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회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지성으로 인정받았던 프랜시스 쉐퍼는 한 시대(혹은 세대)가 변할 때 철학이 가장 먼저 변하고 종교가 가장 늦게 변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20세기 중후반에 철학자들이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을 들고 나온 이후로 세상은 다방면에서 초고속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는, 특히 기독교는 아직도 ‘구린내만 풍기는 오래된 술집’처럼 과거의 영광만 고집스럽게 붙잡고 세상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세상은 갈수록 빠르게 변하고 있으며 변화된 현장은 새로운 질문을 끊임없이 양산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변화를 따라가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변화가 만들어내는 많은 질문에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답을 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다. 위선과 구습(hypocritical and obsolete)에 얽매여 펑크난 타이어(flat tire)처럼 본래의 정신(pneuma)을 상실한 채 껍데기만 유지하며 온갖 추문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말이 되지 않는 기독교”를 외면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스스로 떠나는 사람도 있고 부패한 교회권력에 대항하다 쫓겨나는 사람도 있다. 덴마크 국교회를 비판하다 파면된 키엘케고르가 했다던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닐진대 너희들은 더더욱 아니다”라는 말은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 모두가 교회를 향해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Church No! Jesus Yes! 교회는 싫지만 예수는 따르고 싶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발전을 거듭하더라도 영적 존재인 인간은 여전히 영적 갈증을 안고 살아가며 의미를 찾아 방황하고 존재감을 갈구한다. 역설적이지만 교회를 떠나는 많은 사람들은 참다운 교회에 대한 갈급함이 있으며 신앙의 여정을 계속하기 위한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교회의 현상에 동의할 수 없고 그 흐름에 자기를 맡길 수 없을 뿐이지 교회의 필요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있는 교회를 찾을 수 없는 구도자(seekers)들은 안타깝게 교회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이 슬픈 현실 속에서 교회는 여전히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본질을 지키면서도 시대의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교회가 가능할까? 우리 시대에 필요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교회다운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어떻게 세상의 영향을 받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등불 같은 교회가 될 수 있을까?
교회: 성장의 모체
일찍이 칼빈은 교회가 성도의 모체라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성숙하고 신앙의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교회는 어머니처럼 그들을 보살피고 인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아버지인 사람들에게 교회는 어머니가 될 것이다. 어머니인 교회가 우리를 자신의 태 속에 품고, 자신의 가슴 속에서 양육하고, 자신의 보살핌과 지도 아래 지켜주지 않는다면 생명으로 들어갈 다른 길은 아무 데도 없다.” 라고 말했다. 이 말에 100% 동의할 수는 없지만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성장해야 한다는 면에서 교회가 모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쉽게 부인할 수 없다. 교회를 통해 우리는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관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유기체로서 사랑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할 수 있다. 교회가 만들어온 그 어떤 교리나 전통도 절대화할 수 없지만 다양한 시도를 통해 우리는 함께 성장할 수 있다. 오강남 교수의 말처럼, 성공적인 교회는 교인이 계속 자라나 목사나 교회의 도움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의 독립적 사고 독립적 믿음을 갖도록 해주어야 한다.
교회: 세상의 가치를 초월하는 공동체
기록에 의하면 초대교회 교인들은 인육섭취와 근친상간을 하는 무리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만찬의식과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그들의 호칭으로 인한 오해였다. 교회가 사용하는 언어와 생활방식과 가치관이 교회 밖의 사람들과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즉 초대교회가 가졌던 강력한 공동체성으로 인해 초대교회 교인들은 오해와 박해를 감수해야 했다. 교회가 탄생한 순간부터 공동체성은 생명과도 같은 가치였다. 그것은 예수가 전 생애를 통해 남겨준 고귀한 전통이었다. 그는 고아와 과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돌보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공동식사를 나누며 기꺼이 가족이 되었다. 가족은 밥을 같이 먹는 사이이며 밥을 같이 먹는 것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공유하고 함께 살아나가는 정신이 파생된다. 시대가 아무리 변한다 해도 인간은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를 갈구한다. 자신이 기꺼이 받아들여지며 귀한 존재로 여겨질 수 있는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오늘날의 교회는 개인의 구원과 축복과 천국을 강조하며 교회만이 구원을 매개할 수 있다는 천박한 배타성에 빠져서 정작 생명과도 같은 공동체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기독교인이라는 명함은 가지고 있지만 정작 구성원들 사이에 관계는 약화되고 상호영향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성별, 사회적 지위, 인종, 연령, 학벌에 상관없이 모든 구성원이 똑같이 중요하고 사랑받아야 하며 공동체를 위해 공헌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 예수따름이 (Jesus Follower)
