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숨 창세기 2장 7절
미국 미네소타 주에서 백인 경찰이 46세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무릎으로 압박해 결국 숨지게 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에 대한 저항이 미 전역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실제 영상을 보니 참담했습니다. 총도 없었고 이미 수갑까지 채운 범인은 완전히 무장해제 되었고 저항능력도 상실했습니다. 유난히 주변사람들에게 친절한 사람으로 소문나 있었던 사람이었고 화면상으로도 얼굴에는 잔뜩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큰 저항 없이 순응했는데 잔혹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숨을 쉴 수가 없다고 제발 숨을 쉬게 해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절대 백인이면 이런 식으로 제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독한 흑인에 대한 편견과 이로 인한 과잉진압이 결합된 잔혹한 참사입니다.
조깅하던 흑인 청년이 주먹 한 번 들었다가 총에 맞아 죽습니다. 백인이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고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쏴 죽인 겁니다. 흑인은 그냥 운동하던 운동복차림인데 사소한 제스처에 총 맞아 죽은 겁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백인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다가 영상이 공개되고 여론이 안 좋아지니까 처벌 받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거꾸로 흑인이 쐈더라면 그 자리에서 수갑 차거나 저항하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건 너무나 많은 일들을 감수해야 합니다. 멀쩡한 기숙사생인데 노숙자로 신고가 들어가고 돈을 내면 위조지폐인가 한 번 더 검열 당해야 하고 100불짜리 내면 한 번 훑어 보임을 당해야 하고 유명백화점에서 비싼 벨트나 고급핸드백을 결재하고 나오면 절도범으로 신고 되어 한차례 조사를 받아야 하는 일들이 적지가 않습니다. 흑인이 어떻게 그 많은 돈이 있냐는 겁니다. 백화점 직원을 말입니다.
이미 코로나 19로 인하여 10만 명 넘게 사망한 미국은 전염병 창궐과 실업과 인권유린이라는 실상 앞에서 비참하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속절없습니다. 아무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군사적 강대국이라고 해도 조심하지 않고 저렇게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그 사회는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미국의 인종 우월론자들은 자신들이 중동보다 북한보다 실제 테러리스트들 이상으로 훨씬 더 심각한 인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을 인정하고 볼 수 있어야 희망이 있습니다.
코로나 정국에서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진실은 코로나 앞에 장사 없다는 겁니다. 조심하지 않고 함부로 다니고 함부로 침범하면 장사 없습니다. 목사라고 지켜주지 않습니다. 예전의 신앙인들은 믿음이 좋으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병으로부터 사탄의 역사로부터 마귀로부터 악한 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열심히 믿어도 죽구요. 신앙이 아무리 좋아도 조심하지 않으면 코로나 걸리구요. 목사도 신부도 스님도 예외가 없습니다. 방역하고 사회적 거리 두고 조심하지 않으면 침 튀기면서 말을 섞는 곳이라면 그리고 그 안에 코로나 확진자가 있으면 어느 곳도 예외 없이 코로나는 평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건 우리의 책임을 회피한 채로 하나님의 보호막에 기대 살아가는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가슴 아픈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 하면 존중의 거리를 지켜가면서 협력과 연대의 키워드로 함께 이 위기를 공존과 살림의 방식으로 넘어서기 위해 기도하고 용기 내는 삶을 말합니다.
