험을 나누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