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환경주일 설교문
생명은 꽃처럼, 삶은 향기처럼
<기독교환경운동연대 백영기 목사(쌍샘자연교회)>
‘하늘은 얼마나’/ 반칠환
하늘은 얼마나 먼지 어떤 새도 끝까지 가본 적 없고
하늘은 얼마나 가까운지 키 작은 아이 손도 닿지 않은 적 없고
하늘은 얼마나 따스한지 아무도 품지 않은 사람 없고
하늘은 얼마나 시원한지 아무리 뜨거운 굴뚝도 식히지 않은 적 없고
하늘은 얼마나 단단한지 어떤 망치도 깬 적 없고
하늘은 얼마나 부드러운지 어떤 새순도 다친 적 없고
하늘은 얼마나 좁은지 눈꺼풀보다 작고
하늘은 얼마나 너른지 하느님도 벗어난 적 없고
하늘은 얼마나 무거운지 모든 영혼을 다 싣고
하늘은 얼마나 가벼운지 풀잎도 이고 있고
하늘은 얼마나 바쁜지 날마다 별들을 나르고
하늘은 얼마나 태평한지 천 년째 푸르고.
요즘, 높고 푸른 하늘이 얼마나 좋은지요. 그런 하늘 아래 아름다운 세상이 있습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좁쌀 한 알에 우주가 담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무수한 생명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생명이면서도 고리처럼 연결되고 연합된 큰 생명체로 존재합니다. 누가 이 생명의 존재와 힘을 거스르며 막을 수 있을까요.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섭리와 손길 안에서 모든 것은 아름답고 훌륭한 세상을 이루어갑니다.
많이 지치고 상해 아픈 세상이라고 하지만, 자정 능력이 있는 지구는 서로를 보듬어 주는 놀라운 힘이 있어 수많은 세월을 견뎌왔고 이렇게 건재합니다. 하지만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끝을 모르고 질주하던 인류의 행보는 일단 멈춰 섰습니다. 그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해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수많은 의견과 분석, 그리고 전망도 있습니다. 바이러스는 가장 다양한 형태를 띤 생명체로서 인간의 감각으로는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는 놀라운 존재입니다. 모든 바이러스가 나쁜 게 아니듯, 바이러스는 지구의 균형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다.
올해 환경주일의 주제가 <작은 생명 하나까지도>입니다. 너무 작아 감지할 수조차 없는 바이러스가 인류의 패턴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말 작은 생명에 눈을 돌리고,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느낀 스웨덴의 어린 소녀 툰베리는 희망보다 더 필요한 것이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행동을 시작하면 희망은 어디에나 있다고 했습니다. 희망을 말만 하지 행동하지 않는 기성세대를 고발했습니다.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의 홍기빈 소장은 40년간 세계를 움직여 온 지구화, 도시화, 금융화, 그리고 생태적 위기에 빨간 불이 켜졌고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사람과 사회와 자연 모두에게 좋은 삶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인류에게 바이러스만이 위협이 되고 두려운 것일까요.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삶의 근간을 뒤흔든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요. 테러나 전쟁, 원전이나 핵무기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인류의 문명 방향과 만족을 상실한 욕망이 그랬습니다. 모든 지혜와 역량을 모아 코로나 19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삶의 전환을 위한 근본적인 성찰과 대안이 필요하다는 말에 모두가 공감하고 인식을 같이해야 합니다.
땅의 탄식과 뭇 생명들의 신음, 작고 여린 생명마저 씨가 마르게 되었고, 이토록 세상이 무법천지가 됨은 어찌된일입니까? 묻고 호소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답은 명확합니다.
