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황산에 평화를 시편 34편 11-12절
지난주에 텃밭을 갔다 오는데 집안 현관을 들어섰더니 뭔 소리가 나는 거예요. 자세히 보니 참새 한 마리가 복도 계단으로 잘못 들어와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사람소리가 나니까 놀래서 도망가는 소리예요. 제가 현관문으로 들어서니까 2층으로 올라가고 제가 2층으로 가니까 3층으로 올라가요. 근데 3층이 막다른 골목 이예요. 주인집 문외에는 온통 다 벽 이예요. 사이사이에 창문들이 있는데 그 틈새사이를 찾을 정도로 참새 눈이 밝지가 않아요. 이 놈이 당황에서 어떻게 할 줄을 몰라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되나요?
참새는 계속해서 도망가려고 하고 도망 갈 때는 없고 이 친구와 계속해서 나잡아 봐라를 해야 할까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말을 했어요. 옛날에 성프란스시 성인은 동물들과도 대화했다고 하잖아요. 굽비오라는 이태리의 도시에 가면 성프란시스와 늑대가 함께 있는 성화가 있답니다. 그 성화의 유래가 굽비오라는 동네 산기슭에서 늑대가 밤만 되면 내려와서 사람들을 잡아먹었데요. 주민들이 불안에서 이걸 성프란시스에게 말했데요. 그랬더니 그분이 산위로 올라가서 늑대를 만나 이야기를 했데요. 사람들이 너 때문에 불안하데 그러니 제발 좀 산위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그랬더니 늑대가 눈빛으로 말하더래요. 그럼 나는 굶어 죽냐고 배고파서 그랬다고 먹을 것을 달라고 그러면 내가 왜 구지 사람들을 잡아먹겠냐고. 그래서 이 이야기를 마을 사람들에게 전했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은 그날 밤부터 동네 한 기슭에 늑대 먹을 것들을 준비해 놓았데요. 그날부터 마을에 늑대에게 사람이 잡혀 먹히는 일이 없었데요.
그래서 제가 참새에게 말을 했어요. 괜찮아 너 안 잡아먹어. 난 너를 도와 줄 거야. 겁내지마. 너 도와 줄 거야. 지금 나갈 곳이 없어. 너 혼자 나갈 수도 없어. 난 너를 해치러 온 사람이 아니야. 너 괜찮아, 괜찮아! 한참을 그러니까 이놈이 막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후다닥거리다가 날아다니다가 현관 문 앞으로 떨어지듯이 내려앉더라구요. 그러더니 가만히 있어요. 눈을 말똥말똥 뜨고는 가만히 있어요. 그래서 제가 가까이 다가갔어요. 계속 설명을 하면서 괜찮아, 괜찮아 내가 너 도와줄게! 진짜로 가만히 있어요. 손으로 감싸 쥐었는데 따뜻해요. 손안에 쏙 들어오더라구요. 심장이 난리가 났어요. 그런데 그렇게 따뜻하더라구요. 이 놈이 살아있구나...
그리고는 계속 말하면서 밖으로 나갔어요. 이제 밖으로 나갈 거야. 널 헤치는 게 아니야 너 밖으로 보내줄려고 그러는 거야 계속 예기하면서 나갔어요. 그리고 나왔어요. 가만히 있어요. 그리고 밖으로 나오니까 차들이 주차가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그 위에 올려놓았어요. 자유롭게 날아가라고. 자 날아가 괜찮아, 괜찮아! 넌 자유야! 봐 너 헤치지 않잖아. 근데요. 한 1분 이상을 저를 보면서 가만히 있더라구요. 그래서 처으에는 어디 아파서 못날라가는 줄 알았어요. 순간 아 이놈을 데리고 동물 병원을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제발 날아가라 제발 그러는데 그렇게 한참을 있더니 어느 순간 후다닥하고는 날아가 버리더라구요.
이제 가을이 되면 박씨를 물어다 줄 겁니다. 그러면 저는 그 박씨를 텃밭에 심을 거고 그 텃밭에 박이 열리고 그 박에서 금은보화가 나올 겁니다. 기대하세요.
제가 그날 참새를 두 손으로 꼭 잡으면서 느낀 게 있어요. 이 친구도 심장이 뛰는 생명이구나. 심장이 따뜻해요, 살아있어요. 이놈도 우리와 같은 심장을 가지고 있구나. 이놈도 공포도 느끼고 두려움도 느끼고 아픔도 느끼고 사랑도 느끼는 생명이구나.
생명이면 다 생명이지 어떤 생명은 더 귀하고 어떤 생명은 덜 귀하고가 아니겠죠. 오늘 읽은 동화가 그래요. 생명의 무게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귀하면 동물도 귀하고 식물도 귀하고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 똑같은 생명이예요. 우리가 보이게는 인간이 같은 종이니까 인간이 더 귀해 보이고 그렇지만 하느님 보시기에는 그놈이 다 그놈이예요. 사람은 동물이니까 더 귀하고 예네들은 식물이니까 덜 귀하고 그런 게 아니라는 거죠.