조심스럽게 일상을 여는 많은 곳들 중에서 여지없는 사실은 <수생불수망>입니다. 지키는 자 살고 지키지 않는 자 망합니다. 이건 단순히 코로나 정국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죠. 사람사이의 최소한의 존중의 거리를 지키며 살면 함께 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사회는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지금 미국의 위기가 보여주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선진국이고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떠들어도 지킬 것을 지키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함부로 유린하는 사회는 결국 몰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발하라리의 충고가 시사하는 점이 매우 큽니다. “결국 미래는 우리의 선택이 결정한다”는 겁니다. 마치 코로나 정국에서 우리의 선택과 몸의 움직임에 따라 삶이 결정되듯 우리의 미래도 결국은 지금 우리의 몸이 어떤 삶을 선택하며 가느냐에 따라 결국 우리의 미래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미래는 절대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입니다. 매우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희망적이기도 하지만 매우 무서운 말이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가 선택하는 삶의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이후에 나오는 창세기 이야기에서 창세기 기자는 인간존재의 지극한 유한함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아담은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선과 악을 자의적으로 판단하면서 선과 악을 지배하려는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뭔가의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하면 책임을 지고 감당하려는 모습보다는 회피하고 도망가려는 모습이 많은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지면 원인을 파악하고 책임있는 자세로 두렵고 힘들어도 돌파해 가야하는데 외면하고 가랑잎 사이에 숨듯 숨고 도망치고 싶어가는 게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가인과 아벨 형제 이야기는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는 것을 질투해서 가인이 아벨을 살인하는 이야깁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남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그래서 시기하고 질투심이 많은 존재임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인정받고 이해받으려는 존재론적인 욕구가 있고 그것이 채워지지 못했을 때 어떻게 망가질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힘 있는 남자들이 세상의 여인들을 마구 지배하는 모습을 보면서 노아 홍수 심판을 계획하십니다. 그러나 심판 후에 후회하십니다. 권력을 가진 교만한 자칭 잘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사회를 부패시키고 타락시키며 세상 무서울 게 없이 살아가려는 욕망을 가진 존재들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누구든 힘과 권력과 지배력을 가지면 장사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벌과 심판으로 세상의 죄악을 없앨 수 없음을 홍수 이야기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조 원역사의 마지막 바벨탑의 이야깁니다. 사람들은 도시를 만들고 문명의 바벨탑을 하늘높이 쌓아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을 채우지만 하나님은 그 바벨탑을 흩으시고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해서 흩어버리십니다. 인간은 편리든 자본이든 지배력이든 그 욕망에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인정욕구, 지배욕구, 책임지려하지 않고 남 탓하고, 두려움 앞에 숨고 지극히 나약하고 유한한 지극히 인간적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제일 서두에 오늘의 말씀을 창세기 기자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손수 만드셨는데 그 코에 생기, 숨을 집어 넣으셔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내안에 뭐가 있다? 내 안에 우리 안에 하나님의 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유한하고 나약하고 때로는 욕망과 탐욕과 질투와 지배적 폭력의 화신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그 순간에도 우리 안에 하나님의 숨이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성 때문에 넘어지고 불안감과 한계에 부딪히면서 절망하고 살아가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그 너머를 노래할 줄 아는 지극한 경외감과 존재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줄 아는 고귀한 영혼이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미국 전역에서 저항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저항이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약탈과 폭동으로도 번지고 있습니다. 지극히 나약한 인간의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미국 안에는 그런 폭동만 있지 않습니다. 미국의 아미들이 BTS의 노래를 부르며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존중받아야 한다”를 외치며 폭력시위를 평화시위로 바꾸어가는 흐름도 있습니다. 워싱턴에서는 경찰과 시위대가 얼싸안고 끌어안으며 이 인종차별로 인하여 생겨난 미국의 아픔을 참회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포착되었습니다. 폭동과 약탈은 매우 잘못된 일이지만 그 이면에는 차별과 분노와 양극화 / 코로나로 인하여 죽어간 수없이 많은 흑인들의 두려움이 함께 있습니다. 이러한 분노를 하나님의 숨으로 승화시켜 평화적 분노의 저항의 물결을 만들어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sNS에서는 한국의 아미들이 이 사실을 알고 함께 온라인에서 연대하면서 평화적 저항의 물결을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약탈과 폭동만을 욕하지만 지극히 나약한 인간 존재의 참담한 현실의 흐름을 틀어서 전 세계인들이 저마다 안에 있는 인종차별문제에 대한 각성의 흐름을 마련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아픈 내 아이 안에도 하나님의 숨이 있습니다. 아픈 내 몸 안에도 하나님의 숨이 있습니다. 상처받은 내 안에도 상처를 준 내 안도 하나님의 숨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매일매일 절망과 유한성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저마다의 영혼 안에도 하나님의 숨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숭실대 구미정 교수는 코로나는 인간의 지배력을 내려놓으라는 하늘의 메시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코로나의 위기속에서 함부로 다니고 소비하고 넘나들고 타자를 침범하고 하던 모든 지배력이 무너졌습니다. 코로나 이후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현 사피엔스와는 전혀 다른 인간중심주의에 포획되지 않은 하느님의 숨을 기억하며 생명중심주의로 살아가는 공생인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숨이 있다는 것도 우리가 선택하는 삶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사실도 기억하며 지금까지의 지배력을 내려놓고 내 목소리를 좀 더 낮추고 약자와 자연과 뭇 생명들을 내 삶으로 초대하며 함께 살아가는 그래서 하나님의 숨과 생명들의 진실로 더 풍요로워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