1. 생명의 가치를 네 머리 위에 두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어야 합니다. 제 목숨은 그렇게 소중하면서 다른 생명은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기는 인간의 모순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은 생명의 무게를 천하와도 비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29의 알곡과 가라지의 말씀을 보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가라지가 거슬리느냐, 보기도 안 좋고, 곡식에 해도 되고 그러니 깔끔하게 가라지를 뽑고 싶겠지만, 자칫 곡식까지 뽑을까 걱정되니 그냥 두어라. 가라지를 뽑는다면서 자칫 알곡을 뽑을까 전전긍긍하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숨도 수단이 되고, 돈의 방편이 되는 이 안타깝고 허술한 세상에 주님은 목숨이 잘 못 될까 봐 조심해라, 차라리 그냥 두어라!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생명이듯이, 세상의 모든 생명이 그렇게 인식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이제 예수의 신앙이 생명의 가치를 하늘과 같다고 말해야 하고 교회가 그걸 삶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2. 작은 생명은 뿌리와 같다고 하십니다.
작고 낮고 약한 생명의 세계는 참으로 귀하고 놀랍습니다. 절대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크고 강한 생명일수록 작고 약한 걸 먹고삽니다. 생태계의 세계는 참으로 알 수 없고 신비롭습니다. 자연엔 약육강식이 가장 극명하게 존재하지만, 작고 약한 모든 생명들은 저들이 살아가는 또 다른 세계와 법칙이 있습니다. 자연은 크고 작음, 높고 낮음이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모든 생명은 그물망처럼 연결되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갑니다. 작은 생물들이 땅의 숨을 불어넣어 기름지게 하고 생명의 터전이 되게 합니다. 땅에서 자란 수많은 식물과 결실로 인해 땅 위의 모든 생명은 살고 또 자연으로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잃은 한 마리의 양 이야기(마18:12)는 작고 약한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입니다. 작고 약한 생명을 존중하거나 배려하지 않으려 합니다. 당장 도움이 안 된다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주저 없이 없애 버립니다. 자연의 질서와 공존에 대한 이해와 배려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무한하고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줄 착각합니다.
하나님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전3:1) 했지만, 인간은 이 모든 걸 민망하도록 계절과낮 밤을 바꾸고 생태계를 바꾸었습니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인간중심의 개발을 멈추고, 자연과의 공존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박노해 시인은 “큰 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작은 진실부터 살려가십시오. 큰 강물이 말라갈 때는 작은 물길부터 살펴주십시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흙과 뿌리를 보살펴 주십시오... 작은 일, 작은 옳음, 작은 차이,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기십시오.”라고 이야기 하면서 작은 것의 소중함을 말했습니다. 작은 생명은 뿌리와 같고, 모든 것은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겨자씨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작은 생명 하나로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삶의 공유가 확장되는 녹색교회가 희망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수와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그 모든 걸 초월해 있고, 전부가 하나요 하나가 전부인 하나님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시공을 초월하고 모든 경계를 넘어섭니다.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경계, 유대와 이방의 경계, 죽음과 삶의 경계를 허물듯이 말입니다.
선교는 그동안 인간 중심이었습니다. 녹색교회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자연의 모든 생태계와 복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녹색교회는 사람은 물론 모든 생명과 삶의 공유가 확장되는 곳입니다. 신앙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사람과 모든 생명은 그 존재가 확장되고 공유됩니다.
이제 교회는 예수의 부활과 복음에 단단히 서서 세상이 감당 못 할 놀라운 사상과 실천을 가져야 합니다. 신뢰를 잃고 자신마저 추스르기 힘든 오늘의 상황에 녹색교회가 희망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수많은 생명을 내듯이 녹색교회를 통해 생명이 우선되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로운’ 세상이라지만, 늘 답은 문제 안에 있듯이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며 그 안에서 공동체로서의 대안적 삶을 찾아야 합니다.
코로나 19로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과거의 전염병과는 또 다릅니다. 전 지구적인 위기와 대부분이 멈춰선 지금 각 나라는 복잡한 생각에 빠졌습니다. 이제는 글로벌이 아닌 로컬을 진지하게 고심해야 하고, 경제를 넘어 자연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해야 합니다. 이윤과 효율성이 과연 무엇인지와 소비와 버림을 미덕으로 여겼던 모든 것을 다시 원점에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결국, 녹색 신앙이 하나님의 뜻을 따를 뿐만 아니라 생명을 꽃처럼 아름답게 하고, 삶은 향기처럼 피어나는 세상을 꿈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