위대한 신학자 앙리 드 뤼박(Henri de Libac)은 “교회는 그리스도를 현존하게 한다”라고 말했다. 발타자르(Balthasar)는 “교회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연장”이라고 했다. 칼 라너(Karl Rahner)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세계 속에, 역사적, 가시적, 구체적 형태로 현존하게 한다”라고 말했다. 이 뛰어난 신학자들의 말을 요약하면 “세상이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는 것이다. 예수가 교회의 머리라고 한다면 머리의 명령이 사지에 전달되어 교회는 예수의 정신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의 말처럼 “이제 교회는 맹목적인 예수 숭배로부터 벗어나 예수 자신의 가르침을 되찾아야 한다. 예수에 대한 신앙에서 예수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를 저 높은 곳에 두고 우러러 섬기는 대상으로만 삼지 말고 그의 신앙, 그의 삶을 따르는 예수 따름이의(church as a Jesus follower) 기독교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러나 각각의 역사가 처한 요구가 다르기 때문에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박제화 되거나 절대화 될 수 없다. 오늘날에는 오늘날의 모습으로 예수를 따라야 한다.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다면, 우리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으로 예수를 따라야 한다. 특히 오랫동안 수입신학에만 의존했던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 현장에 알맞은 방법으로 예수를 따르는 길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교회: 하나님 나라의 선교
오랫동안 교회는 복음전파를 가장 중요한 교회의 존재이유이자 사명이라 여겨왔다.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전도를 강조하고 각지에 교회를 세우고 끊임없이 선교사를 파송해왔으며 선교의 열매는 교회 성장으로 나타난다고 여겼다. 딘 켈리(Dean M Kelly)를 비롯한 몇몇 신학자들은 교회성장의 필수요건으로 교리의 절대화, 획일적인 행동강령, 무조건적인 복종, 철통같은 소속감과 헌신, 전도열 등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와 같은 제국주의적 선교관은 한계에 도달했고 갖가지 부작용을 나타내고 있으며 시대에 맞지 않는 것으로 비난에 직면해있다. 히브리 대학교의 파인즈 교수에 의하면 교회가 강력하게 외쳐왔던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으라(마28:19)”는 구절은 기원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 기록된 신약성서 사본들 속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한스 큉은 오랜 연구를 통해 “예수님은 스스로나 그의 제자가 이방 족속들에게 가서 전도하는 일 같은 것은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근대 제국주의의 확장과 더불어 형성되었던 선교관은 그릇된 것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알프레드 로와지(Alfred Loisy)의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그런데 도래한 것은 교회였다.” 라는 자조에서 그 허구성을 엿볼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구원 받고 천국 가기 위한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지 않으며, 교회는 자기 확장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촉매제가 되기 위해서 존재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정의와 질서와 평등, 평화와 생명의 역사라는 하나님의 통치원리가 실현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진정으로 해야 할 선교는 내 종교 안에 있는 사람이든 다른 종교에 있는 사람이든 강도 만나 피 흘리고 있는 내 이웃, 이 사회와 세계를 보고도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혹은 당연한 것으로, 심지어 필연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을 일깨워서 함께 일하자고 권유하는 것이다. 폴 니터에 의하면 “모든 종교가 다 함께 인류 공동의 문제, 공통의 목표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길벗들로서 (fellow traveller) 이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일에 함께 힘쓰는 사람, 힘써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알리는 것”이 선교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힘쓰는 것이 선교이며,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생태계와 인간의 안녕을 증진시키는 일이며, 이런 일을 이루는 것은 여러 종교의 협력이 없이는 이룰 수 없으므로 종교 간의 대화가 곧 선교이다. 오강남 교수의 말처럼 “지구와 인간이 당하고 있는 세계적 아픔에 전 지구적으로 반응(globally responsible)하고 이를 촉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 이런 일을 위해 모인 사람의 무리가 곧 교회인 것이다. 존 쉘비 스퐁 주교가 지적한 대로 교회의 선교는 세상을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일부분인 모든 존재들이 충만한 삶을 살도록 부르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는 성장을 위한 모체이며, 세상의 가치를 초월하는 공동체이며, 예수 따름이로서 예수를 드러내야 하며,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 나라 선교를 담당해야 한다. 이 외에도 교회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을 수 있겠으나 일단은 이상의 논의만을 바탕으로 아래와 같은 질문에 답해보자.
1. 당신이 생각하는 교회란?
2.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로써 교회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혹은 이 시대 교회가 회복해야할 가장 중요한 것들을 꼽는다면?
3. 교회 공동체를 제대로 세워나가기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