제가 작년에도 말씀드렸죠. 상추를 따는데 하얗게 생긴 액체가 나온다고 마취제래요. 예네도 아픈 거예요. 그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액체를 스스로 뿜어내는 거예요. 음악을 틀어주면 예네도 더 잘 자라고 야한 이야기를 하면 주파수가 달라진데요. 우리와 존재하는 방식이 달라서 그렇지 다 같은 생명이라는 겁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을 보면 평화를 찾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여라. 그러면 하늘도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고 진인사 대천명(사람이 자신의 할 일을 다한 후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입니다.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해서 지켜야 할 평화는 유기적 상생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쫒겨 도망다닐 때 쓴 시입니다. 그가 사울 왕을 피해 도망다닐 때 그의 주변에는 사회적 약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열왕기상 22장에 보면 압제받는 사람들 빚에 쪼들린 사람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 공동체는 사회적 약자들과 더불어 상생하는 공동체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대변하고 그들의 고통을 만져주는 공동체였습니다. 다윗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든 원인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해 지켜야 할 평화는 정복자, 지배자들이 꿈꾸는 로마의 평화가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구는 약자와 강자가 부자나 가난한 자가 자연과 인간이 함께 유기적으로 상생하는 평화공동체입니다.
그 평화 공동체는 유기적 순환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이 원리를 한 때 먹이사슬이라고 했지만 저는 먹이사슬이 아니라 생명의 유기성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먹고 먹히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관계라는 거죠. 식물은 동물을 살려주고 작은 동물을 큰 동물을 살려주고 그 동물은 다시 거름이 되어 식물을 살려주는 순환성입니다. 지구 생태계는 이 순환성에 의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한 종이 사라지면 동시에 다른 종도 사라집니다. 식물이 사라지면 식물을 먹고 사는 동물들이 사라질 것이고 식물들을 먹고 사는 동물들이 사라지면 동물을 먹고 사는 동물들이 당연사라집니다. 공룡이 인류역사에서 사라진 것에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당시에도 다양한 종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부터 해양파충류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그리고 꽃피우는 식물들도 지구상에서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여타의 종들이 사라지고 하나의 종이 지구를 유일한 지배자와 정복자로 나타나면서 결국은 공룡까지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엊그제 일산에 호수공원에 몇 년만에 갔는데 너무 좋고 너무 아름답더라구요. 생각도 맑아지고 정신도 맑아지고 온 몸이 숨통이 트이드라구요. 우리가 공원을 만들어 그 친구들을 살려준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친구들이 우리를 살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기적으로 공생해야 인간이 삽니다. 우리가 식물과 동물을 먹고 살지만 순환가능한 방식을 넘어서서는 안됩니다. 지구상의 모든 식물과 동물을 개발하고 먹어치우면 결국 인간도 함께 죽습니다.
도시개발도 그 임계점이 있습니다. 이제 일산 만해도 남은 산이 몇 개되지 않습니다. 이쯤되면 이 남은 산들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브라질 대통령이 아마존은 세계의 것이 아니라 브라질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구 산소의 1/4을 뿜어주는 아마존이 개발을 천명한 것입니다. 아마존은 브라질의 재산이니 딴 나라에서 뭐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마존이 다 파괴되는 순간 인류의 종말도 함께 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발을 하더라도 자연과 공존하는 개발을 해야 합니다. 집을 짓더라도 나무를 그대로 살리고 도시를 조성하더라도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도시개발을 해야합니다. 3기 신도시 개발계획이 나왔습니다. 이곳에 최소 4차선의 도로가 난다고 합니다. 신도시 개발로 골프장은 물건너갔으니 골프장 취소를 할 수 있는 명분은 충분합니다. 그리고 도로를 내더라도 망가뜨리지 않고 우회할 수 있는 길을 충분히 많습니다.
최근 경남 창녕 우포늪에서 1979년 이후 사라진 야생 따오기 40마리를 방사해서 적응훈련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따오기가 사라진 이유는 하천과 논이 오염되면서 논에서 미꾸라지, 물고기, 곤충, 개구리, 연체동물등이 사라지면서입니다. 따오기가 야생습지, 논밭에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하천과 논 관계시설등이 친환경적으로 바뀌지 않은 한 이 친구들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지금에라도 이 친구들이 적응할 수 있는 환경을 하나씩 만들어가면 친환경 농사를 짓고 친환경 생태를 조성해 나가면 따오기 하나를 통해서 모두의 삶의 질이 좋아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위기에 처한 생명 하나를 살려가는 일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 하나를 살려가는 일이 모두를 살려가는 일입니다. 산황산 하나 살려가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일산 전체를 살아가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어버린 양 하나를 제대로 찾아가는 일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자연의 생명, 말없는 나무와 숲과 산과 바람, 이 친구들에게도 따뜻한 심장이 있다는 사실, 이들과 우리는 상호 연결되어 있고 이들이 살아야 우리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유기적 상생의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할 수 있는 우리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평화가 산황산에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애쓰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